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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가 김락의 생가 백하구려. 안동시 임하면 천전리(내앞마을)에 있으며, ‘백하’는 독립운동가이자 김락의 큰오빠인 김대락의 호이다. 안동지역 애국계몽운동의 요람인 협동학교 교사로 활용되었고, 6명의 독립유공 포상자가 나온 유서 깊은 집이다. 현재 국가보훈처의 현충시설로 지정되어 있다. |
1910년 8월29일.
왜국(倭國)에 강제로 나라를 빼앗긴 날. 임금도 집을 잃어 갈 곳 없는 신세가 됐는데 백성의 설움이야 오죽했으랴.
그러나 그날도 여느 해나 다름없이 우리 산천에는 곡식이 무르익고 온갖 풀이 지천에 깔렸다.
퇴계이황의 후손인 진성이씨 집안이 문중을 이뤄 사는 안동 하계마을에도 늦여름의 노곤한 날씨 속에 집 뜰마다 백일홍이 붉은빛을 더해가고 있었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해 우리 산하에 널려 있던 풀과 꽃들을 ‘망초(亡草)’라 불렀다.
30년 전 이 마을에 시집온 김락 여사(1862년 12월2일~1929년 2월12일)의 시댁에도 맨드라미와 봉숭아, 채송화가 한창이었다. 슬픈 날. 김 여사는 갑자기 돌아가신 엄마가 그리워졌다.
어머니(朴周·1824~77)는 4남3녀 중 막내딸로 태어난 그녀를 금지옥엽으로 키웠다. 그러던 어머니가 자신이 15세 되던 해 갑자기 돌아가셨다. 그날도 오늘처럼 하늘이 무너져 내리는 것 같았다. 어린시절은 참으로 근심걱정이 없었고 행복했다. 아버지(金鎭麟·1825~95)가 감사를 보좌하는 도사(都事)라는 종5품 벼슬을 지내 마을(안동시 임하면 내앞마을) 사람들은 그녀의 집을 ‘도사댁’이라 불렀다. 어린 시절 자신을 보살펴주던 노비만 해도 수십명이 되었던 것으로 기억난다.(그녀가 여섯살 되던 해의 호구단자를 보면 솔거노비와 외거노비 30여명이 기록되어 있다. 이들 노비 상당수가 일직·선산·풍기·순흥에 거주했던 것으로 보아 여러 지역에 토지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18세 되던 해 하계마을 향산 이만도 어르신의 맏아들인 이중업에게로 시집와 지금까지 살고 있다.
일제 혹독한 고문에 두 눈 잃고
11년간 한맺힌 절규와 몸부림…
안동선 그녀 일생 그린 작품들 공연
단식으로 투쟁한 시아버지 이만도 등
兩家서 위훈 추서받은 독립지사 26명
#1. 시아버지 향산 이만도의 단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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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시 안막동에 있는 김락의 시댁 향산고택. ‘향산’은 일제에 저항하며 단식 순국한 김락의 시아버지 이만도의 호이다. 안동시 도산면 토계리에 있었지만 안동댐 건설로 현 위치로 옮겨왔다. |
일제는 주권탈취와 동시에 식민 지배 체제를 강화시키기 위해 전국을 공포분위기로 몰고 갔다.
하루하루를 살얼음 걷듯 조심조심 살던 김락 여사의 시댁에도 암운이 드리워지고 있었다. 나라를 잃은 지 20일쯤 지난 9월17일 시아버지가 집에는 알리지 않고 봉화군 재산면 동면리 바드골 골짜기 선영묘막에서 단식을 시작한 것이다. 당대 최고의 선비로 불리던 69세 시어른의 단식소식은 청천벽력이었다.
시숙부인 이만규, 남편과 함께 묘막으로 달려가 단식을 말렸지만 시아버지의 고집을 꺾을 수 없었다. 겨우 단식 장소만 큰집인 청구동(지금의 안동시 예안면 인계리)으로 옮길 수 있었다.
단식 현장엔 시어른의 친지들과 제자들의 방문이 이어졌다. 모두가 울면서 단식을 만류했지만 시어른은 자신의 뜻을 굽히지 않았다. 단식현장에서 집안 맏며느리 역할을 해야 하는 그녀에겐 피가 마르는 고통이었다. 단식은 하고 있지만 시아버지 밥상을 차리지 않을 수 없었다. 시어른이 굶는다고 손님들마저 굶길 수도 없었다. 그녀 스스로도 집안을 추스르기 위해서 먹어야 했다. 시어른은 단식하면서도 방문객을 일일이 만나 대화하며 결코 동요하지 않았다. 제자들에게는 경학을 강의했으며, 자신의 사후 장사 문제까지 유언했다. 어린 손자들에게는 다정하게 손을 잡고 유학 원리를 강의했다. 그렇게 단식을 이어가던 시어른은 24일째 되던 10월10일 순국했다.
이만도는 그의 단식과정을 지켜보고 주변사람들이 기록한 청구일기(靑丘日記)에서 “나는 국가의 두터운 은혜를 입었다. 그러나 을미년 국모시해 사건에 한 차례 죽지를 못했고, 을사조약 때 둘째로 죽지 못했다. 산으로 들어가 구차스럽게 생명을 연장했던 것은 오히려 기다림이 있어서였다. 이제는 희망이 끊어졌다. 죽지 않고 할 일이 무엇이겠는가”라고 말했다.
청구일기 기록처럼 이만도는 1895년 명성황후 시해 사건이 발생하고 곧바로 단발령 조치가 내려지자 한 해 뒤인 96년 1월 ‘예안(선성)의병’을 일으켰다. 1월13일 발송된 ‘예안통문’(예안지역 223명의 이름으로 작성)의 주창자 가운데 대표인물이 그였다. 시아버지의 동생인 이만규와 33세였던 남편 이중업도 의병활동에 참여했다. 당시 상주 함창에 일본군 병참부대가 주둔하고 있었는데 이만도를 주축으로 하는 예안의병이 이 부대를 공격했다. 일본군은 이에 대한 분풀이로 안동을 집중적으로 공격했다. 그해 4월2일 안동시가지는 일본군에 의해 불태워지고 5월에 들어서는 퇴계종가와 청량산 오산당, 의병소가 있던 온혜 삼백당이 불탔다. 이만도는 1905년 11월 을사오적을 처단하라는 상소를 올린 후 일원산에 들어가 산나물로 목숨을 이어갔다.
#2. 오빠와 언니 집안도 만주땅으로 이주
시아버지의 장례를 치른 얼마 뒤 이번엔 그녀의 친정집에서 충격적인 소식이 들렸다.
당시 67세의 노인으로 아버지 같은 존재였던 큰오빠 김대락이 동생들과 조카들을 이끌고 만주 땅으로 망명길에 오른 것이다. 언니네도 이 망명길에 동행했다. 큰 형부 이상룡(대한민국임시정부 초대 국무령)이 법흥동과 도곡의 고성이씨 문중 30여 가구와 함께 압록강 너머 만주로 향했다.
안동대 김희곤 교수는 “김 여사의 큰오빠와 큰 형부네 가족·친족이 1910년 12월말부터 이듬해 3월까지 안동을 출발하여 압록강 너머 남만주로 갔다. 추풍령이나 김천까지 남자는 걷고 여자를 수레를 타고서 길을 갔다. 그곳에서 경부선 열차를 이용해 의주로 이동하고, 압록강을 건너 유하현 삼원포로 갔다”고 밝혔다.
그녀의 친정집 가족은 만주에 도착하자마자 경학사(耕學社)를 조직하여 독립운동기지를 건설하기 위한 근거지를 확보해 나갔다.
엄동설한에 친정의 모든 가족이 가산을 정리해 만주땅으로 떠나는 것을 지켜봤을 김 여사의 기막힌 심정은 누구도 헤아리기 힘들 것이다.
#3. 남편, 아들, 사위들도 독립운동에 투신
시아버지가 단식으로 순국하고 친정집 일가친척들이 만주로 떠난 뒤에도 그녀의 집은 바람 잘 날이 없었다.
남편 이중업과 아들, 사위들이 본격적으로 항일운동에 뛰어든 것이다.
이중업은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민비가 시해되자 아버지와 함께 의병활동에 참여했으며, 1914년 들어 그때 지은 당교격문(唐橋檄文·유림들의 의거를 호소한 내용)을 안동·봉화 장터에 돌리며 일제에 도전했다. 그는 그 후 김창숙(金昌淑) 등과 함께 파리강화회의에 제출할 장서서명운동에 적극 참여하기도 했다. 이중업은 1920년 한국 유림대표로서 중국군벌 손문(孫文)과 오패부(吳佩孚)에게 보내는 독립청원서를 가지고 출국하기로 했지만 출국 직전 병으로 죽는다.
20대 후반에 접어든 맏아들 이동흠(李東欽)도 항일투쟁에 뛰어들었다. 그는 1917년 무렵 대한광복회에 들어가 독립운동 자금모집 활동을 했다. 대한광복회는 1915년 7월 박상진(朴尙鎭·1884~1921)이 중심이 돼 대구 달성공원에서 비밀리에 결성된 독립운동단체이다. 맏아들이 광복회 활동을 시작한 계기는 광복회 총사령관 박상진을 집안에 숨겨주었던 일에서 비롯됐다. 이동흠은 군자금 모금활동을 하다가 1918년 4월 일본경찰에 체포돼 5개월간 옥고를 치렀다.
1920년대에 접어들면서 그녀는 또다시 두 아들이 일본 경찰에 체포됐다는 소식을 들어야 했다. 1925년 가을, 남편과 함께 파리장서 서명운동을 벌였던 김창숙이 국내에 들어와 각 문중을 순회하며 군자금을 모아 상하이 김구 선생에게 전하는 역할을 하고 있었다. ‘제2차 유림단 의거’로 불리는 이 활동에 맏아들 동흠과 둘째 아들 종흠도 참여하게 됐다. 두 아들은 영양에서 독립자금 모금활동을 하다가 1926년 5월 체포돼 9~10개월 구금됐다가 풀려나게 된다.
그녀의 사위들도 독립운동가 가문의 명예에 누를 끼치지 않았다. 맏사위 김용환(金龍煥·1887~1946)은 학봉 김성일 선생의 종손이었다. 그는 3·1운동 후 만주로 망명을 시도하다 경찰에 발각돼 강제로 귀향 당한 후, 만주 독립군 기지를 지원하던 의용단에 가담했다가 경찰에 붙잡혔다. 이후 김용환은 ‘조선 최대의 파락호’ 소리를 들으며 노름꾼으로 위장해 엄청난 종가 재산을 독립운동에 바친 인물이다. 안동지역 명문가 출신인 둘째 사위 류동저는 1920년 창립된 안동청년회에 참여하여 의연금으로 당시 거금이었던 100원을 기부하는 등 비교적 온건하게 사회운동을 했다.
#4. 일제에 의해 실명당한 후 고통의 나날
1919년 고종황제가 갑자기 별세하자 거족적인 반일기운이 팽배해졌다. 3·1운동 주도자들은 거사일을 고종의 장례식 이틀 전인 3월1일로 잡았다.
독립투사의 아내이며 며느리, 어머니, 장모, 처형이기도 한 김 여사도 만세운동에 뛰어들었다. 안동에서는 3월17일과 22일 예안장터에서 대대적인 독립만세운동이 벌어졌는데 그녀는 이 대열에 참여했다. 조선총독부 경북경찰부가 만든 고등계 형사 지침서인 고등경찰요사(高等警察要史)에는 ‘안동의 양반 이중업의 처는 1919년 소요 당시 수비대에 끌려가 취조받은 결과 실명(失明)했고, 이후 11년 동안 고생한 끝에 1929년 2월 사망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안동청년유도회가 펴낸 ‘민족 위해 살다간 안동의 근대인물’에서 김희곤 교수는 “집안의 전해지는 이야기로는 김락 여사는 이 11년 사이에 두번이나 자결을 시도했다고 한다”고 밝혔다.
두 눈을 잃은 채 남편을 잃었고, 두 아들이 일본경찰에 구금되는 참혹한 일을 당했는데 어떻게 그녀가 제정신으로 살 수 있었겠는가. 그녀의 아들 동흠은 “어머니가 밤낮 일본에 적개심을 잊을 수 없다는 말을 했다”고 전했다. 그녀는 두 아들이 풀려 나온 지 2년 뒤인 1929년 2월12일(음력 1월1일) 눈을 감았다.
김 여사는 독립운동의 공로를 인정받아 2001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받았다. 김 여사의 시가와 친가에서 훈장과 포장 등 위훈을 추서받은 독립지사는 시아버지 이만도를 비롯해 26명에 이른다. 안동에서는 그녀를 기리기 위한 인형극과 뮤지컬을 만들어 공연하고 있다.
글=심충택<영남일보 부설 한국스토리텔링연구원장>
사진=손동욱기자 dingdong@yeongnam.com
▨참고문헌 : 김희곤 안동대학교 인문대학 사학과 교수의 논문과 저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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