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팔색조 풍류남’ 박용하씨가 자신의 서각 작업장 한 켠에 마련된 자작 남근목 중간에서 ‘박용하 인생 최고야’를 외치고 있다. |
팔색조 풍류남. 그의 변화무쌍한 변신 스토리를 다 듣고 나서 대뜸 그에게 주고 싶었던 별명이다. 스스로는 자기를 ‘반풍수 인생’이라고 부른다. 목인 박용하씨(57).
예사롭지 않은 뾰족구두, 그리고 돌아온 멋쟁이 스타일의 정장차림, 선글라스형 안경, 나훈아를 연상시키듯 적잖이 자란 턱수염, 형형하면서도 걸쭉한 음성…. 일제강점기 홍콩과 마카오를 석권하고 귀국한 전설의 주먹 같은 포스가 단번에 느껴진다. “솔직히 저는 사내 대장부로 태어나서 남자가 해 볼 수 있는 풍류의 끝까지 가 봤습니다. 알 수 없는 기운에 홀려 노래하고 괴목을 조각하고 서각도 했습니다.”
기대하시라, 팔색조 풍류남의 8박자 인생 스토리!
댄스 등 한량처럼 놀고여러 직업 전전하다가
어느날 갑자기 조각본능
식음전폐하다시피 칼질 장승 무려 200개 완성…
괴목 자꾸 접하다보니 이번엔 男根木에 필 꽂혀
길이160㎝ 등 350점 작업
토우 1천점·서각 300점에 야생화160종 동산도 조성
직접 작사한 다섯 곡 등 음반 출시하고 콘서트…
‘지하철2호선 가수’별명
장학금·재능기부공연 등 최근엔 ‘아름다운 중독’
◆ 춤에 미치다
예천군 상리면 도촌리 부농의 집안 맏이로 태어났다. 곧바로 ‘전설의 한량’으로 추락을 한다. 툭하면 패싸움질이었다. 공부는 일찌감치 내팽개친다. 부모는 그가 좀 큰 인물이 돼주기를 바랐지만 도무지 성적이 아니라서 일찌감치 포기한다. 하지만 음악만은 열정파. 안동 풍산종합고 밴드부에 들어가 드럼을 친다. 특기생으로 군악대 하사관으로 들어가서 호른을 잡는다. 제대 이후에는 음악을 접는다.
하, 그런데 난데없이 그가 조선일보 예천지국장을 맡는다. 어릴 때부터 글 적는 걸 좋아하고 시에도 관심이 있었던 게 조금 영향을 준 걸까. 어쨌든 그는 예천 지역의 미담 몇 자락을 조선일보에 실을 수 있었다.
그러면서 3명의 직원을 데리고 청과도매업을 시작한다. 온갖 과일을 팔았다. 추석 전후로는 집에도 가지 못할 정도로 바빴다. 그리고 8~9년 엄청나게 돈을 벌었다. 일확천금이 들어오자 슬금슬금 풍류의 기운이 스멀거리며 그를 무도장으로 내몬다. 그는 대한민국 최고의 춤쟁이를 꿈꾼다.
오전에 조금 일을 해놓고는 부리나케 댄스교습소로 간다. 사부를 만나 지루박(지터버그), 트로트, 블루스, 탱고 등 사교댄스의 여러 종목을 차례차례 독파해 나갔다. 점차 춤 교습소 사범이 될 정도로 춤을 잘 출 수 있었다. 빛이 강하면 그늘도 짙다고 했던가. 폭음(暴飮)과 폭무(暴舞) 그리고 빗나간 연분홍 사연이 그를 옥죄어 들어왔다. 툭하면 뭉칫돈을 날렸다.
예천에선 ‘기분파 인생’ ‘미스터 한턱’으로 음주가무의 나날이었다. 제대 후 그와 백년가약을 맺은 아내의 한숨도 갈수록 깊어져 갔다.
◆ 법원 집달관이 되다
대구로 온다. 대구지법 경매과 집달관실에서 유체동산을 담당한다. 그는 채권과 채무란 상이한 세계 사이에서 2년간 저승사자(집달관)로 살아간다. 겉으로 보는 인생과 현실은 엄청나게 달랐다. 울고웃는 인생사 밑바닥을 죄다 경험한다.
“지금도 잊지 못하는 장면이 있습니다. 카드대금 수십만원을 결제 못하는 집으로 빨간 딱지를 붙이러 들어갔는데 아이들이 영문도 모른 채 바라보고 있던 TV에 차압용 딱지를 붙여놓고 나올 때 제가 하는 일이 너무 싫어 며칠간 가슴이 쓰라렸던 적이 있어요.”
체질이 아니었다. 형님이 그를 콜한다. 서구 내당동에서 꾸려가던 지입화물차회사 <주>삼성운수의 경력직 상무이사가 된다. 여러 종류의 화물차를 관리했다. 화물차와 중기 등이 500여대가 있었다.
◆ 장승 조각에 홀리다
장승에 미친다. 형님 소유의 산이 의성군에 있었다. 거기에 주차장을 만들려고 벌목을 했는데 괜찮은 소나무가 많이 눈에 띄었다. 숨겨져 있던 조각 본능이 그를 급습한다. 느닷없이 나무를 조각할 수 있는 여러 종류의 조각칼 세트를 구입해 왔다. 나무를 보자 어디로 칼질을 해야 되는지 알 수 있었다. 자신도 모르게 망치질을 했다.
정교하지는 않지만 장승 비슷한 스타일이 나타났다. 일과 작업을 병행한다. 매주 토요일 새벽같이 산에 올라간다. 괴목을 주로 가져왔다. 큰 것은 전지를 해서 승합차 짐칸에 실었다. 그렇게 해서 만든 작품은 200여개.
남들이 하는 장승 스타일은 싫었다. 그래서 예천의 장승조각가인 김수호씨 등에게 자문해 본인만의 특징을 잡아나갔다. 예쁜 장승이 아니라 못생기고 괴물 같고 저승사자 같은 장승을 만들었다. 구도가 어려운 것은 1주일 걸리기도 한다. 오전 4시에 서구 평리동 작업장에 나온다. 식음을 전폐하고 밤 11시까지 몰입했다. 아내는 그런 그를 보고 혀를 찬다.
“저 웬수가 예천에선 춤 때문에 속을 썩이더니 이젠 장승에 미쳤구먼.”
예전엔 친구한테서 전화만 오면 후닥닥 밖으로 나갔는데 장승을 만나고부터는 두문불출이었다. 작업에 열중일 때는 가족이 와도 전화를 받지 않는다.
◆ 남근목(男根木) 조각에 매달리다
“기괴한 생김새의 괴목과 나뭇가지를 보면서 자연스럽게 남근을 깎고 싶다는 욕망이 솟구쳤어요.”
그는 예전부터 사내가 그걸 잘못 놀리면 패가망신한다는 속담에 유념했다. 그늘은 그늘로 극복하고 싶었다. 한때 난봉꾼으로 놀았는데 그 습속(習俗)을 지우고 싶었다.
“남근의 조형은 나무 형태에 따라 반은 자연, 반은 인공인데 그 둘을 잘 조화시켜야 합니다.”
이제까지 350여점을 깎았다. 그중 가장 큰 남근은 길이 160㎝에 한 아름 되는 굵기다. 아내는 그걸 보고 흉물스럽다고 외면했다. 지인들까지 그를 변태적으로 보기 시작한다. 하지만 그걸 더 좋아하는 흐름도 있었다. 몇몇 술집 여사장은 자신의 기를 억누르는 데는 남근목만 한 게 없다는 무당의 얘기를 듣고 남근 전시장을 찾기도 했다. 그는 그걸 만들면서 스스로 많은 변화를 체험한다.
“제가 살아오면서 너무 조숙해서 이런저런 실수를 했는데 이제부터 절대 그런 인생을 살아선 안되겠다고 결심합니다.”
아내도 지나가는 말로 “당신이 조금씩 변하는 것 같다”고 눈을 흘긴다. 하지만 치켜세우는 것이다.
◆ 야생화에 빠지다
괴목을 구하러 다니는 과정에 예쁜 야생화가 보였다. 이름없는 꽃을 보면 인터넷이나 식물도감 등을 찾아 이름을 알아낸다. 원예학에도 심취한다. 야생화를 하면서 국화 분재에 도전한다. 당시만 해도 국화를 돌에 붙이지 않는데 그는 국화를 돌에 붙이는 석부작과 목부작 국화에 도전한다. 개성있다는 평가를 얻는다. 자신을 얻어 두 차례나 개인전을 연다.
석창포와 할미꽃 등 160여종 야생화를 현재 작업장 언저리 절개지에 심어나갔다. 공터가 야생화 동산으로 점차 변하기 시작한다. 2000년 어름이었다. 당시 평리동 근처에선 아무 데도 그런 운치있는 공간이 없었다. 종일 행인들이 구경하러 들어왔다. 초등학생들까지 견학을 온다.
◆ 토우에 심취하다
장승을 하다보니 나무에만 너무 매몰됐다. 재료구입이 어려웠다. 흙으로 토우를 만들어보자고 생각한다.
도자기는 도예하는 지인한테 기본기를 배운다. 물레질하는 것도 배운다. 일주일에 한 번 거기로 간다. 감각이 있어 몇 개월 만에 기본기가 탄탄하게 갖춰진다. 하지만 그는 ‘판박이 도자기’가 싫었다. 특이한 표정의 토우에 도전했다. 정상적이지 않은 것에 매달린다. 병신 같고 못나고 찌그러지고 울고 웃고 발광하고 하는, 기쁨보다는 슬픔에 가 닿은 민초의 표정을 그리고 싶었다. 어쩌면 자기 인생에 대한 역경과 고뇌 번뇌가 바로 토우에 그대로 각인됐다.
“그냥 고만고만하게 살아가는 자는 절대 그런 기이한 표정을 만들지 못할 겁니다. 만들면서 제 가슴이 정화됐습니다.”
지난 시절의 애환이 주마등처럼 지나갔다. ‘치유의 작업’이었다. 만들다가 자꾸 울컥거리고 북받쳐오르는 심사를 자주 느꼈다.
“지인들은 저의 이런 속내를 거의 모릅니다. 그냥 천하의 풍류객, 돈 잘 쓰고 잘 노는 낭만파 정도로 아는데 실은 제가 좀 사색적이고 성찰적이고 미학적이고 자연적이고 여리고 감각적이죠.”
이렇게 만든 토우가 1천여점.
◆ 서각에 도취하다
![]() |
박용하씨가 연꽃 서각 작업에 몰두하고 있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한문 등 글씨 쓰기를 좋아해 자연스럽게 서각 전문가로 발돋움할 수 있었다. |
예전부터 쓰기를 좋아했다. 칠판 글씨, 차트 글씨 등을 잘 해 ‘필경사(筆耕士)’로 인정을 받았다. 그래서 서각에 도전하게 된다.
서예는 서각을 하면서 학원에 다녔다. 한자 공부를 하면서 고사성어 등을 공부하게 된다. 학창시절에는 꼴찌였는데 아이러니컬하게도 나이들어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한문사전을 가까이하게 됐다. 아내도 그런 남편이 신기한 듯 “옛날에 저래 공부했으면 뭐라도 안 됐겠나”라면서 격려도 한다.
![]() |
박용하씨가 올해 대한민국 각자대전에서 특선을 받은 ‘우보천리’ 서각. |
지금까지 300여점을 깎았다. 최근에 완성한 ‘우보천리(牛步千里)’는 형상미가 좋아 올해 대한민국 각자대전에 출품해서 특선을 받는다. 지난 6월에는 서예 사부인 매현 홍을식 원장이 아들 결혼기념으로 써 준 가훈을 서각해서 대구시 미술협회 서예대전에서 특선을 받았다. 입문한 지 6년이다.
그는 전통서각에서 벗어나 조각과 서각을 접목시키고 색까지 입히는 ‘조형각(造形刻)’에 매진 중이다.
◆ 가수가 되다
![]() |
박용하씨는 최근 1년여의 제작기간을 통해 ‘지하철2호선’ ‘예천아’ 등 자신이 직접 작사한 5곡 등이 수록된 음반을 발매하고 가수로도 활동하고 있다. |
고향 후배인 작곡가 배원호씨가 그의 중저음 허스키 보이스에 관심을 보인다.
그는 배호 스타일의 음색을 가졌다. 후배가 노래를 해보라고 권유했다. 후배 사무실에 자주 놀러가서 노래 지도도 받았다. 곡도 받았다. 1년간 스튜디오 작업을 거쳐 올해 음반이 나왔다. 이때 그의 문학적 능력이 발휘된다. 물류터미널, 지하철2호선, 못다 한 사랑, 사랑이여, 예천아 등 5곡의 노랫말을 작사한다. 그는 30년간 일기를 적을 정도의 문학청년이었다. 나름 글 감각이 있다.
아내에 대한 고마움과 미안함을 담은 ‘못다 한 사랑’은 아내에게 바친 노래였다. 그래서 짠하다. 음반을 직접 아내에게 틀어주었다. 울먹였다. “조금 빚을 갚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아내는 역시 아내였다. “지금 당신 여섯번째 미치고 있다”며 또 바가지를 긁어댔다. 그는 자기 인생의 마지막 소원이니 제발 허락해달라고 간청했다.
지하철2호선은 2호선 연장 개통을 축하하기 위해 지은 가사였다. 대구시 야외음악당 및 지하철 관련 행사 등에서 불렀다. 대구시 도시철도본부에서 그에게 감사패를 수여하고 민간인 홍보대사로 위촉한다. 요즘 2호선 역사에서 수시로 그의 노래를 들려준다. 덕분에 요즘 ‘지하철 2호선 가수’로 불린다.
물류터미널은 국내 화물차운전자를 위해 만든 노랫말이다. 음반 500장을 달서구 장기동 화물공제조합 측에 기증했다. 지역 화물차 기사들에게는 꽤 인기가 있는 노래다. 예천아는 고향을 생각하며 만든 노래다.
◆ 갤러리가 있는 콘서트
지난해 1월 팔색조 인생을 나름 중간정리하기 위해 살고 있는 집 건물 지하에 갤러리 스타일의 공연장을 오픈했다. 매월 마지막주 금요일 오후 7시부터 지역 가수들과 공연을 펼치고 작품도 보여준다.
◆ 봉사에 젖어들다
2010·2012년 그의 작업장이 있는 야생화 동산에서 평리동민을 위한 여름밤 음악회를 두 번 마련했다. 그의 건물에 세든 업자들과 광명상가연합회를 결성한 뒤 서평초등학교에 장학금을 8년째 주고 있다. 대구시 연예인협회 가수분과 부위원장으로 재능기부 공연도 하고 있다. 올해에는 평리6동 결손아동 100명에게 예천 곤충 엑스포를 구경시켰다. 010-2509-4656
글·사진=이춘호기자 leekh@yeongnam.com
영남일보(www.yeongnam.com),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