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계바늘’로 차세대 트로트 황제 예약한 신유

  • 이춘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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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4-03-28   |  발행일 2014-03-28 제37면   |  수정 2014-03-28
아줌마들이 아주 그냥 쓰러진다…‘나훈아’ 왔다 왔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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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는 공주’와 ‘시계바늘’ 등으로 데뷔 6년만에 1만여명의 팬클럽 회원을 가진 차세대 트로트 기대주로 급부상한 가수 신유. 그는 요즘 각종 축제 및 행사 초청가수 1순위로 인기 절정을 보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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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2일 화원유원지 특설무대에서 열린 전국노래자랑 달성군편에 출연한 신유가 녹화 직후 전국에서 몰려온 100여명의 팬클럽 회원과 포토타임을 갖고 있다.

한국 트로트.

전통가요(옛가요)와 성인트로트로 나눌 수 있다. 이애리수에서 남인수, 고복수를 거쳐 이미자에 이르는 스펙트럼은 전통가요의 범주에 드는 반면 그 이후 태진아 송대관 현철 설운도를 비롯해 장윤정 박상철 박현빈 등까지는 후자에 속한다. 흥미로운 사실은 한국 트로트는 한결같이 멜로디 라인이 거의 흡사하다는 점이다. ‘대중적’이란 이름으로 히트곡 스타일로 ‘벽돌’(노래)을 마구 찍어낸 탓이기도 하다. 특히 요즘 성인트로트는 오직 ‘대박’에만 혈안이 된 듯 몇몇 곡을 빼곤 가사·멜로디·리듬·템포가 거의 닮은꼴이다. ‘쿵짝쿵짝~’ 아니면 ‘아싸~’ 톤이다.

전통가요 시절에는 좋은 가수가 좋은 작사·작곡가를 좌지우지했다. 그만큼 노래에 개성이 진했다. 그런데 요즘은 가수의 시대가 아닌 것 같다. 가창력은 모두 고만고만, 성공 여부는 누가 방송에 많이 노출되는가이다. 다들 노래 한 곡으로 팔자를 고쳐보겠다는 눈치다.

하지만 장윤정의 ‘어머나’, 신유의 ‘잠자는 공주’와 ‘시계바늘’은 사정이 좀 달랐다. 둘은 ‘신트로트’의 역사를 써나갔다. 통속적 트로트를 ‘예술적 트로트’로 격상시키려고 안간힘을 썼다. 특히 올해 갓 서른을 넘긴 트로트계의 아이돌로 불리는 신유(본명 신동룡)의 인기는 데뷔 6년을 맞는 이 시점 가히 ‘쓰나미급’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국내 가요계 산증인 중 한 명인 남강일씨는 최근 펴낸 ‘불후의 광대 나훈아’(북마크)란 신간을 통해 신유를 나훈아의 뒤를 이을 ‘차세대 트로트 황제’로 지목했다.

지난 22일 오후 1시 달성군 화원유원지 특설무대에서 열린 전국노래자랑 달성군편 초대가수로 나온 신유와 인터뷰를 할 수 있었다. 팬들 때문에 개방된 장소에서는 인터뷰 자체가 불가능했다. 할 수 없이 검정색 밴차량 안에서 즉석 인터뷰를 했다. 그런데 이날 기자는 무척 흥미로운 광경을 목격하게 됐다. 녹화 직후 신유는 대선배인 태진아와 좀 떨어진 거리에서 각자 차량으로 이동했다. 그런데 한국 트로트계의 황제로 불리는 태진아의 뒤를 따르는 팬은 거의 없었다. 신유의 뒤를 따르는 팬은 줄잡아 300명이 넘었다. 일부 극성 중년 여성 팬들은 그의 차량 곁으로 다가와 손이라도 잡게 해달라고 아우성이었다. 더욱 놀라운 사실은 신유 팬클럽 회원 100여명이 3시간 넘게 그의 히트곡을 합창하며 그와의 기념촬영 타임을 고대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기자는 순간 한국 트로트의 새로운 신지평이 신유에 의해 개막되고 있다는 직감이 들었다.

<> 신유

서울에서 태어나 축구선수로 활동을 하다가 모 기획사 가수로 활동했지만 이렇다 할만한 빛을 보지 못한다.

2008년 첫 음반에 수록된 ‘잠자는 공주’와 ‘시계바늘’로 한국 트로트계의 다크호스로 급부상한다. 당초 잠자는 공주에 기대를 걸었지만 3년간 이 곡으로 돈 한푼 벌지 못했다. 하지만 느닷없이 시계바늘이 고속도로 휴게소 가판대에서 2011년 최고의 히트곡으로 떠오르면서 신유의 시대가 개막된다.

이어 2011년 2집 ‘꽃물’, 2013년 ‘나쁜남자’, 올해 제4집 ‘일소일소 일노일노’가 연이어 히트를 치며 나훈아를 이을 차세대 트로트 기대주로 질주 중이다. 지금은 전국 축제장 초대 1순위 가수이고, 많을 경우 하루 5군데 무대에 선다.

데뷔 3년 차부터 개인 콘서트를 했고 지금은 연 20회의 콘서트를 열고 있다. 7년 전부터 팬클럽이 가동됐다. 현재 회원 1만여명을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가수는 그가 유일하다시피하다.

<> 신유의 신트로트論

우린 무조건 ‘음을 꺾으면 트로트’라고 믿는 통념이 있다. 꺾는 게 절대 트로트가 아니라고 본다. 가사도 달라져야 된다. 너무 통속적이고 삼각관계 같은 ‘사랑타령 일변도’에서 벗어났으면 좋겠다. 인생에 활력을 주고 희망을 주는 가사도 트로트의 중요 구성요소인 것 같다. 장사익 선배가 부르는 ‘봄날은 간다’는 정말 놀랍다. 그 선배는 음을 억지로 꺾지 않는데도 한국 정통 트로트의 율조와 색깔을 갖고 있다. 율동에 치중한 트로트가 득세를 하는데 난 몸은 그대로 두고 노래에만 율동을 준다. 오직 노래로 승부를 걸고 싶다. 현재 트로트계는 너무 살벌하다. 후배를 밀어주는 선배도 있어야 하고 선배를 믿고 따르는 후배도 있었으면 좋겠다.



인기를 실감하다
전국노래자랑 단골 초청가수
수백여 팬 ‘시계바늘’ 합창
녹화 후 기념촬영 위해 장사진
황제 태진아도 울고 갈 판

아버지의 힘
한때 트로트계 기대주 신웅씨
운동·음악 좌절 겪은 아들에
트로트가수 활동 깜짝 제안
창법·호흡 등 A to Z 전수
노래해 번 돈 아들에 투자도

‘시계바늘’이 살렸다
2008년 첫 음반 ‘쪽박 눈물’
느린 곡, 방송국서 퇴짜연속
아버지의 히든카드 ‘시계바늘’
고속도로 휴게소서 대박 이뤄


◆신유“원래 트로트는 끔찍하게 싫어해”

거의 완벽에 가까운 신체조건을 갖고 있었다.

신장 180㎝, 몸무게 66㎏. 그리스 대리석 조각 같은 얼굴 라인. 백옥 같은 피부. 섬섬옥수.

중년 여성들이 그를 왜 ‘우리 왕자님’이라고 부르며 쓰러지는지 알 만하다. 그의 유명세의 발원지는 어딜까. 바로 자식한테 올인한 아버지 신웅씨(61)이다. 아버지도 한때 국내 트로트계의 기대주였다. 칠곡군 약목면 남계리에서 태어난 신웅은 구미서 직장생활을 하다가 1980년 대구로 건너왔다. 잠시 통기타 라이브 업소에서 일을 한다. 이후 출세를 위해 서울로 간다. 그는 10여년간 주현미, 김용임 등과 함께 국내 ‘트로트 메들리 4인방’으로 불린다. 특히 그는 ‘고속도로 휴게소의 가왕’으로 불리기도 했다. 하지만 자신 위에 군림하고 있던 주현미 등의 아성은 좀처럼 넘겨다 볼 수 없었다. 밤무대 가수로 활동하는 바람에 솔직히 아들과 살가운 시간을 나눌 겨를이 없었다.

신유는 서울에서 태어났다. 강남구 도곡2동 대도초등학교 4학년 때 축구부 선배가 가입만 하면 그 자리에서 크림빵과 우유를 준다는 얘기에 빠져 덜컥 축구선수의 길을 걷고 만다. 한때 유소년 국가대표에 선발돼 일본에도 다녀왔다. 배재중에서도 축구를 했다. 하지만 잦은 부상 등으로 인해 짙은 슬럼프가 찾아왔다. 툭하면 후보로 밀렸다. 어린 나이에 상심이 컸다. 그래서 고2로 올라갈 때 축구를 그만둔다.

이때 아버지도 비전이 안 보였을 때였다. 부자가 동반 추락을 했다.

“무늬만 가족이었다. 저는 솔직히 아버지가 구체적으로 무슨 일을 하는지 잘 몰랐다. 그냥 노래를 부른다는 정도만 알았다.”

◆기획사 오디션에 응시하다

이래선 안되겠다 싶어 아버지 몰래 서울의 모 기획사에 오디션을 본다. 고교 2학년 때였다. 합격을 해서 드라마 OST를 몇 개 찍었다.

“이땐 트로트 가수를 가수로 취급하지 않을 정도로 발라드 가수를 지향했다. 그때 주로 조성모의 가시나무새, To heaven 등을 애창했다.”

정규음반 작업 중 기획사가 파산을 한다. 운이 따라주지 않았다. 설상가상으로 변성기까지 겹쳐 무려 5년이나 허송세월한다. 그렇게 해서 백제 예술대 실용음악과에 들어간다.

“그 과정에 1년 정도 대인기피증 때문에 집에서 두문불출했다. 보는 사람마다 음반 얘기를 하더라. 그래서 노래도 끊었다.”

군대를 갔다. 강원도 화천 7사단 사단장 운전병이었다. 전역 후 사업을 하고 싶었다.

어느 날 휴가를 나왔다. 아버지가 애타는 심정으로 그를 불러 세웠다.

“동룡아, 너 트로트 한번 안 해 볼래.”

“아버지, 다른 사람은 몰라도 저는 절대 트로트는 아니예요.”

그리고 전역을 했다. 아버지는 아들한테서 뭔가 ‘될 것 같은’ 감을 잡는다. 그래서 다시 아들에게 트로트 가수를 제안하며 회심의 노래를 내민다. 바로 아버지가 작사·작곡한 ‘잠자는 공주’였다.

‘앵두 빛 그 고운 두 볼에/ 살며시 키스를 해주면/ 그대는 잠에서 깨어나/ 나에게 하얀 미소로 지을까~’

“들어 보니 기존 트로트와 완전 구별되는 곡이었다. 트로트 같은 발라드, 발라드 같은 트로트였다. ‘아버지, 노래 좋은데요. 아버지도 이 곡으로 데뷔하는 겁니까’ 이렇게 묻자 아버지는 ‘야, 이곡은 널 위해 작곡한거야’라고 말하더라.”

◆멀기만 한 대박의 날

신유는 이때부터 발라드 가수에서 저절로 트로트 가수로 변모한다.

“신기하더라. 그냥 노래가 좋아졌다. 그리고 연이어 트로트 음반을 준비했다. 모든 게 자연스럽게 진행됐다. 내가 아버지 맘을 읽고 아버지도 내 맘을 잘 읽어줬다.”

기존 트로트계를 침공하기 위한 거사 모의는 잠실에 있는 모 스튜디오에서 7개월 이상 진행됐다.

신유는 트로트 필살기를 음악 사부인 아버지로부터 무술처럼 전수했다. 호흡, 제스처, 눈빛, 마이크 잡는 법, 트로트 특유의 창법 등 A에서 Z까지 모든 걸 다시 공부했다. 발라드 창법을 지우고 트로트 창법으로 가는 길은 너무나 고단했다.

“트로트 가수는 돈 있고 노래 좀 하면 누구나 할 수 있다고 잘못 생각했다. 막상 트로트 안으로 들어가려고 하니 발라드보다 더 어려웠다.”

그는 일단 옛가요를 많이 공부했다. 매일 연습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한 소절을 갖고 아버지와 오래 토론도 하고 대화도 했다.

“그냥 음을 꺾기만 하면 트로트가 되는 줄 알았다. 그런데 아버지는 ‘너는 음을 꺾지 말고 꺾는 가수 이상의 파워를 보여줘라’고 당부를 했다. 그 말이 처음엔 무슨 뜻인 줄 몰랐다. 한때 ‘사랑해 당신을’을 부른 라나에로스포의 멤버였던 어머니(한성자)는 트로트일수록 항상 박자를 정확하게 짚어라고 했다. 음을 일부러 통속적으로 구부리지 말라고 했다.”

그는 기존 트로트의 대표적 감정인‘뽕필’을 넘어서고 싶었다. 구식 트로트를 무너뜨리고 신식 트로트 세상을 열고 싶었다.

항상 ‘신유, 나만의 색깔을 찾자’고 스스로에게 최면을 걸었다.

하지만 그의 승부수는 승률이 그다지 높지 못했다. 2004년 장윤정의 ‘어머나’는 일대 센세이션이었다. 이어 2006년 ‘빠라빠빠’와 ‘곤드레만드레’로 ‘남자 장윤정’으로 세몰이를 했던 박현빈 등이 그의 틈입을 허락하지 않았다. 하지만 걱정하지 않았다.

◆시계바늘이 살린 ‘잠자는 공주’

‘잠자는 공주’는 기존 트로트판의 생리로 볼 때 절대 성공할 수 없는 곡이었다. 너무 느렸다.

다들 ‘무리수’라고 지적했다. 특히 신인이 데뷔곡으로 이렇게 느린 템포를 들고 나온 걸 이해하지 못했다. 아버지도 데뷔곡은 신나는 곡으로 가자고 했다.

“그런데 난 반대로 갔다. ‘아버지, 망해도 좋아요. 그냥 이 곡으로 가요’라고 했다. 천편일률적인 ‘쿵짝 트로트’와 정면승부를 걸고 싶었다.”

신유는 되레 조금 불안해 하는 아버지를 안심시켰다.

2008년 첫 음반이 나왔다.

충격이었다.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1년을 손가락만 빨고 지낸다.

“아버지는 노래만 잘 했지, 신곡을 어떤 루트로 홍보하고 마케팅해야 되는지를 전혀 몰랐다.”

퇴짜의 연속이었다. 지금도 부산 모 방송국 PD한테 당한 수모를 잊지 못한다. KTX를 타고 부산에 무려 4번이나 내려가서 트로트 방송에 출연하려고 했다. 하지만 노래가 너무 느리고 해서 방송불가 대답만 듣고 낙심해 상경한다. 방송국에선 신유를 거들떠보지도 않는다. 참담했다. 아버지가 틈틈이 노래해서 번 돈은 신유 활동에 모두 허비된다.

잠자는 공주는 무려 3년간 그렇게 늪 속에서 허덕였다. 그런데 생각도 못한 ‘시계바늘’이 절벽 앞에 서 있던 부자를 기사회생시킨다. 2011년 한 해 전국 고속도로 휴게소 음반판매대에선 약속이나 한것처럼 시계바늘만 틀어댄다. 누가 시킨 게 아니었다.

‘사는게 뭐 별거 있더냐/ 욕 안먹고 살면 되는거지/ 술한잔에 시름을 털고/ 너털웃음 한번 웃어보자 세상아/ 시계바늘처럼 돌고 돌다가/ 가는길을 잃은 사람아/ 미련따윈 없는거야 후회도 없는거야/ 아~~아~~아~~아~~/ 세상살이 뭐 다 그런거지 뭐’

원래 이 곡은 아버지가 부를 작정이었는데 아들이 뺏어 가버렸다. 시계바늘로 인해 잠자는 공주까지 동반상승을 한다. 이 두 곡으로 인해 신유는 일약 트로트계의 샛별로 등극한다.

“나는 아직 아버지보다 하수다. 한 10년쯤 아버지한테 배우려고 한다.”

글·사진=이춘호기자 leekh@yeongn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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