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공산은 ‘임란 의·승병의 본산’

  • 박진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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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4-05-23   |  발행일 2014-05-23 제35면   |  수정 2014-05-23
휴정 휘하의 사명대사, 동화사·공산성 머물며 왜군격퇴 위한 작전 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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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명대사 진영. 전국에 있는 20여개의 진영 가운데 가장 오래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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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화사 성보박물관 뒤에 있는 비사리 구시(나무로 만든 밥통). 임란 당시 약 5천명의 승병이 먹을 수 있는 크기인데, 보관이 부실하다. 다른 하나는 성보박물관 지하 수장고에 있다.

팔공산은 임란 의·승병(義·僧兵)의 본거지다. 임진왜란이 일어나고 3개월 뒤 대구지역에서는 유림을 중심으로 부인사에서 최초로 의병을 결성했다.(1차 회맹) 이듬해에는 181명이 모여 공산의진군(公山義陣軍)을 조직했다. 1596년에는 영남지역 95명의 의병장이 팔공산에서 2차 회맹을 했다. 임진왜란 당시 조선의 숭유억불정책에 따라 산중으로 밀려났던 사찰에서도 승병이 조직돼 왜군에 저항했다. 당대 고승이었던 휴정(서산대사)의 제자였던 유정은 휴정의 휘하에 들어가 의승도대장(義僧都大將)이 돼 평양성과 한양 수복에 큰 공을 세운다. 특히 유정은 일본과 화의회담의 대표로 가토 기요마사와 3차례나 만나 담판을 했으며 전쟁이 끝난 후, 일본으로 건너가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강화를 맺고 조선인 포로 3천500여 명을 무사히 귀국시키기도 했다.

유정이 팔공산 일대에서 활약한 때는 1595년부터다. 그는 동화사를 중심으로 의병활동을 전개했다. 그의 인장인 ‘영남도총섭인(嶺南都總攝印)’과 승군을 지휘할 때 불었던 소라나팔, 비사리 구시(나무로 만든 밥통) 등이 현재 동화사 성보박물관에 남아있다. 또 동화사 봉서루에 있는 ‘영남치영아문’ 편액은 동화사가 조선시대 영남승병의 지휘소였음을 방증한다. 현재 영남치영아문 원판은 성보박물관 내에 전시하고 있다.

전국에 있는 20여개의 사명대사 진영(眞影) 가운데 동화사에는 가장 오래된 사명대사 진영(보물 제1505호)이 남아있다. 이 진영은 1796년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치켜 뜬 눈과 큰 코, 큰 귀 등 뚜렷한 이목구비에 긴 수염을 한 유정이 흰 장삼에 붉은 가사를 걸친 채 의자에 앉아 가부좌를 하고 있는 모습에 위엄이 넘친다.

유정은 대구지역 의병과 유기적인 연락을 취하면서 왜군을 물리치기 위한 작전계획을 구상했다.

구본욱 위클리포유 대구지오(GEO) 자문위원은 “오한 손기양이 쓴 오한집 가운데 ‘공산지(公山誌)’에 따르면 선조 28년(1595) 겨울, 승장 유정(사명대사)이 용기성(龍起城·성주 가야산성)에서 공산으로 이주했다는 기록이 있는데, 공산이 여러 성 중에서 가장 장관이었으며 유정이 공산성을 왕래하면서 산성을 수축하려 했다”고 말했다.

구 위원은 또 “선조 29년(1596) 2월, 체찰사 이덕형이 방어사 권응수와 인근의 수령으로 하여금 형세를 살피도록 했는데 의흥과 신령에 있는 두 현감이 부계로부터 공산성에 이르니 유정이 주봉 아래에서 장막을 엮고 있었다는 것을 보았다는 기록이 있다”고 말했다. 이 밖에 선조 30년(1597)에는 유정이 승병과 함께 공산성에 머물렀다고 전해진다.

구 위원은 대구의 거유 송담 채응린의 아들 채선견이 쓴 ‘부인사 중창기’에 유정이 1597년부터 부인사에 기거했다는 기록으로 봐 유정이 95년부터 줄곧 팔공산 일대에 머물렀을 것으로 추정했다.

유정이 대구지역 의병장이었던 모당 손처눌과 교류했던 기록도 남아있다. ‘모당일기’에 따르면 선조 37년(1604), 유정이 일본에 외교사신으로 가던 중 파잠(수성구 파동)을 지날 때 손처눌이 한시(7언 절구)를 건넸다.



고래사는 험한 바다 범선으로 건너니(鯨海揚帆擅一時)

이 행차 죽백에 드리울 것을 알겠구려(顯知此擧汗靑垂)

당년에 이미 천하의 일을 담론했으니(當年已試談蝨)

오늘 어찌 숨을 곳을 논하랴.(此日寧論隱擇枝)

설욕하는 장한 계책 장자에게 있고(雪恥壯猷誰長子)

교린의 대의는 다만 선사에게 달려있네.(交隣大義只禪師)

이룸에는 우리의 허실을 물어보는 것이 중요하니(要成若問吾虛實)

인화로 성을 삼고 믿음을 못같이 하소서(城以人和信以池)

한시에는 왜란 당시 모당과 함께 천하의 일(왜적을 물리칠 계략)을 담론했다는 내용이 나온다.

오한집 ‘공산지’편에는 97년 8월21일, 유정이 냉천전투(팔조령~냉천 일대)에서 수십 명의 승병과 함께, 매복과 절벽을 활용해 수백 명의 왜군을 물리친 기록이 나온다. 대구시 달성군 가창면 우록리 최정산에 있는 남지장사에 유정의 승병부대 훈련장이 있던 것으로 보아 팔조령~가창~파동에 걸쳐있는 최정산과 앞산에서 게릴라전이 벌어졌을 가능성이 크다.

1597년 9월3일에도 대구지역 의병이 팔조령을 넘어 대구로 들어오는 왜적을 파잠(냉천 일대)에서 격파한 기록이 있다. 당시 대구지역 의병장은 모당 손처눌이었으며, 권응수 장군의 휘하에 있었다.

주보돈 경북대 사학과 교수는 “임란의병 중에는 승병이 많았지만 그들의 역할에 대해 잘 알려지지 않았다”면서 “팔공산이 호국불교의 성지인 것만은 틀림없는 사실”이라고 했다.
글·사진=박진관기자 pajika@yeongn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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