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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피플] ‘높이뛰기의 전설’에서 교수가 된 이진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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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허석윤기자 이지용기자
  • 2013-09-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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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인자에 오르려면 거기에 미쳐라”

한국 육상 높이뛰기의 살아있는 전설 이진택 교수가 지난 3월부터 근무하고 있는 대구교대 캠퍼스에서 환한 웃음을 짓고 있다. 이지용기자 sajahu@yeongnam.com
2m34㎝. 한국 육상 높이뛰기의 최고 기록이다. 1997년 수립된 이 기록은 16년이 넘도록 깨지지 않고 있다. 궁금증이 생긴다. 도대체 이 기록이 얼마나 대단하기에 지금껏 ‘마의 벽’이 되고 있을까. 아시아기록(2m39㎝), 세계기록(2m45㎝)과 비교해보면 고개가 끄덕여 진다. 물론 선수 입장에서는 큰 격차겠지만, 일반인 눈으로 보면 세계 수준에 그렇게 많이 뒤떨어지지 않는다. 높이뛰기는 마라톤과 함께 한국육상의 자존심을 세웠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한국 높이뛰기의 최고 기록 보유자가 누구인지 알 만한 사람은 안다. 한때 ‘스카이 리’로 불렸던 대구 사나이 이진택(42). 그를 빼놓고는 한국 높이뛰기를 말하기 어렵다. 한국신기록을 일곱 번이나 갈아치운 ‘살아있는 전설’이다. 그런 그가 올해 ‘신기록’은 아니지만 어쩌면 자신의 인생에 있어 가장 큰 도약을 했다. 육상 선수 출신으로는 흔하지 않게 대학 교수가 된 것이다.

교수가 된 게 운은 아니었을 것이다. 아마도 그 원동력은 선수 시절 몸에 밴 도전 의식과 어떤 장벽도 뛰어넘고야 말겠다는 강인한 정신력이었을 것이다. 여기에 제2의 인생을 교육에 헌신하겠다는 뚜렷한 목표의식과 철저한 준비, 피나는 노력이 그의 꿈을 현실로 만들었다. 습관처럼 그는 또 꿈을 꿀 것이다. 최고의 선수에서 최고의 교육자가 되는 꿈을. 그리고 지금까지 그랬듯이 언젠가 꿈을 이룰 것이다. 지난 3월 대구교대(체육교육과)에 임용된 이진택 교수를 만나 역동적인 인생 스토리와 육상 철학을 들어봤다.


2m34㎝ ‘마의 벽’ 세우다
97년 수립 후 16년째 깨지지 않는
한국 육상 높이뛰기의 최고기록
도전 의식과 정신력 없었다면 불가능

쓰러지면 일어났던 선수 시절
초등 3학년 때 육상부 선생님에 발탁
의욕 때문에 몸 망가져 한때 포기
6전7기 끝에 92년 첫 한국新 수립

‘공부하는 선수’ 교수가 되다
운동과 병행하며 힘겹게 이룬 결실
한국 육상 침체 못 벗어나 아쉬워
육상진흥센터 문 열어 어린 선수 키워야


2003년 대구하계유니버시아드 개회식에서 성화최종주자였던 이진택이 성화를 들고 성화대를 향해 뛰어가고 있다. <영남일보 DB>
-교수가 되려고 마음먹은 계기는.

“멘토가 있었다. 예전에 태릉선수촌에서 함께 생활하던 세단뛰기 국가대표 선배였는데, 그 선배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교수의 꿈을 가진 그는 운동과 공부를 병행하며 나에게도 많은 조언과 격려를 해줬다. 그때 크게 느낀 바가 있어 열심히 공부를 하게 됐고 마침내 꿈을 이뤘다. 너무도 감사한 그 선배는 지금 경희대 체육과에 재직 중인 류재균 교수다.”

-많은 준비와 노력이 필요했을 것 같다.

“13년간의 국가대표 활동을 마치고도 나름대로 바빴다. 그런 중에도 공부를 병행해 한국체대에서 석사과정을 밟았다. 이후 2003년에 고향으로 내려와 대구체고에서 1년간 교사로 근무한 후 공부를 더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한국체대에서 박사과정을 시작했다. 그 중간에 국가대표 코치를 맡았고, 또 육상연맹과 대한체육회 일을 하면서 현장 경험과 지식을 쌓을 수 있었다. 박사학위 논문을 준비하면서 교수가 되기 위해 본격적으로 움직였다. 서울지역의 여러 대학에 출강해 강의하던 중 올해 1월 대구교대에서 육상실기가 가능한 사람을 뽑는다는 공고를 보고 망설임 없이 지원했다.

-교수 공채는 경쟁률이 높은데.

“경쟁률이 7대 1이었다. 사실 시험준비 하느라 많이 힘들었다. 실기테스트(허들과 높이뛰기)가 중요한데 준비 기간 두달동안 선수시절 못지않게 훈련했다. 이번이 마지막 기회일지 모른다는 생각에 올림픽을 앞둔 심정으로 임했다. 겨울에 혼자 훈련하는 일이 쉽지 않았지만, 좋은 결실을 본 게 기쁘다.”

-교수 생활은 어떤지.

“고향에서 미래의 교사들을 가르치는 일이 무척 보람차다. 대구교대는 육상부가 없지만 모든 학과 학생들이 필수적으로 육상을 배워야 한다. 여기서 잘 가르치면 우리 학생들이 나중에 학교 현장에서 육상 꿈나무를 발굴하고 키울 수 있다고 믿는다. 체육교육과 선배 교수분들이 초보 교수인 저를 잘 대해줘 즐겁게 지낸다.”

-선수 시절 이야기를 들려달라. 높이뛰기는 어떻게 시작했나.

“초등학교 3학년 때 운동회서 육상부 담당 선생님의 눈에 띄어 발탁됐다. 이후 소년체전 대표로 뽑히면서 높이뛰기 전문 선수로 성장했다. 중학교와 고교에서 전문기술을 가르치고 이끌어 준 것은 신춘우 선생님이었다. 특히 그 선생님은 제가 1990년 북경아시안게임 국가대표로 선발되는 데 큰 도움을 주었다.”

-선수 생활 중 힘들었던 일은.

“1990년이다. 한껏 꿈에 부풀었던 국가대표 생활이 한달 만에 끝났다. 이유는 허리부상 때문이었다. 당시 태릉선수촌에서 훈련을 했는데 의욕이 과했던 탓에 몸에 무리가 갔던 것이다. 선수촌에서 퇴촌 당한 이후 다시 학교로 돌아와 모든 것을 포기하고 다른 길로 가야 한다는 자괴감 때문에 너무 고통스러웠다. 그러던 중 내 인생을 구해준 ‘은인’을 만났다. 지인을 통해 탁구 국가대표 팀 닥터를 역임했던 스포츠 마사지 전문가 박영애씨를 만난 것이다. 현정화 국가대표 감독과도 친한 그 누님의 무료 봉사로 기적같이 예전의 몸을 회복했다. 그해 전국체전에서 3등을 했다. 예전엔 1등만 해서 몰랐는데 3등이 그렇게 소중한지 처음 느꼈다.”

-가장 기억에 남는 대회는.

“한국신기록을 처음 세운 92년 전국육상선수권대회다. 국내기록을 세우기까지 6번을 좌절했는데, 6전7기 끝에 2m28㎝을 뛰어 기록을 갈아치웠다. 덕분에 그해 열린 바르셀로나 올림픽에 나가게 됐다.”

-경기장에 나서면 무척 떨릴 것 같다.

“긴장을 극복하는 게 중요하다. 바를 향해 뛰기 전에 성공하는 모습을 머릿속에 영상으로 늘 떠올렸다. 그리고 이 높이는 누구를 위해 성공할까를 생각했다. 주로 부모님이었지만 2002년 때는 예외였다. 지금은 아내가 된 여자친구를 위해 뛰었다. 당시 저와 같이 높이뛰기 국가대표였던 아내와 결혼날짜, 예식장까지 다 잡아놓았지만 미처 부모님께 알리지 못한 상황이었다. 금메달을 따고 당당하게 결혼소식을 전하고 싶었다. 결국 우리는 2002부산아시안게임 높이뛰기 남·여 대표로 동반출전해 1위를 차지한 뒤 현장에서 결혼을 발표했다.”

-선수 은퇴 후에도 육상 발전에 노력해왔고, 2011 대구세계육상대회 성공개최에도 기여했는데.

“고향에서 치러지는 세계육상대회에 지도자 및 심판으로 참여하게 돼 무척 영광스러웠다. 특히 시민들의 반응이 기대 이상이었다. 당시 관중으로부터 ‘육상이 이렇게 재미있는 줄 몰랐다’는 말을 많이 들어 육상인의 한 사람으로서 뿌듯했다.”

-한국, 특히 대구의 육상 중흥정책은 잘되고 있다고 보나.

“아직 미흡한 것 같다. 높이뛰기의 경우 제 뒤를 이을 재목이 많은 것 같아 다행이지만, 다른 종목들은 여전히 침체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게 현실이다. 사실 대구세계육상대회는 한국육상에 좌절과 희망을 동시에 줬다고 본다. 세계 바닥 수준의 우리나라 경기력은 국민을 실망시켰지만, 분명 어린 선수들은 자신감을 가졌을 것이다. 현재의 한국 육상이 바닥이라면 이제 그 바닥을 차고 오르는 일만 남은 게 아닌가. 대구의 경우 무엇보다 육상진흥센터가 아직 문을 못 열고 있는 게 안타깝다. 관계자들 간 소통과 전문성 부족 때문인 것 같다. 얼마 전 하도 답답해 현장에 가보기도 했는데 빨리 문제가 해결돼 육상중흥에 속도가 붙기를 바란다.”

-후배 선수들에게 들려주고픈 말은.

“선수시절 1인자가 될 수 있었던 것은 한마디로 높이뛰기에 미쳤기 때문이다. 수많은 실패 속에서도 좌절하지 않았고, 항상 더 높은 곳을 향해 도전했다. 머릿속에는 운동밖에 없었다. 하지만 요즘 자라나는 선수들은 집념이 약한 것 같다. 여기에는 환경 탓도 많다. 운동을 방해하는 각종 디지털 기기, 특히 스마트폰 때문에 집중하지 못하는 경우를 많이 봤다. 훌륭한 선수로 성장하려면 이를 극복해야 한다. 단언컨대 운동은 디지털이 아닌 아날로그다. 자신을 믿고 난관에 맞서는 에너지와 열정이 필요하다.”

-대구육상 발전에 힘을 보탤 것으로 믿는다.

“물론이다. 지금까지 해온 대로 앞으로도 육상발전에 도움이 되는 일에 적극 나서겠다. 다만 지금은 학교 일에 충실해야 한다는 생각이다. 좌우명이 ‘제자리를 지키자’이다. 지금 이 자리서 가장 잘 할 수 있는 일을 하자는 의미다. 나중에 여건이 되면 대구를 육상의 메카로 만드는 일에 최선을 다하겠다.”

허석윤기자 hsyoon@yeongnam.com


이진택은…

▷학력 =대구 아양초등, 평리중, 성광고, 경북대 체육교육과, 한국체대 대학원(석·박사)

▷주요 성적 =높이뛰기 한국신기록(7회), 1998방콕·2002부산 아시안게임 금메달(2연패), 올림픽 3회 출전(1992바르셀로나, 1996애틀랜타 결승 8위, 2000시드니) 세계육상선수권 4회 출전(1997 아테네 결승 8위, 1999세비야 결승 6위)

▷경력 =국가대표 코치(2005), 국가대표 주니어 대표 코치(2006~2013. 2), 대한육상경기연맹 이사(2009~2012), 대한장애인육상경기연맹 이사(2006~현재), 2011 대구세계육상경기연맹 이사, 대구체고 교사(2003~2004)

▷수상 실적 =대한체육회 우수선수 경기상(1996), 체육훈장 기린장(1992), 맹호장(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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