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상감영1601∼ .3] 관원의 덕을 기념하는 선정비 스토리

  • 이지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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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3-11-29   |  발행일 2013-11-29 제11면   |  수정 2013-11-29
“영세불망” 백성을 감동시킨 ‘民本의 리더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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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경상감영공원에는 경상도 관찰사, 대구도호부사, 대구판관 등의 선정을 기리기 위해 세운 29기의 선정비가 있다. 선정비는 백성을 위해 선정을 베푼 관원의 덕을 기리기 위해 세운 비석이다. 대구향교를 비롯해 각지에 흩어져 있던 것을 선정의 현장인 경상감영공원에 옮겨 놓았다.


선정비는 선정을 베푼 관원의 덕을 기리기 위하여 세운 비석이다. 대구에도 경상도 관찰사, 대구도호부사, 대구판관 등의 선정을 기리기 위해 백성들이 세운 비가 즐비하다. 경상감영공원을 조성하면서 대구향교를 비롯해 각지에 흩어져 있던 선정비를 한 곳에 모아 놓은 것만도 현재 29기나 된다. 옛 경상도 지역 곳곳에 산재한 선정비들을 포함하면 이보다 훨씬 많을 것으로 보인다.

“이 문 앞에 서 있는 건/ 개꼬리 목비(木碑)요/ 동구 밖에 서 있는 건/ 수렁밭 목비라”

‘비석 타령’의 한 구절처럼, 감사나 원이 부임하면 개가 주인 보고 꼬리를 흔들 듯 아부하고자 세우는 게 ‘개꼬리 목비’이고 감사가 오면 급조한 송덕비를 수렁 속에 넣어서 오래된 것처럼 위장한 것을 ‘수렁밭 목비’라 하는데, 이렇게 비아냥거리가 된 송덕비처럼 각 지역에 즐비한 많은 송덕비들이 실질보다는 허세에 치우쳤다는 말이 꾸준히 있어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구 감영 관찰사들의 선정비는 백성을 위한 목민관의 태도를 엄정하게 고수한 이들이 꽤 많았음을 보여주는 증거다. 진정으로 백성과 고을을 위해 헌신하고 열정적으로 도정을 닦아온 이들을 기리는 비석인 셈이다. 대구읍성의 축성을 위해 열성을 다한 민응수가 대표적인 인물이다. 고종 때의 이근필, 조한국, 영조연간의 이기진 등도 두드러진 업적으로 당대의 칭송을 받았다. 선정비에 이름을 올린 대표적인 경상감영의 관찰사를 소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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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찰사 민응수의 선정비는 현재 경상감영공원에 2기가 세워져있다. 대구읍성을 축조하면서 백성에게 선정을 베푼 민응수의 덕을 기리기 위해 세운 영세불망비와 승려들이 감사의 뜻으로 세운 무휼승도비(사진)가 그것이다.

대구읍성 쌓고 선정 베푼 민응수
(재임기간 1735년 3월∼37년 4월)

민응수 경상감사(관찰사)가 대구읍성의 축성을 조정에 청한 것은 영조 12년(1736) 1월이었다. 원래 대구읍성은 선조 23년(1590)에 조성한 지금의 대구시 북구 고성동 일대의 토성이 고작이었다. 임진왜란으로 이 토성이 무너지자 대구 방어의 허술함을 늘 걱정해야 했다. 안동에 있던 경상감영이 대구로 이전하면서 읍성 축성이 논의됐으나, 산성의 축조가 시급하다는 이유로 번번이 무산이 되다시피 했다.

1735년 3월 민응수가 대구 관찰사로 부임함으로써 다시 한 번 대구성의 축성에 대한 강력한 열망이 중앙 정부에 전달된 것이다. 조정에서는 이 문제에 대한 논의를 벌였다. 병자호란 때 청나라와 맺은 정축약조(丁丑約條, 병자호란 후 성의 수축을 일절 않겠다고 청나라에 서약함)가 걸림돌이었다. 성을 쌓는 국방상의 주요 사업에 청나라는 특히 신경을 써야 했기 때문에 그 눈치를 살펴야 했다.

그러나 무엇보다 두 번의 왜란을 거치면서 성의 필요성이 절감되고 있는 상태였다. 특히 산성 대신 평지에 성을 쌓는 것은 처음이라 주저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전쟁 때 평지의 건물은 불태우거나 버려둔 채 산성으로 들어가 대응하는 전술방식에 대한 효과가 의문시됐다. 더욱이 백성들은 남겨둔 채 지배층만 산속으로 피신하는 것이 옳지 않다는 반성의 여론이 일고 있는 상황에서 성의 축조론이 우세를 점하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반드시 거주민을 위한 성으로서 여러 고을을 합해서 큰 읍으로 만들어 방어거점을 삼는다’는 실학자 유형원의 이론을 내세워, 민응수가 주장한 대구성의 축성안에 손을 들어주었다.

대구성의 축성 비용은 중앙의 힘을 빌리지 않고 자체 조달한다고 밝힌 민 감사의 계획도 큰 참조가 된 듯했다. 즉 “아끼고 저축해서 이자를 놓아 불린 것”이라며 지방 자체의 힘으로 공사를 강행한다는 점을 내세웠다.

“반계선생(유형원)의 뜻이 실익차원에서 관철된 게야. 거기에다 임금(영조)의 개혁정책이 이런 일을 할 수 있는 계기를 만들어준 것이라 할 수 있지. 그렇지 않은가.”

민응수는 대구성의 축성이 확정되자 주위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하곤 했다.

조정의 허가가 떨어지기 전부터 준비가 이루어졌고, 어느 정도 가능성이 있다는 전망이 나오자 바로 축성에 들어갔다.

공사는 백성들의 사정을 감안해 농한기 를 이용해서 집중적으로 벌였다. 1736년 1월8일 돌을 채취하기 시작했다. 채석해온 돌로 기초부터 쌓았다. 기초가 놓이자, 공사가 속도감 있게 진행됐다. 그리하여 체성(體城)은 4월25일, 여첩(女牒, 성 위에 낮게 쌓은 담. 몸을 숨기고 적을 치는 곳)은 6월6일에 완공했다. 불과 다섯 달 남짓 만에 성을 완성한 것이다. 매우 계획적이고 합리적으로 축성공사를 준비하고, 효율적으로 인력이 투입됐기에 가능했던 일이었다.

“패장의 관리에 특히 신경을 쓰고, 문제가 생기면 그 책임을 물어라.”

민응수는 자주 현장을 돌며 채근했다. 일정한 인원으로 1패를 구성하여 그 우두머리로 패장을 삼았다. 전부 100여개의 패가 맡은 일을 솔선했다. 노임도 다른 일보다 더 많이 주었다. 군사들도 대거 참여했는데 농사철이 되면 잠시 집으로 돌려보냈다가, 일이 끝나면 다시 돌아와 투입시키곤 했다. 그 대체인력은 대구 주변 사찰의 승려들이 맡았는데 품삯이 후해서 모두 만족했다.

완성된 대구읍성은 둘레가 약 2천650m에 달했고 높이는 5.1~5.5m, 여첩은 819개나 됐다. 또 4개의 큰 문과 2개의 암문(야간 통행용)이 있었다. 동문인 ‘진동문’, 서문인 ‘달서문’, 남문인 ‘영남제일관’, 북문인 ‘공북문’이었다. 동문(진동문)은 동아백화점 서쪽의 동성로 옛 제일은행 대구지점 네거리에 있었고 서문(달서문)은 아미고호텔 뒤쪽에 있는 옛 신한은행 서성로지점에 있었다. 남문(영남제일관)은 현재 약전골목 정관장 앞 네거리에 있었다. 북문(공북문)은 현재의 북성로 경북소방설비 네거리에 있었다. 이 중 중심되는 문은 남문이었고, 영남제일관이라는 편액을 걸었다. 사대문 중 규모가 가장 컸다. 신임관찰사의 도임행렬은 서문보다는 성곽을 돌아 남문인 영남제일관으로 입성하곤 했다.

두 개의 암문(暗門)은 동소문(또는 東也門)과 서소문(또는 西也門)이라 했다. 옛 제일서적 인근(현재 유니클로 매장 자리)에 동소문이, 서북쪽 서문교회 입구 골목 어귀에 서소문이 있었다.

5개월간 축성공사에 동원된 7만8천584명의 연인원은 대구 부근의 잡색군(雜色軍)을 비롯해 대구, 칠곡의 연군(烟軍, 봉수대를 관리하던 군인), 함경도 육진(六鎭)의 속오군(束伍軍, 산성의 아병<牙兵>), 경상도 내의 승군(僧軍) 등이었다.

축성이 끝나자 성안을 정비하는 기간이 꽤 걸렸다. 그리하여 그해(1736년) 11월 민 관찰사는 선화당에서 성대한 낙성연(落成宴)을 베풀었다. 수고한 군졸들에겐 쌀과 포(布)를 나눠주며 위로했다. 수성(守城)을 위한 수성창(修城倉)을 건립하고 양곡, 전포(錢布) 등을 비치하여 불의의 사고에 대비했다는 기록도 보인다. 민 관찰사는 축성이 끝난 이듬해인 1737년 4월, 만 2년의 임기를 마치고 대구를 떠났다. 그는 나중에 우의정까지 벼슬이 올랐다.

민 관찰사가 대구를 떠난 3년 후인 1740년 10월, 대구읍성을 쌓으면서 백성에게 선정을 베푼 그의 뜻을 기리기 위해 선정비가 세워졌다. 현재 경상감영공원에 있는 ‘관찰사 민상국응수 영세불망비(觀察使 閔相國應洙 永世不忘碑)’가 그것이다. 영세불망비 외에 민응수의 선정비는 공원에 하나 더 있다. ‘관찰사 민상국휘응수 무휼승도비(觀察使 閔相國諱應洙 撫恤僧徒碑)’로 승려들이 세운 비석이다. 숭유억불 정책을 펼쳤던 조선시대에는 승려가 온갖 시련을 겪어야 했다. 조선 중기 이후엔 승려에 대한 모든 특혜가 없어질 정도였고, 이 때문에 고통이 이루 헤아릴 수 없었다. 이를 딱히 여긴 민응수는 관찰사 재임 중에 승려에 대한 일체의 부역을 면제해 주었다. 이에 감동한 승려들이 정성을 모아 1737년 4월 무휼승도비를 세웠다.

한편 대구읍성은 축성한 지 134년 만인 1870년에 다시 크게 중수한다. 대원군 집권 초기에 서구 열강의 침탈에 대비하기 위해서였다. 당시 대구읍성의 상태는 숱한 세월 때문에 허물어지기 직전이었고, 관찰사 김세호(金世鎬)의 주관으로 공사가 진행됐다. 대구읍성 수성비(大邱邑城修城碑)에는 당시의 상황을 간략하게 기록하고 있다. 비석은 현재 망우공원 내 영남제일관문 옆에 옮겨져 있다. 굴곡진 운명을 타고난 대구읍성은 결국 1907년 대구 군수 겸 관찰사 서리였던 친일파 박중양에 의해 철거됐다. 읍성을 허문 박중양은 1909년 이른바 십자도로인 4성로를 개통한다. 지금의 동성로와 서성로 남성로 북성로가 그것이다. 이 도로가 개통될 무렵 한일합방이 되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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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임기간 백성을 위해 정책을 편 관찰사 이기진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세운 선정비(영세불망비)가 현재 경상감영공원에 있다.

길재의 시호 건의한 이기진
(재임기간 1738년 9월∼39년 7월)


이기진(1687~1755)은 영조 14년(1738) 9월에 경상감사가 되어 1년 가까이 관찰사로 일했다. 특히 감사로 내려온 9월에 야은 길재를 위한 건의를 한 것이 눈에 띈다. 그가 올린 글에는 “절의를 숭상하고 장려함은 국가에서 중시하는 바입니다. 고려의 절사 길재가 금오산 밑에서 살았는데, 태종조에 밭을 내리고 대나무를 심어 포장()하고 찬미했었으니, 지금 치제(致祭)하고 시호를 내린다면 저의 온 도를 용동(聳動)시킬 수 있을 것”이란 구절이 보인다. 본관은 덕수(德水), 호는 목곡(牧谷), 시호는 문헌(文憲)이다. 이기진 역시 경상감영 관찰사 재임 중 백성에 선정을 베풀어 선정비가 세워졌다.


대대적 구휼사업 벌인 김명진
(재임기간 1888년 8월∼90년 6월)


김명진(1840년∼?)은 주로 외직에 많이 있었는데, 1888년(고종 7) 경상도 관찰사로 부임했다. 큰 흉년을 당해 굶어 죽는 백성이 속출하자 조정에 구호를 요청하고, 조정에서 내려온 많은 돈과 구호양곡을 백성에게 골고루 나눠주어 구휼사업에 힘썼다. 그래도 굶는 자가 늘자 영문(營門)의 공금 1만냥을 백성에게 나눠주는 한편 이농자에게 농토를 주어 정착하게 했다.

특히 경기·경상도관찰사로 재직 중에 올린 장계(狀啓)의 내용에는 당시 수취체제(세금징수제도)의 혼란상이 상세히 적혀 있어서 고종연간의 사회상 연구에 도움을 주고 있다. 1890년에는 이조참판을 지냈다.


지방세비 폐단 개선한 조한국
(재임기간 1898년 8월∼12월)

조한국(1865∼?)은 조선 고종 광무 2년(1898) 8월부터 12월까지 짧은 기간 경상도 관찰사로 있었다. 그는 당시 대구에 민폐가 되어온 ‘집사청 교구전’과 ‘부료고 둔전’을 백성의 편에서 해결해 그 공덕을 기리어 선정비가 세워졌다. ‘집사청 교구전’과 ‘부료고 둔전’은 일종의 지방세 중 하나였다. 표면상으로는 농민이 입은 피해를 구제해준다는 명목이었지만, 실은 고리대나 다름없었다. 조한국은 이러한 고리대의 폐단을 없애고자 당시 대구지방의 두 세금을 원금만 받기로 하고 이자를 감면해줬다. 민본사상을 실천한 목민관의 정서가 돋보이는 치적이라 할 수 있다.

글=이하석 <시인·영남일보 부설 한국스토리텔링연구원 고문>

사진=이지용기자 sajahu@yeongn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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