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 이주노동자의 수호천사’ 베트남 쩐 티 빅한씨

  • 박진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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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4-10-31   |  발행일 2014-10-31 제36면   |  수정 2015-01-30
‘못된 사장님’은 그녀에게 맡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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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주민노동자의 이모’라고 불리는 베트남 여성 쩐 티 빅한씨가 대구이주민선교센터에서 베트남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다.


“한국 사람은 이름을 알면서도 왜 외국인노동자에게 이름을 부르지 않고 ‘야!’라고 부르는지 이해를 못했어요.”

대구이주민선교센터(대구시 중구 대봉로 39길)에서 일하는 쩐 티 빅한씨(46)는 한국생활 14년째다. 한국어가 유창한 빅한씨는 이곳에서 외국인노동자를 대상으로 예배와 선교, 문화행사, 인권보호, 노동 상담 등을 하고 있다. 선교센터에 오기 전 빅한씨는 한국에서 여러 노동현장을 거쳤다. 거기서 외국인노동자를 차별하는 사업주에 대해 당당하게 맞서 근로조건을 시정하게 하고 동료노동자를 대변해 왔다. 그녀는 4년전 세 살 연하의 한국인 남성과 결혼했다. 베트남 여성 빅한씨의 삶과 사랑은 조금은 특별해 보인다.


러시아 유학파 출신 ‘엘리트’
베트남서 안정된 삶 버리고
2000년 한국에 와 노동자로
숱한 차별대우 속 억척 생활
매일 격무에도 한국어 독파
사업주에 당당히 소신 발언
불합리한 근무여건 개선시켜
산재사고 후 선교센터 근무
동료 외국인 노동자들 대변
남편은 세 살 연하의 한국인


빅한씨는 베트남 중부 후에성 출신이다. 그녀의 아버지는 북베트남 군인으로 중국 유학파 출신이다. 베트남전쟁이 끝난 뒤 국가가 관리하는 자동차회사 사장을 지냈다. 그녀의 아버지는 전쟁고아 1명을 양자로 들여 키울 만큼 따뜻한 마음을 가졌다. 그녀가 중학생이 됐을 때 그녀의 아버지는 후에성 인민위원회 대표가 됐다. 한국으로 본다면 국회의원인 셈이다. 베트남의 상류사회 출신이지만 생활은 풍족하지 못했다. 쌀과 설탕 등 식료품을 비롯해 모든 게 배급제였다. 닭이나 오리, 돼지도 마음대로 잡을 수 없었다. 러시아산 보리와 야콘으로 끼니를 때울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아침식사도 제대로 못하고 학교에 갔지요. 한달에 설탕이 400g 배급됐는데 하루는 설탕을 훔쳐 먹다 어머니에게 들키기도 했어요.”

그녀는 부모로부터 특별한 사랑을 받았다.

“미군병원에서 6삭동이로 태어났어요. 2달반가량 인큐베이터 안에 있었지요. 그래서 발육이 늦어 키가 작았습니다. 5살 때 탁아소에 보내졌는데 하도 울어서 바로 초등학교에 입학을 시켰다고 해요.”

그녀는 후에성 명문인 후에국립고등학교에 입학한다. 생물이나 자연 같은 과목을 좋아해 후에종합대학 생물학과에 진학했다.

“대학에 다니면서 자수나 재봉일 같은 걸 해서 학비를 벌었어요. 전쟁 후라 베트남의 경제사정이 아주 나빴지요.”

빅한씨는 성적이 우수한 데다 혁명열사 가족이라 3학년 때 국비유학생으로 러시아의 상트페테르부르크 국립대학교에 유학을 간다.

“3년간 기숙사에서 생활을 했어요. 러시아, 중국, 북한, 베트남, 라오스에서 온 학생이 많았지요. 더운 나라에서 살다 영하 45℃나 되는 곳에서 살다보니 처음엔 적응이 잘 안 되었어요. 하지만 다른 친구보다 잘 적응했어요. 빵과 버터, 우유도 잘 먹었답니다.”

그녀는 유학생활 동안 러시아 전역으로 여행을 다녔다. 농장에서 아르바이트로 일하면서 무역도 했다. 상트페테르부르크대학을 졸업할 때 그녀는 러시아에서 모은 돈으로 베트남에서 집을 구입할 정도였다. 빅한씨는 베트남으로 귀국한 뒤 새우양식장회사에 다녔다. 하지만 그녀는 베트남에서의 편안한 생활이 성에 차지 않았다.

“2000년 겨울 베트남에서의 생활을 접고 32세 때 한국에 왔어요. 구미에 있는 한 섬유공장에서 일을 했습니다. 주·야간 교대로 일을 했는데 하루에 19시간이나 일을 할 때도 있었어요. 육체노동을 처음 해봤는데 엄청 힘들었어요. 발이 부어 일주일간 펑펑 울기도 했습니다. 한국의 겨울은 러시아보다 추웠어요. 러시아 기숙사는 내복만 입어도 될 정도로 따뜻했는데 섬유공장 기숙사는 추웠어요.”

그녀는 ‘안녕하세요’라는 말도 모를 만큼 한국말을 전혀 못했다. 점심 식사 때는 30분 동안 줄을 서서 기다리다 시간을 놓쳐 사흘간 식사를 못 할 때도 있었다.

“식권으로 초코파이와 우유, 빵을 교환해 식당에서 한국 사람과 같이 식사를 했어요. 그러면서 점심식사 기다리는 시간을 이용해 한국말을 배웠어요. 일이 끝나도 혼자서 밤에 2시간 정도는 반드시 한국어를 공부했어요.”

공장 일이 너무 힘들어 어떨 때는 회사가 파산하라고 기도까지 할 정도였다. 결국 그 회사는 부도가 났다. 월급 이외에도 집에서 아버지가 그녀에게 돈을 부쳐주었다. 회사 부도 후 대구로 이사와 한달여간 한국 전역을 여행하며 한국말을 배웠다. 그녀는 다시 영천에 있는 섬유공장에 취업했다.

“열심히 일을 했지만 월급은 적었어요. 하루는 회사사장에게 가서 베트남으로 휴가를 가야겠다고 했어요. 처음엔 가지마라고 했는데 보내주더군요. 베트남에 오니 부모님께서 왜 그렇게 사서 고생을 하냐고 하면서 한국에 다시 가지마라고 하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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빅한씨는 다시 한국으로 왔다. 이번엔 벼룩시장을 보고 팔공산에 있는 한 모텔에 취업을 했다.

“처음엔 한국 사람이 왜 집을 놔두고 모텔에서 자는지 이해가 안됐어요. 하지만 그게 아니란 걸 알았어요. 한국의 추한 점을 너무 본다 싶어서 직장을 옮겼어요.”

그녀는 월급도 많고 일도 별로 힘들지 않았지만 팔공산에서의 생활이 탐탁지 않았다.

“다시 성서공단에 있는 커튼공장에서 일하다 2003년 논공에 있는 섬유공장에 취업했어요. 그곳에는 한국인 6명과 베트남 사람 6명 등 총 12명이 일을 했어요. 처음엔 일요일도 일을 시키더라고요. 그래서 사업주에게 고용 계약서를 보여주며 계약과 다르다고 항의했지요. 결국 일요일엔 일을 안 했어요. 또 한국인은 식당에서 식사를 했는데 베트남사람은 밥을 해먹어야 했어요. 그래서 하루는 일을 하지 않고 앉아있었죠. 사장이 왜 일을 안 하냐고 하기에 배가 고파 일을 못 하겠다고 했죠. 사장이 결국 같이 식사를 하게 해줬어요. 또 그 회사의 기숙사가 컨테이너박스인데, 여름엔 엄청 더워 잠을 못 잘 정도였어요. 그래서 꾀를 냈어요. 낮에 회사에서 꼬박꼬박 조는 척을 했어요. 사장이 왜 일은 하지 않고 잠을 자느냐고 하기에 밤에 더워 잠을 잘 수가 없다고 했어요. 만약 사장님이 거기서 잠을 잘 수 있다면 나도 일을 하겠다고 했지요. 결국 에어컨을 달아주더군요. 한국인과 베트남 사람이 저를 보고 ‘왕’이라 그랬어요. 하하.”

빅한씨는 2010년 공장에서 물건을 내리다 산재를 당했다. 그때 현재 남편으로부터 지극한 간호를 받았다.

“2009년에 지금의 남편을 만났어요. 남편은 하양에 있는 병원의 물리치료사였는데, 가끔 베트남노동자가 병원에 갈 때 통역을 하다 만날 수 있었습니다. 남편은 나보다 세 살 적었어요. 베트남여성을 몇 명 소개시켜줬는데 저만 좋다고 해요. 전 사실 결혼할 마음이 전혀 없었어요. 처음엔 장난하는 줄 알았어요. 그런데 진심이라는 거예요. 영천에서 제가 일하는 곳까지 매일 2시간을 달려와 저를 기다릴 정도였어요.”

남편은 부모의 반대를 무릅쓰고 그녀와 결혼을 하기로 마음먹었다. 그 과정에서 시어머니가 결혼을 반대해 쓰러지기까지 했다.

“전 결혼을 하지 않겠다고 버티다 결국 시부모가 참석하지 않은 상태에서 결혼을 했어요. 위장결혼이 아닌가 하면서 경찰조사까지 받았어요. 지금은 부모님께서 잘 해 주시지만 그땐 많이 힘들었어요. 남편에게 헤어지자고 이야기했는데 어림없더라고요.”

빅한씨는 산재사고 이후 지금의 이주민선교센터에서 일을 하고 있다.

“여기도 스트레스가 많아요. 주로 사업주가 전화로 욕부터 하는데 대개는 불법체류에 관한 전화가 많아요. 그럼 저도 ‘불법체류자인 줄 알고 고용을 하면 벌금을 내야 하는 건 알죠’라고 역공을 하지요. 베트남 친구들이 저보고 ‘이주노동자의 이모’라고 해요.”

빅한씨는 이주민노동자가 차별 없이 노동을 하는 세상을 바라고 있다.

글·사진=박진관기자 pajika@yeongn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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