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산책] 한여름 날의 詩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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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4-08-19 07:54  |  수정 2014-08-19 07:54  |  발행일 2014-08-19 제22면
[문화산책] 한여름 날의 詩會

397년 전 이맘때도 안동 예안은 찜통 더위였다. 더위에 못 견딘 김택룡은 ‘역정’이라는 정자를 찾았다. 얼마 뒤 마을 일을 맡아 보던 유사 김개일과 김회일, 권전룡 등도 더위에 지쳐 역정을 찾았다. 이왕 이렇게 모였으니, 소년들을 모아 물고기를 잡게 하고 보리밥과 물고기 탕으로 함께 식사를 하기로 했다. 그러다 보니 이래저래 20여명이 모여, 정자에서는 물고기 회식이 열렸다. 김택룡이 촌료주(막걸리) 한 동이를 대접하기로 하면서, 꽤 그럴싸한 연회로 발전했다.

어느 정도 취기가 돌자 김택룡은 김회일에게 시를 지을 때 운을 맞추기 위해 넣는 글자인 운자를 생각하여 불러 보라고 했다. 김회일은 정자의 경치와 술 한잔의 즐거움을 떠올리며 정자 정(亭)자와 병풍 병(屛), 그리고 숙취 정()자를 불렀다. 김택룡은 네 구절로 이루어진 시를 지으면서 제시된 글자를 각각 첫째 구절과 둘째 구절, 그리고 넷째 구절 마지막 글자로 넣어 ‘역정절구’라는 시를 지었다. 그러자 김택룡의 아들 김숙을 비롯한 여러 사람들도 세 글자의 운자를 사용한 시를 지어 김택룡의 시에 화답했다. 연회에서 시회로 이어진 여름날의 놀이는 날이 저물어서야 끝났다.

물론 이 이야기는 시를 지을 수 있는 양반들에 한정된 것이다. 이들은 밥과 술을 나눈 후 즐거운 흥취를 자연스럽게 시를 통해 마음을 나누는 쪽으로 이행시켰다. 연회에서 시회로 이어지는 경우는 특별한 것이 아니라, 당시 선비들에게는 너무나 자연스러운 일상이었다. 요즘도 우리들이 모여 즐겁게 술이라도 한잔하여 흥에 겨워지면 자연스럽게 노래방을 찾는 문화만큼이나 자연스럽다. 그런데 이들은 노래방에서 노래 부르는 것과 달리, 시를 통해 내가 앉아 있는 이 공간과 만난 사람들을 특별하게 만든다. 정자 밖으로 비치는 자연을 특별한 시선으로 읽고, 동일한 운자를 사용함으로써 시를 통한 깊은 사귐의 단계를 경험하였던 것이다.

더운 여름날 경치 좋은 곳을 지나다 보면, 유난히 시원해 보이는 정자를 만날 수 있다. 잠시 쉬어가면서 정자의 기둥 사이로 불어오는 시원한 바람을 맞는 즐거움은 더운 여름 최고의 호사다. 그렇게 땀을 식히다 보면 정자에 걸려 있는 많은 시판(詩板)들이 눈에 들어온다. 물론 대부분 한문이라 해독이 불가능하겠지만, 정자를 통해 자연을 노래하고 사람을 사귀었던 선비들의 수준 높은 만남의 잔상을 느끼기에는 충분할 것이다.

이상호<한국국학진흥원 디지털국학센터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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