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이춘호기자 leekh@yeongnam.com |
![]() |
◆시인 구석본 칠곡 출생. 영남대 국어국문과 졸업. 1975년 ‘시문학’지로 등단. 대한민국 문학상, 대구시문화상(문학부문), 대구문학상 등 수상. 전 대구문인협회장. 시집 ‘지상의 그리운 섬’ 등 다수. |
40년 전 20대 초반 대학 4학년 2학기 때 졸업을 하지 않은 상태에서 시골 중학교에 선생으로 갔지.
한 학년 3학급, 전 학년 9학급 남녀 공학이었지. 그때 평생 동안 잊히지 않는 경험을 했지. 장학지도 받았을 때였지. 당시 장학사의 권위는 대단했어. 장학지도가 끝나고 평가회가 열렸지. 말이 평가회지 장학사의 일방적 훈시에서 끝나는 거야. 그 때 한 선배 교사의 넥타이 매지 않은 것을 장학사가 지적했지. 그 교사가 잘못을 사과할 것이라는 예상을 뒤엎고 일어서더니만 당당한 목소리로 반박했지.
그 선배 교사는 넥타이를 안 맨 까닭을 대략 이 정도로 말하더구만. ‘교사는 학생들이 넘어지면 지체없이 일으켜 세워 그 상처를 보살펴야 하고 교사에게 반갑다고 인사하는 학생은 보듬어 주어야 한다. 때로는 운동장에서 아이들과 같이 뛰어야 하고 씨름도 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런데 넥타이를 매고 학생들에게 그렇게 할 수 있겠느냐. 그러기에 나는 꼭 필요할 때를 제외하고는 넥타이를 매지 않는다’고 말이야.
그 선배 교사의 이름은 잊었지만 기억나는 것은 수학 담당이었다는 것과 운동을 좋아하며 아이들과 운동장에서 잘 어울렸던 것으로 기억해. 지금처럼 잔디 아니면 인조잔디 운동장이 아니고 맨땅이지. 아이들이 넘어지면 다치기 일쑤였어. 요즘 같으면 여학생이 넘어지면 남자 선생이 쫓아가 안아 일으킬 수 있겠어? 자칫 성추행으로 몰리기 십상인데.
말한 김에 나의 교단생활에 대한 추억 몇 가지. 그 곳에서 1년 남짓 더 보내다가 경주 문화고교로 자리를 옮겼다. 내 나이 스물네 살이었어. 당시 학생들과 나이 차이가 네댓 살 정도밖에 나지 않은 경우도 더러 있었어. 왜냐하면 당시엔 재수해서 고등학교에 입학하는 경우가 많았거든. 나는 학생들과 스스럼 없이 어울렸어. 이른바 문제아들은 일부러 하숙집으로 불러 만두도 같이 먹고 밥도 같이 먹었지. 젊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때 그 선배 교사의 영향이 컸던 거야.
10여 년 전 그 학생들이 졸업 30년 은사의 밤에 나를 초대했어. 물론 당시 근무했던 많은 선생님들과 같이. 아내와 함께 참석했어. 공식적인 행사가 끝나고 선생들과 자리를 일어서려는데 갑자기 몇몇 졸업생들이 몰려와 유독 나를 자리에 눌러 앉히고는 뒤풀이까지 같이 하자고 했지. 그들의 강요에 가까운 제의를 뿌리치지 못하고 주저앉았는데 그들은 나를 업고 무대 위를 한 바퀴 돌기도 하고 나중에는 노래방까지 갔지. 그 모습을 지켜 본 아내는 “당신을 업은 제자들이 당신보다 더 늙어 보이는 게 뭣보다도 기분 좋았다”라며 흐뭇해했지. 아마 내가 학생들과 스스럼없이 지냈기 때문에 그런 대접을 받은 것 같아.
경주를 떠나 제일모직 부설고등학교로 자리를 옮겼어. 제일모직 근무하는 여성 근로자들을 위한 학교였어. 제일모직은 섬유업체로 우리나라 최고의 기업이 아닌가. 근로자들의 근무 환경도 당연히 최고였지. 그렇지만 현장에서 노동을 마치고 학교에서 공부한다는 것은 말처럼 쉽지 않아. 게다가 늦깎이 학생들이 아닌가. 교복만 입혀 놓아 학생이지 밖에 나가면 어엿한 숙녀들이야.
결석생이 많았어. 하루에 학급당 다섯 명 정도의 결석이 있는 것은 보통이었어. 그런데 내가 담임을 맡은 학급에서 한 달 동안 100% 출석을 한 번 기록했어. 그러자 다른 교사들이 ‘구 선생은 아이들을 때리지도 않고 벌세우는 것도 못 봤는데 우째 결석이 없노’라고 했지. 그래서 ‘여학생들 때릴 데가 어딨노. 손잡고 얘기하면 되는 게지’라고 했지. 그랬다. 결석하는 학생들의 손을 맞잡고 얘기를 들어주기도 하면서 출석을 독려했어. 이것도 앞에서 말한 그 선배의 영향이었던 것 같아.
나도 사실 남학교에서는 학생들을 때리기도 했지. 아주 심하게 때린 적도 많아. 그러나 이 학교에선 때리는 대신 손을 잡아 주고 어깨를 보듬어 주고 했지. 요새 같으면 큰일 날 일이지. 성추행 아닌가. 나는 벌써 성추행 교사로 교단을 쫓겨났어야지. 당시에는 손바닥, 종아리 때리는 것은 제일 약한 벌이지. 엎드려뻗쳐 시켜놓고 엉덩이를 예사로 쳤다. ‘빳다 친다’고 했지. 요즘 눈으로 보면 폭력이야. 그땐 그걸 폭력이라 생각 안 했어. ‘교육’이라 했지.
교육은 뭔가. 소통이 아닌가. 온몸으로 교사와 학생 사이에 교감하고 소통했던 것이지. 우리도 학생 시절 선생에게 얼마나 많이 맞았나. 엉덩이가 시퍼렇게 멍이 들어도 집에 가면 말을 못했지. 간혹 부모에게 말을 하다간 오히려 ‘무슨 짓을 했기에 그렇게 맞았냐’면서 되레 호통만 들었지. 글자 그대로 ‘군사부일체’였던 시절이었어. 그리고 졸업 후 동창회 같은 데 가면 학창시절 추억담에 어김없이 많이 때리던 선생을 화제에 올리고 그 선생을 그리워했지 않았나. 벌을 많이 주는 선생을 열정 있고 사랑 많은 선생으로 기억하지. 그런 교육이 있었기에 대한민국의 오늘이 있다고 하면 지나친 자의적 해석일까.
◆몽둥이에는 존경과 사랑과 열정이
실제 아이들에 대한 관심이 없으면 지적하고 때리고 잔소리하지 않지. 가르치는 일이 참 힘드는 일이야. 지금은 많이 개선되었지만 30~40년 전만 해도 수업시수가 일주일에 서른 시간이 넘었어. 하루에 수업만 여섯 시간씩 하는 셈이지. 여섯 시간 강의하는 건 예삿일이 아니지. 여섯 시간 서서 연설한다고 생각하면 그 피로가 짐작될 거야. 게다가 벌까지 주는 일을 더 해 봐. 벌 주고 훈계하는 일은 어떻게 보면 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인 과외 일이야. 그러니 열정과 사랑이 없으면 벌을 안 주는 게지. 적당히 넘어가는 게야. 그때 아이들은 선생의 몽둥이, 맞아 몽둥이라고 했어. ‘교편’이니 그런 고상한 이름으로 말하지 않았어. 나중에 ‘사랑의 매’라고 불렸지. 사랑의 매, 얼마나 그럴 듯한 말이야. 그 말이 나올 때 이미 교사의 벌은 ‘폭력’이라는 인식이 전제된 거야. 몽둥이라는 야만적 단어로 불린 선생의 ‘매’에서는 존경과 애정과 열정이 있었고 사랑의 매라고 불린 매에는 갈등과 폭력과 기교가 있는 것 같아.
도대체 교사가 제자의 손을 못 잡고 따끔하게 벌을 주지 못하는 교육, 그게 정상이라 생각하는가. 벌을 폭력으로, 어깨를 보듬으면 성추행으로 보는 세상. 이게 교육 현장 불통의 시대. 칭찬만 요구하는 학부모. 누군가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라고 했던가. 고래를 춤추게 하면 어떻게 되는 거야. 죽는 거야. 제대로 살아갈 수 없어. 교육은 고래는 고래답게, 가르쳐야지 나비처럼 춤추게 해서는 안 되는 거야. 칭찬만 듣고 학창시절을 보낸 아이들이 사회에 나오면 어떻게 될 거야. 교사와 부모와 학생 사이에 거대한 장벽이 있어. 오늘 같은 불통의 시대가 여기서 잉태되었던 거야.
◆감동하지 않는 시대는 쌍말을 낳고
지금 정치권은 가관이야.
입으로는 민생, 민생하지만 당리당략에 골몰하고 있고. 민주라고 하면서 이념 논쟁에 빠져 있지. 상대방의 불통을 비판하지만 비판하는 쪽이나 듣는 쪽이나 소통을 위해 노력하는 모습이 보이지 않아. 그들이 말하는 소통은 자기편끼리의 소통을 말하는 것 같아. 입으로 국민을 말하지만 그들에게 국민은 없어. 선거 때가 되면 사람이 사람으로 보이지 않고 표로만 보이지. 대한민국 국민은 모두가 정치꾼보다야 똑똑하지. 그런 만큼 가치관이 분명하다고. 그런 국민 앞에 자기들 주장만이 선이고 정의라고 말하지. 오만불손하기 그지없어. 아마 벌 받을 때가 있을 거야. 우리도 지역 정서에서 벗어나야 해. 사람을 보고 표를 줘야지. 지역 정서에 갇혀 있어. 그러니 정치인이 정신을 안 차리는 거지.
문제는 불통이 심화될 것 같은 조짐이야. 불통은 분열을 낳고 대립과 갈등은 역사에 큰 상처를 입히는 게지. 그런데 얼마나 말 많은 사회인가. 말하고 싶어도 참을 줄 알아야 하고 말할 때를 기다릴 줄도 알아야 하는데 너도 나도 한 마디씩 하고 있어. 말한다고 듣는 사람도 없어. 듣고 싶은 것만 들으니 말이야. 말은 왜 하느냐. 소통이야. 소통하기 위해서는 상대를 설득해야 하고 설득의 최고 경지는 감동을 주는데 있어. 이런 말하기의 기본을 벗어나고 있지. 하고 싶은 말을 뱉어버리지. 그것도 무지막지한 막말로 말이야. 상대의 반응은 살피지 않지. 왜 그럴까. 상대를 얕보는 거야. 나의 말에 따르지 않은 상대는 무지한 부류로 치부하는 거지. 이게 바로 언어폭력이지. 그런데 우리 사회는 언어폭력에 대해선 관대하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야. 약으로 치유할 수 없는 상처를 주는 게 언어폭력인데도. 손을 맞잡고 나누는 대화의 모습은 기대하지 않더라도 해서는 안 될 말을 마구 쏟으면서 이 시대의 영웅 흉내 내는 것은 참으로 웃기는 일인 것 같아. 또 그걸 대대적으로 보도하는 언론은 왜 그러는지 모르겠어. 자꾸 부추기는 것 같아.
◆시인은 보이지 않는데 넘치는 시, 넘치는 문예지
이제 문학판 이야기 좀 할까.
한 마디로 문예지가 넘쳐나고 있어. 문예지가 많은 것은 좋은 일이지만 그 많은 문예지 중 엉뚱한 일을 벌이는 문예지가 문제지. 이른바 ‘등단 장사’하는 문예지 말이야. 문인은 자존심을 먹고 사는 사람들이야. 그들의 자존심을 밟는 일이지. 문예지 발행인, 주간들은 사명감 같은 것이 있어야 돼. 내 이 말이 건방지게 들릴지 몰라도 내 자신 문예지를 10년 넘게 했기 때문에 말할 수 있다고 생각해. 문예지를 할 때 원고료를 철저하게 지불했지. 문인에게 문예지 주간이라고 대접을 받거나 거들먹거리지 않으려고 노력했어. 오히려 술 사고 문단에 출입하는 것도 절제했지. 문예지 발행인이나 주간은 작가를 존중할 줄 알아야 해. 작가가 있어야 작품이 있고 작품이 있어야 문예지가 있으니까. 나는 그렇게 했다고 자부해. 그랬기 때문에 대구에서 문예지를 발간했지만 전국적으로 통하는 문예지가 되었다고 생각해.
공개적으로 등단장사하는 문예지 발행인도 할 말은 있을 거야. 문예지 발간에 들어가는 경비가 얼만데 라고 말이야. 그건 자기 합리화야. 문예지 발간을 위해 문인을 도구화하면 안 돼. 문예지가 도구가 되어야지. 그런 문예지에 알려진 문인이 심사하는 것도 이해 안 돼. 뭔지 모르겠어. 알량한 문학권력을 잡기 위해 문예지 발간하고 아무 문예지에나 심사하고 한다면 문단이 점점 혼탁해질 수밖에 없지. 오늘날 문예지가 넘쳐나고 문인도 넘쳐나는 시대야. 어떤 이는 시는 넘치지만 시인은 보이지 않는다고 하지. 그래 오늘의 삭막한 문단 시대를 위대한 문인, 위대한 작품을 낳기 위한 일시적 혼란기라 생각하면 마음은 편해. 언제 기회 오면 지역의 로맨티스트 문인들 이야기를 했으면 해.
영남일보(www.yeongnam.com),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