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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양군 석보면 지경리 남자현 여사의 생가. 본채와 부속채, 추모각이 각각 배치되어있고 항일순국비가 세워져 있다. 그녀의 독립운동정신을 기리기 위해 영양군과 후손들이 뜻을 모아 1999년 11월 복원했다. |
1933년 2월29일, 만주에서도 가장 추운 도시인 흑룡강성 하얼빈.
남의 나라에 빼앗긴 산하지만 고향집 양지바른 곳에서는 봄소식이 들릴 만도 한데 꽁꽁 언 송화강변은 을씨년스럽기만 한다. 요 며칠간은 영하 30℃를 오르내리는 맹추위가 계속돼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동상에 걸리는 사람이 속출했다. 콧물마저 얼어버리는 한파였다.
명성황후 시해사건에 대항해 항일 의병활동을 하다 하늘나라로 가버린 남편. 그가 유품으로 남긴 피 묻은 속옷에 누더기 겨울옷 여러 벌을 덕지덕지 껴입은 남자현 여사의 몸도 송화강의 얼음처럼 차디차게 얼어붙어 있었다.
먼 이국땅인 이곳에서 안중근(安重根)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사살한 것을 떠올리며 남 여사는 자나깨나 뇌리에 박혀 있는 말, ‘일제의 심장에 일격을 가하겠다’는 결심을 다시 한번 되새겼다.
한참을 강변에서 서성이던 그녀는 하얼빈역 쪽으로 향했다.
1932년 3월1일 흑룡강성과 길림성, 요령성을 망라하는 중국 동북3성에 괴뢰정권인 만주국을 세운 일본은 하얼빈을 특별시로 지정했다. 불과 20여년 전까지만 해도 강변에 몇 안 되는 어민들이 살던 이 도시의 인구는 어느덧 50만명에 육박하고 있었다.
그녀의 고향인 경상도에서도 많은 동포가 이곳으로 망명하거나 이주했다. 만주의 주요도시인 하얼빈과 장춘, 연길을 중심으로 60만명의 동포가 살고 있다는 얘기를 들었다.
“조선 민족의 결점은 당파와 분쟁이다.” 주변에 사는 중국인들이 하는 말을 그녀는 여러 차례 들었다.
고향을 떠난 동포들은 나라가 망하고 조국 광복 운동을 하면서도 먼 이국 땅에서 이리 갈라지고 저리 갈라졌다. 모두가 어렵게 생계를 이어가다 보니 일본 경찰의 밀정노릇을 하며 지내는 사람도 상당수 있었다. 독립운동 지도자들도 서북파니 기호파니 서로 편이 갈라지고 원수처럼 지내도 누가 나서 화해를 시키지 못했다.
부토를 제거하려다 日 경찰에 체포
“이 모든 것이 일제의 침략 때문이다. 만주국 최고의 권력자인 부토(武藤信義)를 제거하는 것만이 내가 일제의 심장에 일격을 가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이다.” 그녀는 지난달부터 만주국 건국일인 3월1일 행사에 참석할 예정인 만주국 일본전권대사 부토를 제거하기로 하고 차곡차곡 계획을 짰다. 중국인들로부터 권총 1정과 탄환, 폭탄도 사들였다.
그녀는 만주 거리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거지 차림으로 곧 하얼빈역에서 신경(新京·현재의 장춘)으로 떠날 계획이었다. 만주국 건국 행사가 만주국의 수도인 신경에서 열리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무래도 느낌이 이상했다. 아니나 다를까, 하얼빈 교외 정양가(正陽街)를 지나던 중, 일본 경찰이 그녀를 체포했다. 거사를 계획했던 동지 중에서 누가 배신을 한 것이다. 대한제국 독립을 위해 일편단심으로 14년간 동분서주하던 남 여사는 끝내 소원을 이루지 못하고 일본영사관 유치장에 감금되었다.
그 후 감옥에 갇혀 있다 죽기로 결심한 그녀는 단식에 들어갔다. 6개월간 옥중에서 당한 고초의 여독으로 단식 9일 만에 인사불성이 된 그녀를 일제는 보석으로 석방했다.
그녀는 적십자병원에 입원했다가 다시 하얼빈에 있는 여관에 거처했으며, 임종이 다가오고 있음을 스스로 깨달았다. 남 여사는 유복자인 아들에게 중국화폐 248원을 내놓은 뒤 “우리나라가 독립이 되면 독립축하금으로 이 돈을 희사하라”는 유언을 남기고 1933년 8월22일 향년 60세의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훗날 유족은 1946년 3월1일 서울운동장에서 거행된 3·1절 기념식장에서 김구, 이승만에게 이 돈을 전달했다)
1933년 8월27일자 조선중앙일보는 이렇게 보도했다. ‘30년간 만주를 유일한 무대로 조선○○운동에 종사하던 남자현(여자)은 감옥에 구금됐다가 단식 9일 만인 지난 17일 보석 출옥했다. 연일 단식을 계속한 결과 22일 상오에 당지 조선여관에서 영면하였다.”
그녀의 사망소식을 풍문으로 들은 고향사람들의 슬픔은 누구보다도 컸다.
의병인 남편은 왜군과 전투중 전사
그녀는 1872년 12월7일 영양군 지경마을에서 영남의 석학인 부친 남정한(南珽漢)의 3남매 중 막내딸로 태어났다. 부친은 정3품 당상관인 통정대부를 지냈다. 어려서부터 총명해 일곱 살에 이미 한문과 국문을 익히고, 12세에는 소학(小學)과 대학(大學)을 읽었으며 14세에는 사서(四書)를 독파했다고 전해진다.
19세에 결혼했는데 남편은 안동시 일직면 귀미동 출신 김영주(金永周)이다. 의성김씨 가문인 남편은 1896년 의병활동을 하다 왜군과 전투 중 전사했다. 남편이 죽기 전해인 1895년에는 일본 자객들이 경복궁을 습격하여 명성황후를 시해한 을미사변(乙未事變)이 발생해 안동과 영양 등지에서는 의병활동이 활발하게 전개되고 있었다.
남편이 전사하던 당시 그녀는 첫 아이를 임신하고 있었다. 유복자로 태어난 아이가 김성삼(金星三)이다. 그녀는 아이를 기르면서 시부모를 봉양하지 않을 수 없어 양잠을 하며 손수 명주를 짜서 내다 팔아 가계를 이어 나갔다.
안동대 김희곤 교수 등이 펴낸 ‘영양의 독립운동가 열전’이라는 책자를 보면 남자현이 독립운동에 뛰어든 시기는 1919년 3·1운동 전후다. 그녀는 46세 되던 해인 1919년 2월말 고향을 떠나 망명길에 나섰다.
3·1운동이 일어나기 사흘 전인 2월26일, 그녀는 시위운동이 일어난다는 소식을 편지로 받고 상경했고, 연희전문학교 부근에 있던 교회신자들과 더불어 3월1일 오후 3시에 ‘조선선언격문’을 반포하고 시위에 참가했다. 그녀가 서울에서 교회신자들과 독립운동을 함께 한 것을 계기로 만주로 망명한 뒤에도 선교활동이나 교회를 중심으로 교육운동을 펼친 것으로 보인다.
그녀는 서울에서 열흘 정도 생활하다가 3월9일 아들과 함께 압록강을 건너 중국 요령성 통화현에 망명하여 정착하였다. 그곳에서 비밀무장단체인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1919년 5월 만주에서 조직된 무장독립운동단체)에 가입, 군사들의 뒷바라지를 하기 시작하였다. 이때쯤 그녀가 청산리전투에 참여해 독립군을 간호했다는 기록도 있다. 그 뒤 그녀는 활동무대를 북간도로 옮겨 주로 농촌사회를 누비면서 동포들의 단결을 위해 12개의 교회를 건립했다. 이와 함께 여성계몽운동에도 힘써 10여 개의 여자교육회를 설립하여 여성들에게 민족의식을 고취시키는 데 주력하였다.
안창호·김동삼 구명활동에도 앞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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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현은 일제의 만행을 국제사회에 고발하기 위해 왼손 무명지 2절을 잘라 혈서를 써 ‘여자 안중근’으로도 불린다. <일러스트=김성태 화백> |
그녀가 일본총독을 암살하기 위해 채찬(蔡燦) 등과 함께 국내에 잠입해 거사를 추진했다는 이야기도 있지만 1927년 2월말에 터진 ‘길림사건’에서 그녀의 적극적인 활동이 선명하게 드러난다.
길림사건은 상하이 임시정부요인인 안창호 선생을 비롯한 독립운동계의 최고위급 지도자 47명이 중국관헌에게 검거된 사건이다. 안창호는 당시 민족문제 해결을 위해 분화된 이념 차이를 극복하려는 유일당 운동을 펼치고 있었는데, 만주에도 ‘좌우합작’을 독려하기 위해 왔다.
안창호는 길림성 동대문 밖 대동공사에서 김동삼, 오동진 등 독립지도자들과 함께 강연을 하는 기회를 가졌는데, 일본경찰이 길림성 당국에 그 모임을 공산주의자들의 집회라고 속여 이들을 현장에서 구속하도록 요구했다.
이에 우리 임시정부를 비롯해 모든 동포들이 구명운동에 나섰다. 중국은 우리의 항의에 따라 일본의 요구를 무시하고 체포한 인사들을 보석으로 석방하였다. 당시 그녀는 안창호 선생 등 많은 애국지사들이 석방될 때까지 정성껏 옥바라지를 했다.
그녀의 활동이 다시 바깥으로 드러난 것은 만주벌의 호랑이로 불렸던 일송(一松) 김동삼(金東三) 선생이 일본 경찰에 체포되던 때였다. 1931년 10월 일제가 만주사변을 일으켜 요령성뿐만 아니라 길림성에까지 침략의 손길을 뻗치자 김동삼은 길림성을 떠나 하얼빈에 있다가 그곳에서 일본 경찰에게 붙잡혀 투옥되었다. 아무도 김동삼과 접촉을 하지 못하고 있을 때 그녀는 그의 친척으로 위장해 면회허가를 받고 연락책 역할도 했다. 김동삼의 지시내용을 동지들에게 전하고, 비록 실패하긴 했지만 그가 국내에 호송될 때 구출하기 위하여 치밀한 계획을 세우기도 했다.
1932년 3월1일 만주가 완전히 일본에 넘어가자 이를 비난하는 국제여론이 일어났다. 국제연맹은 그해 9월 그 현장을 조사하기 위해 하얼빈에 대표단을 파견했다. 이 소식을 들은 그녀는 대한민국 독립의지를 국제사회에 알릴 수 있는 기회가 왔다고 판단하고 일제의 만행을 조사단에게 직접 호소하기 위해 왼손 무명지 2절을 잘라 흰 천에 ‘한국독립원(韓國獨立願)’이라는 혈서를 쓰고, 이를 영국인인 리튼 국제연맹조사단장에게 보내려 한 일화는 유명하다.
여성 중 유일하게 2등훈장 받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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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가에 있는 추모각. 내부에 남자현의 영정이 모셔져 있다. |
중국문단에서는 ‘혁명의 어머니’, 일제는 ‘전율할 노파’라 부른 남자현 여사의 투쟁은 광복 후 여성단체가 나서서 다시 역사의 무대로 등장했다. 광복 이듬해 8월22일 독립촉성애국부인회가 ‘13년전, 17일 단식으로 옥사한 남자현 여사’를 추모한다는 취지로 추념회를 연 것이다. 1962년 3월1일에는 윤보선 대통령이 그녀에게 독립유공자 건국공로훈장 복장(2등 훈장)을 수여했다. 이 훈장은 모두 58명이 받았는데 신채호, 이봉창도 포함되어 있었다. 여성 중에서는 남자현이 유일했다. 영양 출신 남자현 여사가 한국 여성사에 남긴 족적이 그만큼 선명한 것이다.
글=심충택<영남일보 부설 한국스토리텔링연구원장>
사진=손동욱기자 dingdong@yeongnam.com
▨참고문헌 : 김희곤·강윤정·한준호 저 ‘영양의 독립운동가 열전’
공동기획 : 경상북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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