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산책] 첩에게 바친 삼년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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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4-07-22 07:52  |  수정 2014-07-22 07:52  |  발행일 2014-07-22 제22면
[문화산책] 첩에게 바친 삼년상

398년 전인 1616년 이맘때, 안동 예안현에 살았던 김택룡은 둘째 첩의 삼년상 제사준비로 분주하다. 도산서원 원장을 지낼 정도로 지역의 명망있는 선비 김택룡이 본부인도 아닌, 둘째 첩의 삼년상 제사를 마련하느라 바쁜 것이다. 그런데 이 제사는 김택룡과 첩의 자식들에게로 한정된 것이 아니라, 집안 전체의 제사로 준비된다. 멀리서 사위 권오근은 제사에 쓸 쌀과 채소를 보내왔고, 제삿날에는 평소 김택룡과 잘 알고 지내던 진사 박회무·이서·홍붕 등이 함께 제사에 참여할 정도였다. 비록 첩이었지만, 그들은 집안 전체의 일로 그녀의 죽음을 슬퍼했던 것이다.

조선은 엄격한 신분제 사회였다. 신분제 사회의 가장 큰 특징은 신분에 따라 사회적 역할이나 행동 양식의 범주가 분명하게 구분된다는 점이다. 신분에 따른 행동의 제약이 규범의 형식으로 엄격하게 적용된다. 그리고 이것은 당대에서 끝나지 않고 후대로 세습된다. 비록 양반을 지아비로 섬겼다고 해도, 첩은 여전히 천한 신분이다. 따라서 그들의 죽음은 양반의 전유물인 삼년상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 첩의 죽음에 대해서는 굳이 삼년상이라는 형식을 통해 장례를 치르지 않아도 문제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김택룡은 첩이 낳은 2남2녀의 자식들로 하여금 어머니의 삼년상을 치르게 한다. 김택룡 본인도 삼년상 기간 부인을 잃은 마음으로 슬퍼했다. 그리고 삼년상을 마치면서 집안 전체의 제사로 모두의 애도 속에서 먼저 죽은 첩을 떠나 보냈다. 당시 예안 지역을 대표하는 유학자로서 누구보다 유교적 예제에 밝았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예의보다 ‘사람’을 먼저 생각했던 것이다. 삼년상을 지내면서, 김택룡은 자신을 사랑했던 사람에 대한 연민과 어머니를 잃은 자식의 입장에서 예를 해석했다. 첩의 삼년상 제사에는 이러한 마음이 담겨 있다.

예의로 대변되는 우리 사회의 많은 규율과 시스템은 사람과 사람 사이의 올바른 관계 맺기를 위한 것이다. 모든 규율과 시스템의 본질은 바로 ‘사람’이라는 말이다. 그런데 어느 순간 규율과 예의가 사회를 지배하면서, 종종 본질은 없어지고 형식만 남게 된다. 제도와 시스템의 본질이 되는 ‘사람’이 사라지는 것이다. 그 어느 때보다 예의가 사회를 지배했던 조선시대에도 그 본질이 ‘사람’임을 꿰뚫어 보았던 김택룡의 혜안이 지금 우리 사회에도 여전히 유효한 이유이다.
이상호 <한국국학진흥원 디지털국학센터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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