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구는 대구에 언제 들어왔을까

  • 박진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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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4-06-06   |  발행일 2014-06-06 제34면   |  수정 2014-06-06
광복 이전의 대구축구 이야기
1906년 계성학교서 첫 선…패스보다 ‘멀리차기’ 잘해야 축구천재 소리 들어
20140606
1934년 11월23일, 조선체육회 주최 제15회 전조선축구대회에서 우승한 계성중학교 축구부. 맨 오른쪽은 헨더슨 교장이다.


브라질월드컵 개막이 일주일 남았다. 전 세계인을 잠 못 들게 할 월드컵열풍은 한국을 비켜갈 수 없다. 한국 축구가 8회 연속 본선무대에 진출한 가운데 사상 첫 원정 월드컵 8강이라는 새 역사에 도전하기 때문이다. 태극전사 가운데 박주영(청구고), 곽태휘(대구공고) 등 대구 출신도 있다.

대구에는 언제 축구가 도입됐을까. 이번 호 위클리포유 커버스토리는 광복 이전 대구 축구의 역사에 관한 이야기를 싣는다. 또 축구100년사(1907~2007)를 쓴 대구 축구의 산증인 이주녕 축구평론가를 만났다.


근대축구의 원조는 영국이다. 1863년 영국축구협회가 발족된 뒤 유럽 전역으로 축구가 보급됐고 1904년 국제축구연맹이 조직됐다.

우리나라에는 1882년 구한말, 영국 수병을 통해 축구가 도입된 것으로 알려지고 있으나 정확한 경로에 대해선 알 길이 없다.

근대 축구 이전 우리나라에도 구희(球戱), 축국(蹴鞠), 농주(弄珠)와 같이 축구와 유사한 게임이 있었다. 구당서 ‘동이전(東夷傳)’에는 ‘고구려 사람들은 축국을 잘한다’고 기록돼 있다. 신라에도 축국에 대한 이야기가 있다. 삼국유사와 삼국사기에 김춘추가 김유신의 집 마당에서 축국을 하다 옷자락을 밟아 옷끈이 떨어졌는데, 김유신의 동생이 이를 꿰매주어 결국 부부가 되었다는 내용이 있다.

이주녕 축구평론가(86)에 따르면 축구가 처음 우리나라에 도입되었을 땐 축구에 대한 공식명칭은 물론 골대도 없었다고 한다. 골문 대신 막대기를 꽂아두거나 골대도 골키퍼의 키를 표준으로 만들었다. 당시 골키퍼는 문지기, 스트라이커는 널포라 불렀다.

우리나라 근대스포츠 발전에 큰 공헌을 한 것은 배재학당, 경신학교, 보성학교, 휘문의숙 등 사립학교가 중심이 됐다. 이 밖에 사회단체에서도 축구팀이 조직됐다.

1902년 서울 배재학당에서 처음으로 축구반이 편성된 이후 1907년 평양의 평양신학교에 축구반이 창단됐다. 대구에서는 1906년 미국 북장로교 선교사에 의해 설립된 계성학교에서 처음 축구가 소개됐다. 1910년 계성학교 이재인, 이상훈, 진기찬, 서달용을 중심으로 교내 운동부가 조직돼 축구, 야구, 정구를 했다.

이주녕 평론가는 “1910년 학교에서 운동부가 만들어지기 전 이재인 등이 1907년 소학교 운동장이나 골목길에서 축구를 했다”고 증언했다.

대구에서 축구시합이 본격적으로 인기를 끈 시기는 1920년대다. 1920년 대구청년회가 발족되면서 그해 계성학교 축구부가 탄생된다. 이들은 감독도 없이 자체적으로 훈련을 했다. 축구화는 일본 노동자들이 신었던 ‘지까다비’를 구입해 축구화를 대신했다. 당시 희도, 해성, 남명, 수창 대구보통학교에서도 축구가 성행했다. 매주 토요일 계성학교 운동장에서 대구부내 상인팀과 청년팀이 축구경기를 벌였는데, 많은 사람이 몰려와 관람을 했다고 한다. 당시 계성학교는 교기가 축구였다. 체육시간에는 으레 축구시합을 했다. 한 학년이 20명 정도였는데 패스를 하기보다 ‘똥볼(멀리 차는 것)’을 잘 차는 학생이 축구를 잘 하는 것으로 평가됐다.

21년 서울 배재학원에서 최초로 중등부 전조선 축구대회가 열렸으나 계성학교는 참가하지 못하고 이듬해 경성학교에서 열린 축구대회에 참가, 평양숭실팀에 1-0으로 석패했다. 계성학교 축구부는 축구지도자 김태술씨가 미국유학길에 오르면서 해체되다시피 했다. 25년 계성학교에서 제7회 전조선축구대회가 처음 열렸다. 계성학교에서 축구붐이 조성된 것은 김영제씨의 역할이 컸다. 그는 29년 대구부축구협회 창립에 산파역할을 했다. 그해 대구부축구협회 주최로 제1회 전조선 축구대회가 계성학교 운동장에서 열려 1만여명의 관중이 들어찼다.

이 대회에서 청년부는 대구청년회가, 중등부에선 계성학교가 우승을 차지했다. 전 조선 축구대회였지만 참가학교는 대부분 대구지역 학교였다. 이때 대구에는 대구고보(경북고), 대구농림고에도 축구부가 있었다. 특히 대구고보는 31년 경성제국대에서 열린 제3회 전 조선 중등부축구대회에 첫 출전을 해 1회전에서 전 대회 우승팀 경성고보와 붙어 1-2로 석패하는 기염을 토하기도 했다. 1933~35년 계성학교 운동장에서 열린 전 조선 중등부축구대회에서 계성학교는 3연패를 하게 된다. 계성학교 축구부를 물심양면으로 지원한 건 아담스와 헨더슨 교장이었다. 또 이재인, 김태술, 김영제 등 걸출한 지도자가 있었기에 계성학교 축구부가 발전할 수 있었다. 당시 선수로선 김희수, 조용해, 박봉근, 김희도, 홍종칠 등이 있었으며 김희수와 조용해, 홍종칠은 국가대표로 발탁돼 일본 오사카 고시엔에서 열린 축구대회에 출전해 우승을 하기도 했다.

34년에는 대구의학전문학교에 축구부가 창립돼 이듬해 서울에서 열린 축구대회서 준우승을 차지하기도 했다. 하지만 35년 결성된 영남체육회를 중심으로 축구가 발전을 하는 와중에 36년 베를린올림픽에서 우승한 손기정 선수의 일장기말소사건 여파로 모든 체육대회는 일본인 단체가 주최하는 체육행사만 허용돼 기존 단체가 해체되는 수모를 겪었다. 이는 지방체육에도 영향을 미쳐 전대구축구단과 계성학교 축구부까지 해체됐다.

39년 이근하씨를 중심으로 전대구축구단이 다시 조직돼 경성운동장에서 도시대항 축구대회가 열렸다. 대구팀은 개성팀과 수원팀을 각각 5-0으로 누르고 함흥팀과 붙었으나 패해 결승진출이 좌절됐다. 한편 대구의전 축구팀은 37년 조선신궁대회에서 4강에 올랐다.

38년 영남체육회가 일본인을 중심으로 조직된 대구체육회에 강제통합되면서 암흑기에 접어든다. 이후 41년 일본이 태평양전쟁을 일으키면서 축구를 비롯한 각종 체육대회가 침체기를 맞았다.

<참고: 대구·경북축구 100년사>

박진관기자 pajika@yeongn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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