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군 강제위안부 할머니의 ‘주치의’ 곽동협 곽병원 원장

  • 박진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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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4-10-17   |  발행일 2014-10-17 제37면   |  수정 2015-01-30
“할매요, 살아계시는 동안엔 일본사람들한테 절대 용서 안한다고 하이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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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동협 곽병원 원장이 병원 내 1층에 있는 역사관 앞에 앉아 곽병원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다.


곽병원은 대구의 대표적인 사립종합병원이다. 6·25전쟁이 소강상태에 접어든 1952년 봄, 대구시 중구 수동에 위치한 한옥에서 ‘곽외과 의원’으로 출발해 83년 종합병원으로 승격했다.

곽병원은 대구지역 종합병원 가운데 동산의료원, 경북대병원 다음으로 오랜 역사를 자랑한다. 설립자인 곽예순 박사는 생전 의료봉사사업과, 장학사업, 문화사업, 노인복지사업 등을 펼쳐 지역민에게 존경을 받았다. 곽동협 곽병원장(57)은 설립자의 셋째 아들이다. 그는 곽병원 내과 과장으로 출발해 선친이 일군 병원을 15년째 무리 없이 잘 경영하고 있다. 창업보다 수성이 어렵다는 말이 무색하다.

곽 원장은 지난 8월, 강제위안부역사관(대구시 중구 서문로) 터잡기 행사에서 3천만원을 희사하기도 하는 등 강제위안부 할머니에게 특별한 관심과 사랑을 쏟고 있다. 그는 지금까지 19년간 19명의 피해 할머니를 보살펴왔다. 그 사이 14명의 할머니가 세상을 떠났다. 지금도 곽병원 병실에는 피해 할머니가 입원하고 있다.

피해 할머니의 법률적 대부가 최봉태 변호사라면, 곽 원장은 피해 할머니의 주치의로서 대모인 셈이다. 이 밖에 장애인과 저소득층 무료진료에도 앞장서고 있다. 곽 원장은 2009년, 세계 3대 인명사전 중 하나인 영국 케임브리지 국제인명센터로부터 ‘세계 100대 의학자’로 선정되기도 할 만큼 뛰어난 내과의사이기도 하다. 대학시절에는 메디컬사운드(경북대 의대 보컬그룹)의 리드기타 멤버로 활약했으며 지금은 아마추어 마라토너이기도 하다. 얼마 전 그를 만났다. 미소가 해맑고, 유머와 위트도 넘쳤다.

-핼쑥해 보인다.

“그런가. 마라톤을 시작하고부터 군살이 없어져 그렇게 보일 거다. 진료를 받으러 온 환자들이 종종 나에게 ‘무슨 병이 있느냐’고 물어 진료실에 마라톤완주기록증과 사진을 붙여놓았다.”(웃음)

-언제, 어떤 계기로 마라톤을 하게 됐나.

“몸무게가 80㎏이나 나갈 만큼 고도비만인 때가 있었다. 스트레스와 폭탄주 등으로 몸 관리를 제대로 못했다. 그래서 2004년 7월부터 체중감량과 건강회복을 목표로 달리기를 시작했다. 처음에는 2㎞도 뛸 수 없었다. 그때 무척 더웠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가만히 있어도 숨을 헐떡거릴 만큼 힘들었다. 지금까지 18㎏을 감량했다.

-마라톤은 어떤 운동인가.

“스트레스 해소와 건강에 좋은 보약이다. 사람들은 마라톤을 인생에 비유하는데, 마라톤을 통해 인생 사는 법을 배우고 있다. 긴 거리를 달리는 동안 힘든 고비가 수시로 찾아오듯이 인생사에서도 어렵고 극복하기 힘든 일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사라지길 반복한다. 하지만 포기하지 않고 완주하면 그 환희는 자신의 몫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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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동협 원장은 마라톤 마니아다. 한 마라톤대회에서 힘차게 골인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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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동협 원장은 경북대 의대 재학 시절 ‘메디컬사운드’ 멤버로 활약했다. 2년 전엔 그룹사운드 ‘목요인생’을 만들어 리드기타로 활동하고 있다.

-마라톤대회에 나간 적은 있나.

“물론이다. 동아일보마라톤, 서울중앙마라톤, 대구마라톤대회 등 여러 대회에 출전했다. 풀코스를 뛴 것만도 통산 50차례 정도 된다. 50대 초반일 때 최고기록이 3시간15분이었다. 시속 13㎞로 뛰었다는 계산이 나온다. 지금도 일주일에 여섯 번은 뛰는데 총 거리가 60~70㎞는 될 거다.”

-대단하다. 주로 어디에서 연습을 하나.

“신천이나 금호강, 두류공원 등지에서 뛴다.”

-주제를 바꿔보자. 강제위안부 할머니의 대모라 불릴 만큼 피해 할머니의 건강을 보살펴 오고 있다. 피해 할머니에게 관심을 갖게 된 계기는 무엇인가.

”광복 50주년이 되던 1995년 8월15일, 대구여성회의 주선으로 피해 할머니 무료진료를 맡으면서부터 인연을 맺었다. 역사적으로 할머니들의 피해 사실을 접하면서 누군가는 그분들의 건강을 보살피고 책임져야 한다는 생각을 가졌다. 당연히 해야 할 일이라고 여겼다. 97년 안이정선 전 대구여성회 대표, 김영호 경북대 교수, 최봉태 변호사 등과 함께 ‘정신대 할머니와 함께하는 시민모임’을 만들었다. 대표를 8년쯤 한 것 같다.”

-지금도 일본은 강제위안부문제 해결에 성의를 보이지 않고 있다.

“일본은 태평양전쟁 당시 식민지배에 대해 공식적으로 사죄하는 뜻을 표명한 93년 고노담화에 이어 95년 무라야마담화를 발표했다. 당시만 해도 그 담화는 강제위안부문제에 대한 ‘물타기’라고 성토했는데 지금은 오히려 그 담화를 우리 쪽에서 사수하는 입장이 됐다. 강제위안부문제 해결을 두고 매년 되풀이되는 일본의 부인과 변명에 짜증이 날 지경이다. 강제위안부는 일본정부와 군부 등 국가권력이 관여해 제도화한 것이다. 8만~20만명의 대규모 여성을 강제동원을 거쳐 이송했으며 고문과 강간, 살인을 저지르고 성노예화했다.”

인터뷰 도중 대구에 사는 이용수 강제위안부 할머니로부터 전화가 왔다. 할머니는 일본의 교도통신과 인터뷰를 앞두고 곽 원장과 상의를 할 요량으로 전화를 했다.

곽 원장은 “할매가 살아계시는 동안에는 결코 용서해선 안 된다고 하소”라고 주문했다.

-‘정신대 할머니와 함께하는 시민모임’ 대표 이외에 다른 일도 맡았던데 주로 어떤 역할을 했나.

“2001년 일제하 강제동원 진상규명 특별법추진위 공동대표와 일본의 과거청산요구국제연대협의회 한국대표를 맡았다. 일제강제징용피해자의 야스쿠니신사 합사를 반대하기 위해 신사 앞에서 시위를 하다 일본의 우익과 충돌해 맞아 죽을 뻔했던 일도 있다. 일본에선 집회신고를 하고 허가가 나야 하는데 허가를 받지 않은 시위였다. 2004년 5월20일 조국분단 이후 북한의 강제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를 처음으로 모신 기억도 있다. 지금은 새로운 활동가가 나타나 열심히 하고 있어 난 진료에 집중하고 있다. 현재 피해 할머니 다섯 분이 생존해 있는데 세 분이 우리 병원에 입원해 계신다. 처음 대구에서 의뢰받은 분은 7명이었는데, 캄보디아의 훈 할머니를 비롯해 중국에 계시다가 온 분 등이 찾아와 검진을 했다.”

곽동협과 강제위안부할머니
“부당하게 피해 입은 할머니들
누군가는 보살피고 책임져야”
97년 시민모임 결성, 대표 맡아
일본 신사 앞에서 시위 벌이고
역사관 터잡기 행사 거액 희사
19년간 19명의 할머니 극진진료

곽동협과 마라톤
한때는 몸무게 80㎏ 고도비만
10년 전부터 살 빼려 러닝 실천
이젠 풀코스 뛴 것만 50차례
마라톤 하면서 인생의미 배워

곽동협과 병원
“어렸을 땐 공과대학에 관심
부모 권유로 再修 끝 의대行”
병원장이지만 다른 의사보다
더 많은 환자 진료하려 노력
IMF 환란 때도 정리해고 안해

-선친이 생존했을 때 강제위안부 관련 시민사회단체를 만들고 활동했다. 무슨 말씀을 하던가.

“잘한다고 격려해 주셨다. 사실 아버님이 훌륭한 일을 훨씬 많이 하셨다.”

-원래 의사가 되는 게 꿈이었나.

“아니다. 공대 쪽에 관심이 있었다. 부모님께서 의대에 진학하길 권유했는데, 재수까지 해서 의대에 갔다. 지금 생각하니 부모님 말씀을 잘 들었다는 생각이 든다.”(웃음)

-세계 100대 의사에 선정되기도 했던데.

“소화기내과가 전공인데 사회봉사점수가 높았던 덕분인 것 같다. 골드메달을 받았다. 다 직원들의 공로다. 병원에선 다른 과장들보다 환자를 더 많이 보려고 노력한다. 솔선수범해야 하지 않나. 또 우리 병원이 수련병원이다 보니 교육과 연구도 지속적으로 해야 한다.”

-선친은 어떤 분이었나.

“한마디로 슈퍼맨이었다. 자식에게 약한 모습이나 허점을 조금도 보이지 않으셨다. 판단이나 결정도 늘 옳았다. 수도산 근처에서 살았는데 이곳 병원까지 매일 걸어 다녔다. 병원 1층에 우리 병원의 역사를 알 수 있는 전시관이 있다. 선친은 특별히 임란의병장이었던 망우당 할아버지를 선양하는 데 많은 기여를 했다. 선친의 유업을 따라 임란호국 영남충의단보존회 이사장을 맡고 있다.”

-2대에 걸쳐 병원을 경영하고 있다. 확장 계획은 없나. 또 곽병원의 특징은 무엇인가.

“병원을 확장하면 국가적으로 고용창출에 도움이 되겠지만 병원이 크다고 수익성이 높은 건 아니다. 우리 병원은 직원의 이직률이 적고, 주인의식이 강하다. 대구 중심에 있어 접근하기에도 편리하다. ‘환자를 내 가족같이’ ‘남의 말 좋게 하자’는 말의 원류가 우리 병원이다. 형편이 어려운 가정이나 다문화가정을 선별해 무료진료도 한다. 또 계절마다 문화행사 등을 한다. 특히 명절이나 연말연시에는 환자와 그 가족을 위해 특별행사도 자주 갖는다. 2009년 1월2일 간호부에서 세족식을 하자는 제의가 들어왔다. 얼마나 고마운가. 어린이날과 어버이날 행사는 1992년 내가 병원에 오기 전부터 한 행사다. 곽병원 직원들은 어려운 이웃과 환자에게 베풀고 나누는 일을 28년째 계속하고 있다. 전 직원 300여명이 ‘곽병원 봉사단’이란 이름 아래 4개의 소모임으로 나눠 봉사활동을 펼치고 있다. 직원들이 자랑스럽다.”

-병원에서 특히 강조하는 것은 무엇인가.

“4대 경영방침이 친절·신속·청결·저렴이다. 선친은 당시 병원에 친절이란 개념이 없던 시절에 따로 친절교육팀까지 만들 정도로 친절에 신경을 썼다. 친절교육팀장이 대구지역 병원을 순회하면서 친절교육을 하기도 했다. 신속은 병실 회전율인데 다른 종합병원에 비해 대기시간이 훨씬 짧다. 또한 특진료가 없고, 각종 검사비도 비슷한 규모의 다른 병원에 비해 저렴하다. 비급여항목개발도 지양한다.”

-병원을 경영하면서 힘들 때는 없었나.

“힘들지 않은 때가 있나.(웃음) IMF 외환위기 당시 직원의 월급을 동결했으나 한 명의 직원도 내보내지 않았다. 그땐 힘들다고 생각했는데 무난히 극복했다.”

-직원들과 소통은 어떻게 하나.

“매주 화요일 오전 7시50분에 300여명의 전 직원이 문화공간에 모여 40분 정도 소통의 시간을 갖는다. 30년 가까이 진행하고 있는 행사다. 예컨대 세탁실 직원과 간호부 직원이 만날 일이 좀처럼 없는데 우리 병원에선 그렇지 않다. 행정부, 간호부, 의료부 직원이 돌아가면서 근무 애로사항이나 개선할 점을 제시한다. 어떨 땐 외부강사를 초빙해 문화행사를 갖는다.”

-음악을 좋아한다고 들었다.

“하하하. 고등학교 1학년 때 서울에서 공부하던 누나가 방학 때 통기타를 들고 집에 왔다. 호기심에 기타교본을 보면서 독학으로 기타를 치게 됐다. 기타에 심취하는 바람에 나중에 부모님께서 기타를 가져가버렸다. 대학에 입학하고 나니 기타를 주시더라. 경북대 의대 ‘메디컬사운드’ 5기로 리드기타를 맡았다. 78년 예과 2학년 때 자작곡 ‘우산이 없네’로 MBC대학가요제 본선엔 진출했으나 입상엔 실패했다. 고학년이 되고 병원에 오고 난 뒤엔 기타를 칠 여유가 없었다. 2004년부터 조금씩 치다가 2012년 6월 고교 동기, 의대 동기 선후배 등과 함께 옛 동료와 밴드를 재건했다. 목요일에 모여 연습을 한다고 해서 ‘목요인생’이라고 이름 지었다. 1~2주일에 한 번 정도 연습을 하는데 현재 밴드마스터다. 70년대 록음악을 주로 하고 있다. 발표회를 할까 말까 고민하고 있다.”

-수필도 잘 쓰더라.

“과찬이다. 83년부터 ‘곽병원 소식지’가 발행되고 있는데 오랫동안 권두언을 쓰면서 익숙해진 거다.”

글·사진=박진관기자 pajika@yeongnam.com

◆곽동협 원장

1984: 경북대 의대 졸업 / 1996: 경북대 의대 대학원 박사 / 1992: 곽병원 내과 과장 / 1999: 곽병원 병원장 / 2004: 의료법인 운경의료재단 이사장 / 1997: 여성권익 디딤돌상 수상 / 2001: 정신대 할머니와 함께하는 시민모임대표 / 2001: 일제하 강제동원진상규명특별법추진위 공동대표/ 2009: 세계 100대의료인 선정(IB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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