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가 있는 옛懸板을 찾아서 .26] 봉화 청암정 ‘청암수석’

  • 김봉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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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3-10-30   |  발행일 2013-10-30 제20면   |  수정 2013-10-30
老학자는 이 정자를 꿈에서도 그렸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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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 문신인 충재 권벌이 1526년에 건립한 청암정(봉화군 봉화읍 유곡리). 미수 허목은 이 정자의 아름다움에 대한 소문을 누차 듣고 직접 찾아가고 싶었으나 결국 못 가고, 그 아쉬운 마음을 담아 별세 3일 전에 편액 글씨 ‘청암수석’을 써 보냈다.

봉화 닭실마을은 문수산 자락 끝에 울창한 솔숲을 배경으로 옛 한옥이 자리 잡고 있는 마을이다. 마을 앞에는 들판이 펼쳐져 있고, 하천이 마을과 들을 둘러 계곡으로 이어진다.

조선 중기 실학자인 이중환이 ‘택리지’에서 영남의 대표적 길지(吉地)로 꼽은 닭실(酉谷)마을은 풍수적 명당으로서도 명성이 높았던 지역이다. 닭실이라는 명칭은 금빛 닭이 알을 품고 있는 금계포란형(金鷄抱卵形)의 지형이라고 해서 붙여졌다. ‘택리지’는 이곳 닭실마을과 경주의 양동마을, 안동의 내앞마을 및 하회마을을 3남의 4대 길지로 꼽았다.

이 닭실마을을 대표하는 건축물이 정자 청암정(靑巖亭)이다. 청암정은 기묘사화로 파직당한 후 닭실로 들어가 정착한 충재(齋) 권벌(1478~1548)이 창건한 정자다. 바위 위에 정자를 앉히고 그 주위를 연못으로 만든 이 청암정은 우리나라의 대표적 정자 중 하나로, 사계절 아름다운 경치를 선사한다.


미수 허목이 쓴 편액글씨…한 번도 가보지 못한 청암정을 그리워하는 마음 가득

◆ 미수 허목이 별세 3일 전에 쓴 절필 ‘청암수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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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수 허목의 글씨 ‘청암수석(靑巖水石)’원본(위)과 정자에 걸린 편액. 원본 편액은 충재박물관에 보관돼 있다.

이 청암정에 오르면 눈에 가장 먼저 들어오는 것이 ‘청암수석(靑巖水石)’ 편액이다. 특이한 전서 글씨로 된 것이어서 무엇을 의미하는지 모르는 이도 있겠지만, 글씨 자체만으로도 눈길을 끌 만한 편액이다. ‘미수전(眉篆)’으로 유명한 미수(眉) 허목(1595~1682)의 글씨 편액이다.

이 글씨는 미수가 청암정이 아름답다는 소문을 여러 번 듣고는 한 번 찾아가보려고 했으나 결국 가보지 못하고, 별세하기 사흘 전에 그 마음을 담아 써 준 작품이다. 각별한 사연이 담긴 작품인 것이다. 미수는 ‘권 충정공은 후덕(厚德)과 대절(大節)로 유림 학사들이 존경하고 사모하지 않는 이가 없다’고 평할 정도로 충재의 인품을 존경했음은 물론, 청암정의 풍광이 각별히 아름답다는 이야기를 듣고는 꼭 한 번 가보려는 마음을 가졌으나 실천하지 못했던 것이다.

별세한 해인 88세 때 초여름, 미수는 너무 연로해 도저히 봉화까지는 갈 수 없는 처지였기에 청암정에 대한 마음을 담은 대자(大字) ‘청암수석’ 글씨를 정성들여 쓰게 된다. 충재 종가에서 원래는 미수에게 사람을 보내 청암정 기문을 써 줄 것을 부탁했다. 그러나 미수는 기문 대신 편액글씨 ‘청암수석’을 자신의 특별한 서체인 ‘미수전’으로 써서 주며, 편액을 만들어 정자 안에 가장 위치가 좋은 곳에 걸어줄 것을 요청했다. 미수는 그 글씨를 써 준 후 바로 병석에 눕게 되고, 사흘 후 별세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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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수 허목의 초상

이 청암수석 글시 원본은 아직도 전하고 있고, 청암정 뒤 충재박물관에 전시되고 있다. 한편 현재 정자에 걸려있는 ‘청암수석’ 편액은 근래 새로 만든 것이고, 원본은 박물관에 보관돼 있다.

미수는 전서로 ‘청암수석’ 네 글자를 쓴 뒤 그 옆에 작은 해서로 다음과 같이 써놓았다.

‘청암정은 춘양 권충정공의 산수에 있는 옛집이다. 골짜기 수석이 가장 아름다워 절경으로 칭송되고 있다. 내 나이 늙고 길이 멀어 한 번 그 수석간에 노닐지는 못하지만, 항상 그곳의 높은 벼랑 맑은 시내를 그리워하고 있다. 특별히 청암수석 네 글자를 큰 글씨로 써보내니 이 또한 선현을 사모하는 마음 때문이다. 그래서 이 사실을 기록해 둔다. 8년 초여름 상완에 태령노인 쓰다.(靑岩亭者 春陽權忠定公山水舊墻 洞壑水石最佳稱絶景 僕年老路遠 不得一遊其間 懷想常在高壁淸溪 特書靑岩水石四大字 亦慕賢之心也 識之 八年孟夏上浣台嶺老人書)’

8년은 숙종 8년으로 1862년이다.

2011년에는 미수의 13세 종손이 미수의 마지막 작품인 이 ‘청암수석’ 글씨를 보기 위해 청암정을 찾았다. 그는 글씨 앞에 서더니 한참 말없이 있다가 자리를 가져다 달라고 부탁했다. 자리를 가져오자 종손은 자리를 편 후 글씨를 향해 절을 하며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

그 종손은 그동안 미수의 절필(絶筆)인 이 작품이 경북 어디엔가 있다는 소문을 들었으나 구체적으로 어디에 있는지 몰랐다. 그러다가 2011년 가을 그의 친구가 청암정에 들렀다가 미수의 절필이라는 설명을 듣고는 종손에게 연락했고, 이야기를 들은 종손이 청암정으로 바로 달려와 확인한 것이다.

문화관광해설사로 활동하고 있는 충재의 후손 권율씨가 전하는 이야기다.

정자에는 ‘청암수석’과 함께 ‘청암정’ 편액이 걸려있다. 해서로 쓴 ‘청암정’은 매암(梅庵) 조식(曺湜·1526~72)이 썼다. 그동안 누구 글씨인지 정확히 모르다가 2008년에 도난 방지를 위해 청암정과 근처 석천정사(石泉精舍·충재 아들 청암 권동보가 충재의 뜻을 받들어 1535년에 건립)의 현판 30여개를 모두 철거해 유물관에 보관하는 과정에서, 편액 뒤를 보니 필자가 적혀 있었던 것이다.

매암은 필력이 뛰어나 당대에 이름이 높았던 인물로, 그로부터 편액 글씨를 받은 선비들이 적지 않았다.


◆ 거북바위 위에 지은 청암정

충재는 1518년 6월 임금에게 다음과 같이 아뢰었다. “임금이 그 자리를 공기(公器)로 여긴다면 그 용심(用心)은 두루 미쳐서 백성에게 은혜를 입힐 수 있지만, 만약 천하를 자신의 소유물로 여긴다면 사사로운 일만을 생각하고 또 욕심이 일어나게 되어 자신을 위하고 욕심을 채우는 일만 하게 됩니다.…말세의 임금들은 그 지위를 자신의 사물로 여긴 나머지 조금만 급박한 일이 있을 것 같으면 사람들을 모조리 죽여 없앴는데, 이는 모두 그 사심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강직한 문신으로 이름을 떨쳤던 그는 공(公)을 생각한다면 어떤 사안이라도 군주에게 말해야 하고, 옳다고 생각한 바를 꾸밈없이 말하는 것을 공이라고 생각했다. 이런 인물인 충재는 기묘사화(1519)로 파직당한 뒤 고향으로 돌아와 1526년 봄 독서당으로 3칸(두 칸은 온돌 방 한 칸은 마루)짜리 ‘충재’를 지었고, 같은 해에 그 서쪽 옆 거북처럼 생긴 바위 위에 정자를 완공했다. 정자를 처음 지었을 때는 온돌방을 넣고 이름도 ‘구암정사(龜巖精舍)’로 했다.

그런데 온돌방에 불을 넣자 바위가 소리 내며 울어 괴이하게 생각했다. 그러던 차에 한 스님이 들러 이야기를 듣고는 이 바위는 ‘거북’이라서 방에다 불을 지피는 것은 거북이 등에다 불을 놓는 것과 마찬가지여서 바위가 우는 소리를 낸다고 했다. 그래서 다시 아궁이를 막고 바위 주변을 파내어 못을 만들었더니 괜찮아졌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충재는 후일 다시 벼슬길로 들어섰으나 죽음은 결국 유배지에서 맞이했다.

정자 이름 구암정사는 후일 청암정으로 바뀌는데, 청암은 충재의 큰 아들 권동보(1517~91)의 호다. 청암정은 커다랗고 넙적한 거북바위 위에 올려 지은 丁자 형 건물이다. 주위를 감싸고 있는 연못의 돌다리를 지나 정자에 오르면 사방이 툭 터진 풍광이 다가와 시원한 선비의 기상을 불러오고 호연지기를 느끼게 한다. 연못 주위에는 소나무·향나무·느티나무·단풍·철쭉·국화가 어우러져 멋진 자연의 세계를 만끽할 수 있다.

글·사진=김봉규기자 bgkim@yeongn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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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수가 창안한 전서 ‘미수전’은

우의정까지 올랐던 문신이자 학자인 미수 허목은 남인의 핵심 인물로 활동하며 당시 정계와 사상계를 이끌었다. 원시유학을 특히 강조했던 미수는 글씨에도 뛰어났다. 그는 특히 독특한 전서를 개발, 서예사에 한 획을 그은 인물이기도 하다.

‘나는 어려서부터 고문을 좋아해 늙어죽을 때까지 내 손에 입수되는 대로 이를 기록해두었다가 고문운율(古文韻律) 4편을 만들었다.’

미수가 지은, 고문자를 운율의 순서에 따라 필사·편집한 전서체집(篆書體集)인 ‘고문운율’ 서문에 기록한 내용이다. 이처럼 평생 방대한 고전(古篆)과 선진고문(先秦古文)을 수집하고, 이를 다시 체계적으로 정리한 그는 부단한 연구·노력을 통해 스스로 독창적인 전서를 창안했다. 이렇게 해서 만든 미수의 전서인 ‘미수전’ 또는 ‘미전(眉篆)’의 세계는 고풍스러운데다 독특하고 기절(奇絶)한 고박미(古撲美)를 풍기는 것이 두드러진 특징이다.

그러나 당쟁이 극심하던 시대여서 미수의 글씨에 대한 평가는 양극단으로 대립됐다. 후세에도 마찬가지였다. 노론측 평가는 무자비했고 그의 작품이 때로는 파괴 또는 소각되는 수난을 당하기도 했다. 서인들은 미수의 전서를 필법적인 측면에서 근거의 불확실성을 들어 출발부터 그 가치를 부정했다.

이에 반해 미수의 적통인 근기남인들은 필법적인 요소보다 미전이 내포하는 상징적 의미에 더 중점을 두었다. 그들은 노론의 정권으로 인해 당대를 지배한 화이론을 극복하는 조선조 주체성의 상징적 의미로 간주했다.

미전의 아쉬운 점으로 그 연원을 정확히 알 수가 없다는 점이 지적되고 있다. 그 근거를 남기지 않았기 때문이다. 김봉규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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