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혜숙의 '위대한 열정을 찾아서' .7] 全生을 바친 열렬한 몰두, 고산자 김정호-수원 국토지리정보원 지도박물관

  • 류혜숙객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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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4-08-22   |  발행일 2014-08-22 제38면   |  수정 2014-08-22
“산과 강은 백성의 것” 선생의 숭고한 집념은 민초에 대한 사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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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산자 김정호의 동상. 수원의 국토지리정보원 내에 있으며 1987년에 세워졌다.

우리는 모두가 그를 안다. 세종대왕이나 이순신 장군만큼 그의 이름은 익숙하다. 그러나 언제 어디서 태어났는지, 언제 어떻게 세상을 떠났는지, 우리는 알지 못한다. 다만 그가 남긴 것들을 통해 그의 전생(全生)이 집요하고 극단적인 열정과 고도의 집중력으로 가득 차 있었음을 느낀다. 그는 고산자 김정호. 섬세하고 독창적이며 아름다운 ‘대동여지도’를 만든 분이다.

◆지도 제작에 평생을 바치다

수원에 우리나라의 국토지리정보원이 위치한다. 그 야외 전시장에는 각종 측량시설 모형과 GPS 관측시설, 그리고 경위도 원점이 설치되어 있다. 경위도 원점은 세계의 위치기준인 그리니치 천문대로부터 우리나라 위치의 기준을 설정한 것이다. 즉 한 나라의 모든 위치의 기준이자, 우리나라 측량의 출발점이 되는 점이다.



이 원점을 곧장 내려다보는 자리에 김정호 선생이 서 있다. 선생의 본관은 청도라 알려져 있고, 황해도에서 태어났다고 본다. 1804년경에서 1866년경까지 살았으며, 서울의 남대문 밖 만리재 혹은 공덕리에 살았다고 추정된다. 후손에 대해서도 알려진 바가 없는데, 다만 딸이 하나 있었고 아버지의 작업을 도왔다고 전해진다. 선생은 평민 출신으로 추측되는데, 당시 양반 계층인 신헌이 자신의 문집에서 연상인 선생을 ‘김군’으로 호칭한 점, 그리고 하층민 중 뛰어난 인물의 행적을 기록한 ‘이향견문록’에 선생의 전기가 수록되어 있는 점 등에서 그러하다.



동상의 선생은 갓 쓰고 봇짐 메고, 오른손엔 패철(지남철, 나침반)을 들고 저 앞의 국토를 바라보고 계신다. 이 모습은 학계의 권위자들이 추측해 만든 것이라 한다. 선생이 조선 팔도를 세 바퀴 돌고, 백두산을 8번이나 올랐다는 전설 같은 이야기가 있다. 전설 속 선생의 모습이 저러했을까. 그러나 학계에서는 이를 근거 없는 구전으로 본다. 의심나는 곳을 찾아 답사했을 수는 있지만 당시의 교통사정이나 그의 가계로 추측건대 신빙성이 없다는 것이다. 그에 관해 정확한 것은 오직 하나, 평생 지도제작과 지지편찬에만 몰두했다는 것이다.



선생의 동상 아래에는 대동여지도와 지도제작 장면, 추모시 등이 음각되어 있다. ‘풍상 기갈이사/ 언제 벗어 걸어 봤으랴/ 발로 발로/ 오직 두 발로/ 재고 누비고 새겨온 산하… 지금은 어디쯤서/ 허리 굽히고 지키시오니까/ 이 봄이 그 봄만 못해/ 금 하나 더 긋고 사는 후예…’ 전국 세 바퀴, 백두산 8번이 조작된 스토리텔링이라 폄하하고 싶지는 않다. 평생을 바친 열렬한 몰두에 대한 헌사로 읽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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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 국토지리정보원 내의 지도박물관. 지도의 변천사와 제작 방법 등이 전시되어 있다.


◆‘산마루와 물줄기가 지면의 근골과 혈맥’

야외 전시장의 오른쪽에 국토지리 정보원이 있고, 그 후면에 지도 박물관이 자리한다. 제1관인 중앙홀에는 대형 지구모형과 인공위성 모형이 설치되어 있다. 제2관인 역사관에는 지도의 기원과 각종 고지도, 김정호 선생의 대동여지도, 국토지리정보원에서 제작한 현대지도 등 국내지도의 발달과정과 세계지도의 변천사가 다양한 유물과 그래픽 패널 영상 등으로 흥미롭게 전시되어 있다.



선생이 만든 것으로 공인된 지도는 청구도, 대동여지도, 수선전도 등 3종이다. 동여도, 대동여지전도 등은 그의 작품으로 추정된다. 현재 남아있는 대동여지도는 규장각, 서울대도서관, 국사편찬위원회, 선신여대 박물관, 개인소장 등 20여벌이 전한다. 지도박물관에서는 비록 원본은 아니지만 선생의 작품을 한자리에서 볼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전시실 바닥에는 대동여지도가 불빛을 받으며 깔려 있다. 대동여지도는 남북을 22단으로 나누어 한 단을 하나의 책자로 제작했다. 이를 전부 펼쳐 잇대면 한반도의 전체 지도가 완성된다. 그렇게 완성된 지도의 실제 크기는 가로 4m, 세로 8m로 3층 정도의 벽면이 필요한 거대한 규모다. 바닥의 지도는 그보다는 작지만 충분히 대형이다. 관청과 성터와 역참 등이 기호로 표시되어 있다. 길은 직선으로 이어지고 강은 곡선으로 흐른다. 그리고 3천여개의 산봉우리가 굵은 산줄기로 이어진다.

선생은 ‘산마루와 물줄기가 지면의 근골과 혈맥’이라 했다. 산맥은 국토의 골격을 형성하는 뼈대이며, 그 사이를 흐르는 강물은 혈맥으로 보았다. 백두산에서 시작된 큰 흐름이 척추처럼 한반도를 지탱하고 있다는 백두대간의 개념이 여기서 나왔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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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박물관의 제2역사관 바닥에는 대형으로 인쇄된 대동여지도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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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호 선생의 동상 하부에는 대동여지도와 추모시, 지도제작장면 등이 음각되어 있다.


◆산과 강은 민초들의 것

선생은 지도의 제작 외에 전국 지리지인 동여도지, 여도비지, 대동지지를 편찬했다. 그는 지도와 지지를 상호 보완적인 것으로 보고 지도의 미진한 점을 지지로 밝혀야 한다고 생각했다. 19세기, 사회는 변모하고 있었다. 지지의 편찬은 사회 경제적 변화에 따른 공간 구조의 변화를 반영하려는 시도였고, 선생은 철저한 사실성과 고증, 계속적인 보완을 통해 지역의 변화상을 그리고자 했다.



선생은 지도와 지지를 제작하고, 편찬하고, 간행했다. 이는 지도와 지지가 누군가의 독점물이 아니라 대중화하고 공유해야 하는 대상으로 보았음을 의미한다. 그는 진보적이었다. 선생은 말했다. “산과 강은 나라의 것이 아니다. 민초들의 것이다.”



선생의 죽음에 대해서는, 대원군에 의해 저작이 불태워지고 옥사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이는 1934년 조선총독부가 발행한 조선어독본의 고산자론에서 시작되었다고 보는데, 대원군을 우매한 정치 지도자로 부각시키고 대동여지도가 노일전쟁 등에 이용되었다는 등의 식민사관을 주입시키려 했던 것으로 여겨진다. 2002년 1월9일, 천문학자인 전영범은 보현산천문대에서 소행성 95016을 발견한다. 그리고 그 별의 이름을 김정호(Kimjeongho)라고 지었다. 언제 태어났는지, 어디에 묻혔는지 알 수는 없지만, 지금 고산자 김정호 선생은 하늘에 계신다.


>> 여행정보 - 지도박물관은 수원의 국토지리정보원 내에 위치한다. 경부고속도로를 이용할 경우 신갈IC로 나와 수원방향 42번 국도로 직진하다가 수원남부경찰서 네거리에서 우회전하면 된다. 수원역에서 버스를 탈 경우 46-1번, 37번 등 노선이 많고, 약 40분 걸린다. 지도박물관 관람 시간은 오전 10시부터 오후 5시까지, 오후 4시까지 입장이 가능하다. 입장료는 없다.

여행칼럼니스트 archigoom@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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