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산책] 죽은 시인과의 만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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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4-09-16 08:03  |  수정 2014-09-16 08:03  |  발행일 2014-09-16 제22면
[문화산책] 죽은 시인과의 만남

고등학교 동아리 행사 뒤풀이에서였다. 어느 졸업생 선배가 후배들에게 ‘한 말씀’ 하시면서 “김수영과 ○○○의 시를 읽으면 아프다. 너희도 한번 읽어봐. 교과서에 실린 시가 전부는 아니야”라고 했다. 요즘은 김수영의 시가 교과서에도 실려 있지만, 당시 고등학생들에게는 낯선 이름이었다. 그때 선배가 함께 거론한 시인의 이름은 알아듣지 못했다. 추측컨대 신동엽이 아니었을까.

동네 서점에 김수영 시집은 없었다. 대신 15인 시선집 ‘주머니 속의 시’에서 그의 시를 몇 편 찾을 수 있었다. 그 후 ‘학원서림’인지 ‘대구서적’인지 중앙로에 있던 큰 책방에서 김수영 시집 ‘거대한 뿌리’를 만날 수 있었다. 그의 시는 선배가 말한 대로 아프기도 했고, 때로는 후련하기도 했으나, 대부분은 도대체 무슨 말인지 당혹스러웠다.

그렇게 시작된 죽은 시인과의 만남은 몇 년 뒤 출간된 그의 산문전집을 통해 좀 더 깊어졌다. 무릇 모든 만남이 그러하듯 이 만남도 뜨거워졌다 식기를 반복했다. 열렬할 때는 주변 사람들로부터 “또 김수영 이야기냐”는 핀잔을 듣기도 했고, 냉랭할 때는 김수영뿐만 아니라 아예 시와는 담을 쌓기도 했다. 그러는 동안 나도 모르는 사이에 그의 시들이 내 속으로 들어와 자리를 잡았다. 그의 시대와 나의 시대가 겹쳐졌고, 그의 경험과 나의 경험이 예상치 못한 교차로에서 만나기도 했다.

어느 철학자가 쓴 책에서 김수영의 ‘어느날 고궁을 나오면서’에 대해 “내가 보기에 이것은 자기 연민으로 가득한 사사로운 넋두리에 지나지 않습니다”라고 평가한 구절을 읽은 적이 있다. “진리는 오직 생각 속에서 계시된다”고 주장한 철학자가 “시작(詩作)은 온몸으로 동시에 밀고 나가는 것”이라고 말하는 시인을 만나면 이럴 수도 있겠거니 했다. 그렇지만 나에게 그 시는 비겁한 내 모습을 그대로 비춰주는 거울이었으며, 희한하게도 그 부끄러움은 캄캄한 터널을 견디는 힘이 되었다.

보름 전쯤 서울에 갔다가 도봉구 방학동에 있는 김수영 문학관에 들렀다. 특별한 감흥을 기대한 것은 아니었지만, 둘러보는 내내 스스로가 이상하게 느껴질 만큼 담담했다. 내가 김수영이 살아보지 못한 나이이기 때문일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지금도 그 이유가 궁금하다. 언젠가 그 답을 알게 될 날도 올 것이다. ‘사랑의 변주곡’ 한 구절이 문득 떠오른다. “복사씨와 살구씨가/한번은 이렇게/사랑에 미쳐 날뛸 날이 올 거다!”김광재<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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