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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로트가수로 활동중인 인드라 스님은 영남대 음악대학 관현악과를 졸업한 플루트 연주자이기도 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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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체국공무원 양수찬씨는 지역의 다양한 무대에서 노래를 부르고 있다. |
■ 이색직업가수 화제
비구니 인드라·정목
방송출연 후 전국스타
김희갑·양인자 부부가
맞춤형 曲 만들어줘
우체국 직원 양수찬씨
세번째 음반 곧 출시
“향토가수 홍보 배려를”
◇사업보다 노래다
나이 스물에 가업 승계
장부 보며 음표 생각
밤무대 기타로 입문
뒤에서‘딴따라’ 수군
◇대단한 팔방미인
미스터코리아 입상…
10년간 100여회 모델
영화 ‘앉은…’ 출연
◇‘인간시대’나오다
92년 TV방영 큰 반향
섭외 봇물 무명 탈출
휴게소 메들리 ‘불티’
◇인기를 내려놓고…
TV약발 3년도 못 가
자선공연·후진양성으로
새로운 인생 항해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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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델가수’ 신광우가 자신이 운영하는 실용음악학원 무대 마이크 앞에서 지난날을 회상하고 있다(왼쪽). 한때 미스터코리아였던 그가 자신을 모델로 한 대회 포스터를 배경으로 포즈를 취하고 있다(오른쪽 위). 그는 수십년간 지역 어르신을 위해 자선봉사 공연을 해오고 있기도 하다. |
가수는 누구나 될 수 있다.
하지만 특정인은 이런저런 이유로 가수가 될 수 없을 것 같다. 가령 성직자나 공무원인 경우. 하지만 세상이 많이 달라졌다. 심지어 트로트 가수로 활동하는 승려와 공무원도 적잖게 등장하고 있다.
현재 가수 활동에 대한 대중적 호응을 가장 많이 받고 있는 사람은 단연 승려다.
가장 인지도가 있는 승려 가수는 비구니(여승)인 인드라와 정목 스님. 특히 인드라 스님은 대구에서 기반을 다졌다가 노래 때문에 전국구 스님이 됐다. 인드라는 영남대 음악대학 관현악과에서 플루트를 전공했고 10여년 이상 지역 각급 오케스트라에서 플루트 수석을 역임했다.
2009년 KBS ‘인간극장’에 그녀의 삶이 방송되면서 폭발적 인기를 모은다. 그녀의 가창력을 눈여겨 본 ‘향수’의 작곡가 김희갑씨와 그의 아내이자 유명 작사자인 양인자씨가 그녀를 승려 트로트 가수로 탄생시키기 위해 ‘무명’이란 곡을 안겼다.
SBS ‘힐링캠프’에 출연해 주목 받았던 정목 스님은 불교방송 BBS 라디오 방송에서 ‘무명을 밝히고’란 프로의 인기 진행자이자 승려가수로 유명하다. 최근에는 동요 앨범도 출시한 바 있다.
라이프 컨설턴트 등 다방면에서 대중적 활동을 해온 대구시 서구 평리동 진명사 주지인 원일 스님도 ‘트로트 승려가수’로 유명하다. 그는 지난 30년간 음악과 미술, 서예 등 각종 분야에서 다양한 활동을 해왔다.
대구시 달서구 우체국 금융사업부에 있는 양수찬씨. 그는 ‘우체국 가수’로 잘 알려져 있다. 삼성그룹에서 20여년 근무했고 2002년 50대초에 우체국 공무원의 길을 걷는다.
벌써 두 장의 음반을 갖고 있다. 1집은 향토애가 담긴 ‘동성로에서’(박재현 작사 작곡), 2집은 ‘사랑은 대박이야’(박재현 작사 작곡), 오는 10월쯤 3집 ‘부자 되세요’(류만현 작사 배원호 작곡)를 출시할 계획이다. 1974년부터 노래를 시작한 그는 대구CBS 전속가수 제1기생 모집에 도전했다가 낙방하고 잠시 가수의 꿈을 접었다. 10년 전 자신이 다니는 성당의 음악봉사단에서 드럼을 쳤고 작곡가 이호섭 대구 팬카페 회원으로 활동하다가 가수로 데뷔한다.
양씨는 “향토가수가 많이 있는데도 아직 지역은 서울 가수 위주로 돌아가고 향토가수에 대한 배려가 없어 노래를 홍보할 기회가 별로 없다”고 고충을 토로했다. 요즘은 지역 축제 및 사회·종합복지관 등을 찾아 자원봉사 노래를 많이 한다.
◆ 인간시대 나오자 돈방석 앉은 모델가수
이색적 삶을 사는 그를 방송국 PD가 가만두지 않았다.
1992년 MBC ‘인간시대’ 작가한테서 전화가 왔다. 내 삶을 다큐로 만들어 보고 싶다고 했다. 대구경북에서는 인간시대 1호 출연자였다. 당시 난 결혼을 해서 두류동에 집이 있었는데 방송팀과 함께 집에서 숙식을 함께했다. 1시간 남짓한 방송이었는데 내 삶을 송두리째 바꿔놓을 정도로 엄청난 반향이 일었다. 평소 냉랭하게 대하던 몇몇 굵직한 회관·클럽 사장한테서 출연교섭 전화가 왔다. 지역에선 가장 유명한 연예인이라고 판단한 모양이다. 심지어 중구 대신동 시민극장 지하 클럽 맥심 측은 지역 신문에 광고를 내면서 ‘신광우 특수’를 함께 누렸다. 무명가수에서 유명가수로 발돋움하는 순간이었다. 한번 출연에 100만~200만원을 받았다.
금상첨화로 서울의 모 음반회사에서 음반취입 제의까지 있었다. 허스키한 목소리 때문에 ‘대구의 현철’로 불렸다. 쾌재를 부르면서 상경했다. 첫 음반을 만들기 위해 스튜디오에서 숙식을 거의 해결했다. 인간시대 전에 첫 음반인 ‘추상’(이일기 작곡)은 반응이 없었다. 둘째 음반 ‘날 울리고’(이일기 작곡)도 호응이 없었다. 음반이 나오면 즉각적으로 방송 출연과 이어져야 하는데 불발이었다. 겨우 ‘연예가 중계’와 ‘전국은 지금’에 짤막하게 언급될 정도였다. 하지만 메들리 테이프인 ‘잘생긴남자’는 꽤 반응이 좋았다. 특히 고속도로와 휴게소, 일반 레코드숍에서도 반응이 좋아 5만개가 팔렸다. 4집 ‘너 때문에’는 CD로 발매된다. 이 음반에는 대구를 노래한 두 번째 지역 캠페인송인 ‘내고향 대구’가 있다. 애향심을 노래한 것으로 지역 가수로는 처음이었다.
전성기는 노루꼬리보다 더 짧았다.
인간시대 ‘약발’은 3년을 넘지 못했다. 나를 찾는 사람이 뜸해진다. 출연료도 예전만 못하고 다시 무명의 신광우로 추락했다. 결과적으로 서울에 올라갔으면 대박이 났을지도 모르지. 대구에서 열심히 했지만 가요계는 서울 위주로 돌아갔다. 설상가상 내 유명세를 노린 한 ‘거리의 여자’에게 걸려 스캔들 아닌 스캔들에 시달려 가족한테 더 깊은 상처를 안겨주기도 했다.가족과 떨어진다는 게 너무 힘들어 대구에 그대로 눌러앉는다.
◆인기추락 때 선택한 자선봉사
팬이 빠져나간 자리에 ‘회환’이 찾아들었다.
마음에 중심을 찾았다. 그러던 어느 날 꿈에 어린 시절 날 부모 이상으로 돌봐준 이웃 할머니가 나타났다. 그렇다. 나는 그 할머니에게 진 마음의 빚을 여태껏 갚지 못하고 있었다. 할머니가 이제사 내 앞에 나타난 이유를 알 것 같았다. 할머니는 내가 어렸을 때 가산을 탕진하고 남산동의 한 양로원으로 갔지만 그 이후로는 만나지 못했다. 그래, 그 할머니를 생각해서라도 양로원 자선공연에 매진하자!
매달 한 번 신일양로원에 갔다. 틈틈이 군부대장병, 소년소녀가장, 장애우, 독거노인을 위한 음악회를 기획했다. 부모를 위한 공연처럼 직접 음식도 만들어 갔다. 형편이 좋지 않았지만 지극정성으로 베풀었다. 한 번 할 때마다 100만~150만원의 경비가 들어간다. 당시에는 연예봉사단도 없었다. 가수가 사비를 들여 양로원 자선음악회를 하는 사례가 전무하다시피했다. 일부는 ‘큰 돈도 벌지 못한 삼류가수가 남을 돕는다’면서 비웃기도 했다.
지금까지 모두 458회를 했다. 지금은 주로 고령 대창양로원을 찾는다. 만약 자선무대를 스스로 만들지 못했다면 나는 전성기만 중얼거리는 못난인생의 주인공이 됐을 것이다. 자선무대는 내 삶의 그림자를 말끔히 닦아주는 ‘특급 엔도르핀’이었다. 처음에는 관망만 하던 예술인들이 하나둘 가세했다. 그들 덕분에 93년 자선봉사단인 ‘예승회’를 만들 수 있었다. 덕분에 대구시장 선행시민상, 적십자총재상, 대구예총이 주는 대구예술상 등을 받았다. 가수생활만 했다면 과연 내가 감히 그런 상을 받을 수 있었을까.
◆ 후배 양성 위해 음악학원을 열다
지역의 밤무대가 붕괴되었다.
무대가 없어졌다. 내가 가장 사랑하는 음악을 포기할 수 없었다. 후배를 양성하기 위해 2003년 서구 내당동 삼익뉴타운 맞은편에 신광우실용음악학원을 연다. 대구에서 가장 규모가 컸다. 레슨 뮤직룸이 8개 있다. 피아노, 기타, 대금, 색소폰 등 여러 악기도 다룰 줄 알고, 노래도 알고, 음반산업은 물론 가수 되기의 어려움까지 훤히 알고 있기 때문에 수강생 사정에 맞는 지도가 가능했다. 그렇게 해서 박미련(혼자사는여자·그회관에서) 정명(경산아리랑), 수찬(사랑은 대박이야·동성로에서) 등 20여명의 제자를 배출했다.
음악학원도 예전같지 않다. 몸도 예전만 못하지만 그래도 아침에 3시간 동안 운동을 한다. 하지만 ‘대박’은 생각하지 않는다.
남이 나를 일류라 해도 내가 삼류라 하면 그건 삼류인생이다. 반대로 남이 날 삼류라 해도 내가 일류라 하면 그건 진정 일류다.
오늘 아침 거울 속 내 얼굴을 유심히 살펴봤다.
눈빛과 눈썹이 참 매섭다. 가수할 얼굴이 아니다. 조선시대에 태어났다면 유명장수가 됐을 것 같다. 그래서 그런가, 내 33대조가 고려를 연 왕건의 오른팔 신숭겸 장군 아닌가. 한때는 그 기세를 믿고 정치인이 되고 싶었다. 이 모 국회의원 후원회장도 맡았다. 어쩜 무덤 속 아버지가 시킨 건지도 모른다.
요즘 내 스스로에겐 이런 다짐을 한다.
‘다음 세상에서는 가수도 모델도 싫고 그냥 탤런트나 해볼까.’
‘상태, 이놈아~. ’
아버지의 가슴이 또 한번 쿵 내려앉는 소릴 들었지만 나는 무덤 쪽을 바라보지 않았다. 그런 게 삶인지도 모른다. 다 알면서도 아는 걸 하지 못하는 것, 그것 때문에 ‘인생극장’이 가능한 건지도.
평생 마음고생만 시킨 아내. 아직도 ‘미완성 교향곡’을 지휘하고 있는 철부지 남편을 지켜주기 위해선지 미장원을 꽉 붙잡고 있다. 그녀에게 무슨 말을 해줘야 할까.
사랑과 미움은 한 항렬인 모양이다? ㅎㅎㅎ~
이춘호기자 leekh@yeongn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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