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현의 걷기 여행 .6] 외씨버선길 봉화구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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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4-08-29   |  발행일 2014-08-29 제39면   |  수정 2015-01-30
고택의 묵향에 취하고 원시의 솔향에 취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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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암정에서 본 닭실마을 전경. 닭실마을은 안동권씨 세거지로 영남의 4대 길지중의 하나인 명당이다. 충재 권벌이 조성한 청암정, 마을을 감아도는 태극형 물길, 전시관, 종택 등이 볼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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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량산 산수감상길’의 윗두실에서 바라본 청량산. 명호천을 따라 북곡 마을에서 시작하는 걷기 길은 윗두실, 천애수, 남면리, 오마도 터널을 지나 청량산을 한 바퀴 돌아오는 멋진 길이고, 한적하여 자연의 정취에 흠뻑 빠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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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양목 솔향기길’ 종점에서 만나는 ‘춘양목산림체험관’. 봉화의 관광 트렌드가 춘양목이어서 봉화를 ‘파인토피아’라 부른다.

외씨버선길 봉화구간은 모두 4구간으로 나눈다. 4구간은 연결구간(우련전~분천역, 22㎞), 8구간(보부상길, 분천역~춘양면사무소 18.5㎞), 9구간(춘양목 솔향기길, 춘양면사무소~두내약수탕 17.6㎞), 10구간(약수탕길, 두내약수탕~용운사 15.1㎞)이고, 총연장 73.2㎞이다.

소개하는 제9구간은 춘양면사무소 건물 뒤로 돌아가는 88번 지방도를 따라가면서 시작되는데, 만산고택~권진사댁~서동리 삼층석탑~양반걸음 걷기길~새터 마을-도심리~서벽리 춘양목 군락지~춘양목 체험관(두내약수탕)까지 6시간 정도 소요된다. 이 구간은 서동리 삼층석탑을 지나면 농로를 따라가는 길인데 햇볕에 많이 노출되므로 주의를 요한다. 그러나 ‘양반걸음 걷기길’을 지나 재를 넘으면 멀리 각화산을 조망하며 산속을 걷는 안온한 느낌이 든다. 산을 내려와 4㎞ 정도 운곡천을 따라 걷게 되는데, 도심리 마을을 통과할 때까지 봉화 사람들의 농촌생활을 가까이서 볼 수 있다. 도심리 마을을 통과하여 계곡을 끼고 서벽리로 넘어가는 길은 경치가 좋고 문수산 자락에서 하늘을 향해 시원스레 자란 춘양목을 보며 걷는 길이다. 서벽리의 걷기 좋은 흙길을 따라 3㎞ 정도를 가서 외씨버선길 표지판을 확인하고 오른편으로 내려오면 ‘춘양목산림체험관’이고, 여기가 제9구간 종점이 된다. 체험관은 ‘솔빛촌’ 조성공사나 춘양면 서북권역 개발공사로 다소 어수선하다. 두내약수탕도 공사로 인해 일시 폐쇄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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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제와 고택의 땅, 봉화

외지인들에게 널리 알려진 봉화의 산은 청량산과 청옥산이다. 청량산은 도산서원과 가까워서 퇴계가 자주 찾던 곳이었다. 그가 젊었을 때나 노년에 제자와 함께 걸으면서 성리학 체계를 완성한 길은 ‘예던길’이 되었다(‘예다’ 혹은 ‘녀다’는 ‘다니다’의 고어이니, ‘예던길’ 혹은 ‘녀든길’은 ‘다니던 길’이란 뜻이다). 예던길은 도산서원에서 봉화의 남쪽으로 진입하여 명호천(이나리천) 강변길을 따라 청량산까지 이어지니 청량산은 봉화로 들어오는 남쪽 관문이라 할 수 있다. 기암절벽과 빼어난 경치를 자랑하는 청량산은 주왕산, 월출산과 함께 한국 3대 기악이라 부른다. ‘선경(仙境)의 명산’이라고도 불리는 청량산에는 청량사(신라시대 원효대사가 창건하였다), 하늘다리(산악현수교, 출렁다리), 김생굴(명필 김생이 공부한 곳), 풍혈대(최치원이 수도한 곳), 공민왕당(공민왕이 홍건적의 난을 피해 숨은 곳) 등 호기심을 끄는 명소가 많다. 도산서원에서 청량산 입구까지의 ‘예던길’도 멋진 걷기길이고, 청량산 뒤쪽을 돌아오는 ‘청량산 산수감상길’은 원시의 비경을 간직하고 산촌의 정취가 그대로 보존되어있다. ‘산수감상길’은 북곡마을에서 시작하여 두실~윗두실~옥산~천애수~남면리~오마도터널~공민산성입구에 이르는 13.5㎞의 길이다.

청옥산은 두타산과 접하고 있으니 강원도 태백에 가깝다. 청옥산은 수목이 울창하여 삼림욕을 하기 좋은 산인데, 백천계곡에는 냉수성 어족인 열목어가 서식하고 있다. 청옥산의 백천계곡에는 현불사가 있는데 현불사는 설송(雪松)스님이 창종(創宗)한 대한불교 불승종(佛乘宗)의 총본산이다. 불승종은 법화경을 소의경전으로 하지만 유불선이 혼합된 불교이다. 창종주 설송스님은 김재규가 차지철에게 죽을 것이라 예언하기도 했고, 김대중이 대통령이 될 것이라 예언하기도 하여 유명한 정치인이 자신의 길흉화복을 점치기 위해 찾던 스님이었다. 그는 45세에 출가하여 단군을 현몽하였다고 주장하며 유불선이 혼합된 형태의 불승종을 창종했으나, 그의 입적 후 종단은 재산분규에 휘말리게 된다.

강원도의 오지보다도 더욱 오지인 석포면 지역은 자연보존상태가 양호하여 반딧불이나 수달이 서식한다. 오지였기 때문에 삼림이 잘 보전되어 있고, 생태환경이 잘 유지되어, 느린 삶을 체험하거나 마음의 힐링을 원하는 사람들에게 석포면은 휴양의 메카라 불린다. 이곳은 강원도와 인접하여 옥수수와 감자 맛이 좋고, ‘승부역 가는 길’은 걷기나 기차여행을 하는 사람들에게 낭만이 넘치는 길로 알려져 있다. 또한 승부역과 인접한 분천역은 스위스의 체르마트(Zermatt)역과 자매결연한 기념으로 ‘체르마트길’을 조성 중에 있다. 체르마트길은 분천역에서 출발하여 비동승강장~양원역~승부역~배바위재~분천역으로 돌아오는 원점회귀 걷기길이다. 역사(驛舍) 주변의 조형물이 마치 스위스의 어느 마을에 온 듯한 착각을 할 정도로 아름답다.

봉화는 태백과 소백의 중앙에 위치하며 영남지방의 최북단이다. 그러나 산경표상으로 봉화는 태백산계에 속하므로 봉화 중앙에 위치한 각화산 사고지를 ‘태백산사고지’라 부른다(정감록에서 십승지로 꼽는 양백지간은 태백산과 소백산의 경계지점인데, 봉화와 영주의 부석사까지다).

봉화에는 해발 1천m 넘는 산이 10개가 넘지만 봉화의 진산은 문수산이다. 문수보살의 설화와 관련이 있는 문수산 주변에는 봉화 3대 약수탕인 오전, 두내, 다덕 약수탕이 있다. 외씨버선길은 문수산 뒤쪽 비탈길을 따라가지만, 문수산 앞자락에는 봉화가 자랑하는 닭실마을(달실마을, 酉谷)이나 축서사(鷲棲寺)가 있고, 천주교 우곡성지(조선 정조 때 실학자인 홍유한 선생의 묘소와 신유, 기해, 병인박해 때 순교한 순교자 13위의 가묘)가 있다. 홍유한은 1750년 25세에 천주교에 입문하여 이후 죽을 때까지 7극(七極)이라는 천주교 교리에 따라 나눔과 덕행을 실천하며 철저한 수계생활을 하였다.

그래서 봉화 걷기여행의 중심에는 문수산이 있다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니다. 의상대사가 영주의 부석사를 건립하기 3년 전에 세운 축서사, 기묘사화와 을사사화에 연루되어 유배지에서 별세한 충재 권벌 선생의 정신이 살아있는 닭실마을, 천주교 교리를 실천한 최초의 천주교도 홍유한을 기리는 우곡성지 또한 문수산 자락에 있으니 문수산이야말로 유교, 불교, 천주교를 아우르는 봉화의 진산이라 할 수 있다.

‘사람은 가끔 마음을 주지만 소는 언제나 전부를 바친다’라는 표제어로 우리의 심금을 울렸던 영화 ‘워낭소리’ 촬영지도 봉화에 있고, 명호면 비나리 마을에는 아직도 찰밥과 신선한 채소로 생일상을 차려 소 생일을 챙기는 전통이 살아있다.

바래미 전통마을(해저마을, 옛날 이 지역이 바다 밑에 있었는지 논이나 구덩이에서 조개의 패총이 자주 발견된다)은 의성김씨의 집성촌인데, 일제강점기 독립운동의 주요무대였다. 윗마을의 만회고택(晩悔古宅)은 3·1 독립운동 후 심산 김창숙이 유생들과 함께 ‘독립청원서’를 작성한 곳이기도 하다.

춘향전의 등장인물인 이몽룡은 봉화에서 살았던 성이성(成以性)이란 실제인물을 주인공으로 하고 있다는 주장이 있다. 그가 살았던 생가가 물야면 가평리에 계서당(溪西堂 )으로 복원되어 있다.

경주 양동마을, 안동의 내앞마을, 풍산의 하회마을과 함께 삼남 4대 길지라는 닭실마을은 금계포란형(金鷄抱卵形)으로 자손이 번창하고 학자가 많이 배출되는 곳이라 한다. 권충재의 청암정이나 종택을 둘러보면 좋은 추억이 될 것이다. 마을 앞 내성천의 물길은 태극형이고, 고개를 들면 멀리 문수산에는 춘양목이 빽빽하게 우거져 솔향이 코를 자극한다.

봉화는 축제의 고장이다. 그래서 띠띠미마을의 산수유축제, 닭실마을의 한국과자축제, 은어축제, 가재잡이축제, 봉성면 돼지숯불구이축제, 송이축제 등이 철마다 열린다. 그래서 봉화야말로 인문학에 관심 있는 사람에서부터 느린 삶을 실천해보고 싶은 사람, 심신의 휴양을 원하는 사람, 환경운동을 하는 사람들에 이르기까지 반드시 답사해야 할 곳이 된다. 그리고 문수산에 ‘백두대간 수목원’이 완공되면 ‘호랑이 숲’을 조성하여 백두산 호랑이를 방사할 계획을 가지고 있다 하니 머지않아 우리 산하에서 호랑이 울음소리를 들을 수 있게 될 것이다. 기대가 된다.

◆춘양목과 간벌(間伐, Thinning)

간벌은 삼림을 가꾸는 방법 중의 하나이다. 나무를 심은 후 10년에서 20년 사이에 주변상황을 살펴 솎아내는 것을 간벌이라 하는데, 삼림의 보호와 육성을 위해 반드시 필요하다. 빽빽한(울폐된) 나무를 잘라내어 나무의 밀도를 조절하면 나무가 지름생장을 하여 이용가치가 향상된다. 간벌은 나무 상호 간의 경쟁을 완화시키고, 알맞은 생육공간을 제공하여 우량한 목재를 생산하는 데 반드시 필요한 조치이다. 그런데 우리는 일제강점기와 6·25전쟁을 겪으면서 황폐화된 국토의 녹화에만 관심이 있었고, 목재를 얻기 위한 간벌은 생각도 할 수 없는 형편이었다. 우리나라의 삼림정책은 단기간에 삼림을 녹화시키는데 있어서 세계적으로 성공한 모범사례가 되지만, 올바른 간벌을 하지 않아서 정작 필요한 우량목재생산을 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지난 50여 년 동안 무분별한 식재로 계획적인 숲 가꾸기를 하지 못하여 삼림의 혜택을 충분히 누리지 못하고 있는 게 작금의 실정이다.

금강송(金剛松) 혹은 황장목(黃腸木)이라 불리는 춘양목도 사정은 같다. 해송과는 달리 내륙에서 자라는 육송중의 하나로 하늘을 향해 곧게 자라는 붉은빛을 띠는 적송인 춘양목은 건축용 목재로는 최상급이다. 나무 속이 진한 황갈색을 띠고 있어 황장목이라 불리듯 은은한 붉은빛은 벽사의 의미가 있다. 춘양목은 목재가 단단하고, 썩지 않고, 소나무 향기가 오랫동안 진하게 풍기고, 대패질을 하면 윤기가 흘러 궁궐이나 관아를 짓던 목재다. 그래서 일제강점기에는 일본으로 춘양목을 반출하기 위해 춘양을 의도적으로 개발하였다. 당시 문수산, 청옥산 주변의 춘양목을 벌채하여 내성천에 뗏목으로 띄워 안동에서 건져 매매되었는데, 일반 소나무를 춘양목이라 우겨서 파는 일이 자주 일어나서 ‘억지춘양’이란 말도 생겨난 것으로 보인다(‘억지춘양’이란 말은 춘향이가 변사또의 억지 수청을 거부한 데서 유래되었기에 ‘억지춘향’이 올바르다는 설도 있고, 영주에서 강릉에 이르는 영동선 철로개통 시 지역의 국회의원에 의해 철로가 억지로 춘양면으로 우회된 데서 ‘억지춘양’이란 말이 유래한다는 주장도 있다). 국어사전에는 ‘억지춘향’이란 말이 등재되어 있고, ‘어떤 일을 순리대로 하지 않고 억지로 하거나 어떤 일이 억지로 겨우 이루어지는 경우’를 뜻한다.

최고의 목재인 춘양목은 일제강점기와 6·25전쟁을 거치면서 남벌되었고, 지금은 수령이 50년 정도 된 ‘반백이’만 남아있다(건축용 목재로 쓰이는 춘양목은 일반적으로 100년 이상이 된 ‘올백이’를 사용한다). 그런데 더욱 심각한 것은 간벌을 하지 않아 춘양목도 목재로 사용하기에 부적합한 상태라는 것이다(문화재 보수용으로 간벌지역이 있으나 일부에 불과하다).

숲을 가꾸는 목적은 수자원 보전이나 환경보존, 목재사용이지 버섯이나 산나물을 채취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숲의 홍수조절이나 정수기능, 대기정화기능, 휴양, 치유의 효과를 돈으로 환산하면 한 해에 100조원이 넘는다고 한다. 한국의 삼림이 아직 육성기간이 짧지만 이제는 100년을 내다보는 숲 가꾸기에 관심을 가져야 하고, 균형 있고 계획적인 삼림 육성을 위해서 반드시 필요한 것이 간벌이다.

‘춘양목 솔향기길’로 부르는 외씨버선길 제9구간은 초입에서 만산고택과 권진사댁을 지나게 된다. 고택 여기저기에 붙은 춘첩이나 현판, 주련을 읽으며 묵향에 취하기도 하고, 꼿꼿한 선비의 숨결을 느낄 수도 있다. 이 길은 춘양목 솔향기와 함께 마음이 편안해지고, 자연이 주는 느긋하고 풍성한 여유가 여름하늘의 구름처럼 피어오르는 구간이다.
대구 능인중 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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