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리텔링 2013] 경북, 이야기 보따리를 풀어라 <16> 영남 3대 의병장 김면의 충절(고령)

  • 손동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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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3-09-02   |  발행일 2013-09-02 제13면   |  수정 2021-06-03 15:01
한여름 땡볕에도 갑옷 벗지않고 가슴에 나라를 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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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성역화 사업을 완료한 고령군 쌍림면 고곡리 김면 장군 유적지 전경. 6천769㎡의 부지에 도암서원, 사당, 신도비, 묘소 등이 들어서 있다.

 

◆ Story Briefing 

고령에서 태어난 송암(松菴) 김면(金沔·1541~1593)은 임진왜란 당시 대표적인 의병장이다. 의령의 곽재우, 합천의 정인홍과 함께 ‘영남 3대 의병장’으로 불린다. 성리학의 대가 남명 조식과 퇴계 이황 문하에서 수학했고, 한강 정구와 막역한 친구 사이였다. 나라에서 벼슬을 내렸지만 관직에 뜻을 두지 않고 산야에 묻혀 오직 학문에만 전력했다. 그런 그가 스스로 일어선 이유는 임진왜란 때문이었다. 임진년 왜구가 침략하자 분연히 떨치고 일어나 의병의 선봉에 섰다. 이후 왜군과 30여 차례 전투를 치르며 큰 공을 세웠다. 전투를 치를 때는 한여름의 땡볕과 한겨울의 혹한에도 절대 갑옷을 벗지 않았다고 한다. ‘경북, 이야기 보따리를 풀어라’ 16편은 고령 출신 의병장 김면에 대한 이야기다.

 

 

#1. 왜군과 30여 차례 전투를 치르다

왜군이 부산포에 상륙한 게 선조 24년(1592) 4월14일이다. 이내 동래성을 빼앗고 파죽지세로 경상좌도로 북진했다. 순변사 이일이 상주에서 대패하고 도순변사 신립마저 충주에서 패하자, 한성의 함락이 코앞에 닥쳤다. 선조는 서울을 버리고 북으로 피했다. 왜군은 평양으로 진격해 왔다. 선조는 또 의주로 몽진했다. 한편으로는 조선반도 깊숙이 들어온 왜군은 군량미 확보가 관건이라 여기고 호남 진출을 꾀했다. 그러나 남해에는 이순신이 버티고 있고, 진주 쪽은 곽재우에 막혀 부득이 경상우도(낙동강 서편의 경상도)인 거창으로 해서 호남을 공략할 수밖에 없었다.

이에 각 지역의 의병장들이 발호하고, 관군들이 합세하여 왜군에 대항했다. 그중에서도 고령의 김면 의병장, 의령의 곽재우 의병장, 진주부사 김시민이 철저한 방어를 해, 왜군의 호남 진격을 막았다. 특히 군수물자의 수송로인 낙동강 수로를 중심으로 많은 전투가 벌어졌다. 의병들 가운데서 경상우도의 3대 의병장으로 고령의 김면, 의령의 곽재우, 합천의 정인홍 등이 꼽히는데, 이들은 조식의 문하인 남명학파 선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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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적지에 들어서면 오래된 배롱나무가 눈길을 끈다. 하늘을 향해 길게 뻗은 자태가 나라를 위해 분연히 일어선 김면의 의로운 삶을 닮은 듯하다.

 

송암 김면(1541~1593)은 고령에서 태어났다. 15세 때에 대구감영의 백일장에서 장원하였으며, 17세 때 남명 조식에게 수학, 송암(松菴)이란 현판을 받아 호를 삼을 만큼 조숙했다. 18세 때는 최영경과 김우옹, 정구, 박승 등과 시로써 교류했고, 20세에는 이황에게 수학했다. 성정이 강직하고 정의심이 강했다.

부친이 함경도 경원도호부 부사로 재직하다가 병사함에 김면은 2천리 길을 염천에 도보로 왕래하여 시신을 고향 고령 선산에 옮겨 안장하였다. 그의 효행과 학문이 알려져 선조는 공조좌랑의 벼슬을 제수하였으나 잠깐 상경하여 부임했을 뿐, 이내 모친의 병을 핑계로 돌아와 학문에 전념했다.

이러한 그를 일으켜 세운 게 조선 초유의 국난이었다. 임진년 왜구가 침략하자 그는 “나라가 위급한데 목숨을 바치지 않으면 어찌 성현의 글을 읽었다 하리오” 하고 분연히 떨치고 일어나 의병의 선봉에 섰다. 그의 일족과 가동 향민 700여명이 뒤를 따랐다. 먼저 왜군이 낙동강을 따라 오르내린다는 점을 중시, 강에서 전투를 벌였다. 이후 거창으로 나아가니, 거창 지역 의병들이 그를 대장으로 추대했다. 이에 문위, 곽준, 윤경남, 류중룡, 박정번, 오장 등을 참모로 하고 박성을 군량담당의 수속관(搜粟官)에 임명, 군량을 비축하면서 곳곳에 격문을 보내어 의병을 모았다. 불과 며칠 사이에 2천여명이 모였다. 인근에서 함께 싸우겠다고 몰려드는 이들이 나날이 늘어났다.

당시 의병들은 곳곳에서 봉기하여 관군과 협력하기도 했는데, 자료에 따르면 관군은 경상우도 순찰사 김성일 휘하에 1만5천(합천), 경상우도 절도사 김시민의 휘하에 1만5천(진주), 그리고 의병장 김면 아래에 5천(거창), 의병장 정인홍 아래에 3천(합천), 의병장 곽재우 아래에 2천(의령)으로 총 5만이었다. 그 외 초계의 이대기 등 여러 의병이 수백명을 이끌고 있었다고 한다.

김면은 지례(知禮), 사랑암(沙郞巖), 성주(星州), 두곡(豆谷), 변암(弁巖) 등지에서 30여 차례 전투를 치렀다. 그중 중요한 게 고령 전투와 우척현 전투, 그리고 성주 전투다. 고령 전투는 낙동강 포구 개산포(오늘의 개포)에서 벌어졌다. 낙동강의 창녕 박진과 대구 화원 포구의 중간에 위치한 개산포는 고려시대 강화도에서 만든 팔만대장경을 서해안 남해안을 거쳐 낙동강으로 역류하여 이곳에서 하역해 합천 해인사로 운반했다 하여 ‘개경포(開經浦)’라 하기도 한다. 물굽이가 크게 휘돌아 들며, 양안의 모래밭이 넓게 펼쳐져 있었다.

김면은 강의 흐름을 주시하면서 주도면밀하게 전투에 임했다. 이곳의 지리를 잘 아는 박정번을 불렀다.

“왜군들이 배를 타고 오는 길목인 강의 물속에 말뚝을 박는 게 어떤가?”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튼튼한 나무를 대거 수거해 와서 강물 속에 말뚝을 박았다. 왜선이 지나가면 말뚝에 걸려 좌초하도록 한 것이다. 그러고는 문위와 곽준에게 당부했다.

“너희 군사들은 요처에 숨어 적의 동태를 감시하라.”

임진년 6월9일에 현풍에서 내려오는 적선 80여척이 걸려들었다. 말뚝에 배가 받쳐 뒤집히거나 좌초하자 왜군들은 물에 뛰어들어 우왕좌왕했다. 모두 섬멸했다.

왜적이 정진(鼎津) 남쪽에 진을 치고 있다는 첩보가 잇따라 올라왔다. 김면은 군사를 정비하여 은밀하게 그리로 이동했다. 인근의 피란민들이 남부여대하여 김면의 군대를 따라붙는 기이한 현상도 나타났다. 피란 가는 것보다 김면의 군대가 신출귀몰하니, 따라가는 게 목숨을 부지할 수 있다는 소문 때문이었다. 김면은 정진과 무계에서 적을 크게 이겼다. 그리하여 왜선을 나포하고 수백여 왜군의 목을 벴다. 왜선에 실려있던 내탕고의 보물도 압수하는 전과를 올렸다.


#2. 거창 전투 승리로 왜의 호남진출 막아

다시 첩보가 날아들었다.

“왜장 고바야가와(小早川隆景)가 이끄는 2천여 대군이 금산(김천)을 점령하여 지례 우척현을 넘어 거창으로 진격하려 합니다.”

금산에 집결한 왜적은 남으로 거창 함양을 거쳐 전라도로 진출하려고 우척현(牛脊峴)으로 들어왔다. 우척현은 당시 경상도에서 전라도로 넘어가는 중요한 고개였다. 이에 김면의 부대는 거창으로 이동, 7월10일 우척현에 매복했다. 김면은 이 전투에 특히 약초꾼들과 포수들이 대거 참여도록 독려했다. 산척(山尺= 산에서 짐승을 잡고 약초를 캐어 사는 사람)들을 효율적으로 참전시켜 산악전에 유리하게 전투를 이끌었던 것이다. 산악 곳곳에 군사를 매복하였다가 일시에 내려치는 기습전을 벌였다. 적은 갑자기 나타났다 사라지는 김면의 의병들에 혼비백산하여 북으로 달아났다. 이 전투는 임진란 산악전투의 대표적 사례다. 이 전투는 경상우도 순찰사 김성일이 총지휘를 했는데, 진주부사 김시민과 김면, 금산 의병장 여대로 등이 합심하여 협공을 실시했다. 결과는 대승이었다. 이 전투로 왜군들의 전라도 진출이 좌절되는 결정적인 계기를 마련했다.

당시 거창 전투 때 김면이 쓴 시 ‘행군도신창유감(行軍到新倉有感)’이 전해온다.


나라가 깨어지고 가문이 망함에 오랑캐 복수에 바빠/ 군사 거느리고 세 번이나 신창에 왔는데/ 적병은 많고 우리 군사 적다고 말하지 말라/ 고향 그리는 민심을 어찌 잊으랴

國破家亡虜報忙/ 領軍三度到新倉/ 莫言敵衆吾兵少/ 思漢民心不敢忘


김면이 치른 세 번째의 큰 전쟁은 성주지역에서 벌어졌다.

왜장 모리(毛利揮元)가 성주성에 웅거하고 있었다. 이에 김면이 전라 의병장 최경희에게 지원을 요청, 경상우도 의병장 정인홍과 부장 장윤을 보내어 성주성을 공격했다. 12월4일에 공격을 시작했다. 다음 해인 계사년 1월5일까지 수차례 공격함에 왜군은 버티다가 달밤에 성을 빠져나가 도망쳤다.


#3. 왜병 공략 준비 중 과로로 쓰러져

조정에서는 김면의 공을 높이 인정하여 수차 벼슬을 내렸다. 합천 군수를 제수하였으나 그는 사양했다.

“의병을 이끄는 대장이 한곳에 머물 수 없습니다”라는 게 이유였다.

다시 장악원정(掌樂院正)에 올리고 이어서 당상관인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를 제수했다. 그런 와중에서도 그의 의병활동은 열을 더해갔다. 김성일은 그러한 김면의 혁혁한 공을 왕에게 보고했다. 이에 의병대장의 칭호와 함께 경상우도병마절도사의 직함을 받게 되었다. 경상도 지역의 의병을 모두 관할하면서 관군까지 통솔하는 위치였다.

전투를 치르면서 김면은 주야로 갑옷을 벗지 않았다. 한여름의 땡볕과 폭우는 물론 한겨울 혹한의 눈서리에도 노출되었으나 잘 버텨나갔다. 그런 그를 염려하여 주변의 참모들이 “그러다 죽습니다. 몸을 좀 챙기면서 하십시오”라고 말렸으나 끄떡도 하지 않았다. 병을 칭탁하여 싸움을 물릴 수 없다며 버텼다. 그가 쓰러졌을 때에야 “오직 나라 있는 줄만 알았지 내 몸 있는 줄은 몰랐는데, 불행하게도 목숨을 바치려 하니 하늘이 실로 무심하도다”라고 탄식했을 정도였다.

2월에 왜군은 한계를 느꼈다. 명나라의 원군이 들어와서 평양을 수복한 데다 겨울을 겪으면서 전세가 불리해졌기 때문이다. 이에 후퇴하면서 선산(善山)에 집결하였다. 이를 호기로 여긴 김면은 적을 섬멸할 계획을 세우기 시작했다. 그러나 오랜 전투를 치르느라 쌓인 피로가 겹쳐 병을 얻었다. 그리하여 계사년 3월11일 금산 진중에서 순국하였다. 향년 53세였다.

그가 세상을 떠남에 김성일(金誠一)은 크게 애통해하며 장계를 올려 “그의 나라를 위하는 충성심은 맑고 훤하기가 단사(丹沙)와 같았고, 그 가솔이 10리 밖에 있어도 한 번도 찾지 않았습니다. 장성(長城)이 한 번 무너지니 삼군이 모두 눈물을 삼키고 하늘이 돕지 않아 이 지경에 이르렀나이다” 하였다. 선조임금은 애도하여 예관(醴館)을 보내고 자헌대부 병조판서로 추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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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면의 사적(事蹟)을 기록한 신도비와 묘소는 유적지 오른쪽 산 능선에 자리하고 있다.
 

김면은 명문집안 출신으로 아버지는 함경도 경원부사를 지냈다. 조부 탁(鐸)은 문과에 급제하여 도승지에 이르렀다. 증조부 장생(莊生)은 참판으로 아들 6형제를 두었고 아들 셋이 등과했으며, 장생은 많은 토지를 소유하였다. 그의 7대조 김남득(南得)이 고려조에 큰 공을 세워 고양부원군이 되었으며, 후손들이 고령에 세거하여 고령 김씨의 시조가 되었다.

김면에 관한 자료는 많지는 않다. ‘삼강략(三綱略)’ ‘심유지(心遺誌)’ 등 많은 저술들이 있었으나, 유실됐다. 전쟁 중에 순찰사 김성일, 곽재우 장군과 주고받은 서찰, 전쟁 중에 쓴 시문이 다수 남아 있다.

그의 사후 뜻을 기리기 위해 고령에 도암사(道岩祠)가 세워져 뒷날 도암서원이 되었지만,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 따라 없어졌다가 2002년에 복원되었다. 도암서원을 비롯해 사당, 신도비, 묘소 등을 일괄 지정한 김면장군 유적지가 고령군 쌍림면 고곡리에 있다. 1988년 경북도 기념물 제76호로 지정된 유적지는 2011년 성역화사업을 완료했다. 6천769㎡의 부지에 도암서원 보수와 함께 강당과 동서재, 누각 등을 신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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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하석

글=이하석 시인·영남일보 부설 한국스토리텔링연구원 고문 

사진=손동욱기자 dingdong@yeongnam.com
공동기획:Pride GyeongBu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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