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산책] 조수업 사망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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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4-08-05 07:40  |  수정 2014-08-05 07:40  |  발행일 2014-08-05 제22면
[문화산책] 조수업 사망사건

263년 전 오늘(1751년 음력 7월10일), 성주관아에서는 성주목사 주재로 사망사건에 대한 검시가 진행되었다. 이 사건은 독용산성의 하급무관인 별장 박문두가 놋그릇을 도둑맞으면서 일어났다. 사건 조사과정에서 박문두는 성 아래 살던 유기장 조수업의 행동이 의심스럽다면서 그를 가두고 곤장 10대를 때렸는데, 그 다음날 조수업이 사망했던 것이다. 이로 인해 조수업의 동생 조대업은 형의 죽음이 억울하다며 관청에 소장을 제기했고, 절차에 따라 초검이 진행됐다. 며칠 뒤 고령현감이 와서 한 번 더 검시를 했다. 사망 사건에 대해 두 번 검시하는 규정에 따른 것이다.

그 결과 조수업의 사망원인은 곤장에 맞았기 때문으로 판명됐다. 경상감사 조재호는 두 검시 결과를 확인한 후 곤장을 때린 독용산성 별장 박문두에게 책임을 물었다. 도둑맞은 물건이 조수업의 집에서 발견된 것도 아닌데, 행동이 의심된다는 이유만으로 곤장을 때렸던 것이다. 특히 죄인을 가두고 무거운 처벌을 내릴 경우에는 객관성을 담보하기 위해 심문관 두 명이 함께 추국하는 동추(同推)를 통해야 하는데, 그런 절차도 밟지 않았다. 이 같은 이유로 경상감사 조재호는 박문두를 파면하고, 이 사안을 형조로 이첩했다.

사람의 생명에 관한 조선시대 형사 절차의 한 단면이다. 살인사건에 대한 검시는 관할 지역 수령과 인근 지역 수령에 의해 반드시 두 번 이상 이루어졌다. 특히 객관성 확보를 위해 두 번째 검시관은 첫 번째 검시에 대한 어떤 정보도 받지 않았다. 이 내용은 상급기관인 관찰사에게 보고됐고, 관찰사는 문제가 없다고 판단된 경우에 한해 중앙정부에 보고한 후 사안을 종결했다. 그러나 약간의 의심만 있어도 다시 검시를 했고, 중앙정부 역시 문제가 있다고 판단되면 어사를 파견하기까지 했다. 사람의 생명이 걸린 문제에 대해서는 신중에 신중을 기했던 것이다.

이 같은 모습은 단 한 사람의 억울한 죽음도 없애려 했던 당시 사람들의 노력에서 기인했다. 사람의 생명을 가장 중요한 가치로 인식했던 그 사회의 문화가 엄격한 형사 시스템으로 드러났던 것이다. 특히 이런 문화는 이론으로만 존재했던 것이 아니라, 지방의 작은 현에서조차 철저하게 적용됐다. ‘사람의 가치’에 주목했던 수준 높은 문화가 만들어 낸 한 단면이다. 사실 개인과 사람을 중시하는 이론 영역은 263년 뒤인 오늘날이 훨씬 더 수준 높다. 하지만 그것이 적용되는 실천 영역에서는 어떠할까?

이상호<한국국학진흥원 디지털국학센터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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