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오르간 중독자…1년에 딱 하루, 현충일에만 건반을 놓는다

  • 이춘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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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4-11-14   |  발행일 2014-11-14 제34면   |  수정 2014-11-14
20141114
자신의 주특기인 다단 오르간 세트 앞에서 포즈를 취한 나운도. 그는 기존 연주자와 달리 ‘가락리듬’을 고안해 음과 음 사이에 자기만의 절묘한 율조를 넣어준다. 특히 국내에선 처음으로 오르간 전용 DVD를 출시, 후발주자 금잔디와 함께 고속도로 휴게소에서 대박을 내기도 했다.

난 술 대신 ‘음악을 마신다’
대화할 사람도 별로 없다
마지막 獨奏 끝나고 나면
객석은 늘 텅 비어 있다

동촌 카바레서 활동 시절
‘동촌의 손올갠’으로 통해
카바레가 끝내 문을 닫자
‘대구 카바레시대’도 끝나

트로트 서바이벌 프로그램
TOP16에 까지 진출 기염
오르간 연주자의 자존심
다시 증폭시키는 데 일조
이후 각종 행사서 러브콜


동촌카바레는 아양교 근처에 있었다.

‘삼각지 로터리’를 부른 배호도 동촌카바레에서 터전을 잡을 수 있었다. 차효선 악단장이 날 어떻게 알았던지 스카우트 제의를 했다. 내가 재간 있고 독창적으로 오르간을 쳤기 때문에 오르간 파트를 맡겼다.

캄보밴드보다 조금 규모가 작은 9인조 악단이었다. 록그룹과 달리 악단에는 색소폰, 트럼펫, 트롬본이 주요 파트로 깔린다. 나는 독주와 합주를 동시에 했다. 업소가 오픈한 직후 서먹서먹한 객석을 위해 수프 같은 음악을 혼자 연주한다. 무대를 달구고 나면 악단의 연주가 발진된다. 전속가수였던 박수미, 이군천 등의 이름이 지금도 생각난다.

나는 나훈아와 인연이 잦았다. 그는 악단에 꼭 밥값을 주고 갔다. 그래서 인기가 좋았다.

당시엔 가수만 노래를 하지 않았다. 악단 멤버도 노래를 잘 하면 연주 중에 노래를 할 수 있었다. 배호도 원래 가수 출신이 아니고 드러머 출신이다. 오르간을 치는 싱어가 날로 늘어났다. 그냥 오르간만 치는 것보다 노래를 더하면 잘릴 확률이 그만큼 줄어든다.

사람들은 밤무대 연주자도 팬이 있을 거라 여기는데, 그건 일부 전속가수에게만 국한됐다. 우리 같은 악기 연주자는 ‘얼굴 없는 존재’였다. 연주석은 무척 어둡다. 객석에서 보면 악단 멤버의 얼굴이 거의 보이지 않는다. 그땐 이런저런 일거리가 많았다. 극장쇼 무대에서 반주를 많이 해주었다.

동촌카바레 시절에는 오후 5시부터 5시간 일했다. 악단 멤버는 서로 잘 뭉쳐 다녔다. 상당수는 주색잡기에 빠져 제대로 된 삶을 영위하지 못했다. 더 나은 음악에 대한 자각이 부족해서 그런 일이 일어났다고 본다. 오르간 주자는 여느 악단 멤버와 놀러 다닐 시간이 없었다. 자연히 ‘독불장군’이 되었다. 나는 술 대신 음악을 마신다. 대화할 사람도 없다. 마지막 독주가 끝나고 나면 객석은 늘 텅 비어 있다. 악기와 놀다 보니 오르간을 더 깊게 파고들 수 있었다.

◆ 미디가 오르간을 집어삼키다

무서운 놈이 오르간을 향해 달려오고 있었다.

건반 소리 하나밖에 못 내는 ‘수동 오르간 시대’가 지고 있었다. 드럼, 현악기, 금관악기 등 무려 100여가지 악기 소리를 자유자재로 펼쳐보일 수 있는 디지털 오르간 시대가 도래하고 있었다. 더 다양한 기량을 선보여야 살아남을 수 있으니 특수기능을 장착하기 위해 기존 1단에서 5단 이상 다단 오르간 시대로 치닫는다. 1984년 즈음이었다. 나도 다단 오르간 개척자 중 한 명이다. 이 과정에 대전 출신의 백성태 같은 숱한 오르간 스타가 탄생한다.

대구는 국내 밤무대 오르간의 메카였다.

국내 오르간 시장을 폭발적으로 확산시킨 것은 대구시 중구 남산동만의 특출난 음향 인프라 덕분이었다. ‘김기사’로 불렸던 김영국씨, 공박사, 범한전자 등은 개조의 달인이었다. 일본에서 직수입된 오르간은 조작법이 워낙 까다로워 국내 실정에 맞도록 개조해야만 했다. 남산동에만 갖고 오면 리듬박스를 개조해서 국악 리듬까지 장착했다. 전국 오르간 주자가 남산동으로 몰려왔다.

모두 오르간만 찾았다. 다른 악기 연주자는 죽을 맛이었다. 먹고살기 위해 다들 오르간 파트로 이직했다. 업주도 돈 많이 들어가는 악단 대신 오르간 독주자만 불렀다. 90년대로 넘어오면서 ‘악단사망시대’가 선고된다.

동촌카바레에는 7년 정도 있었다. 당시 난 ‘동촌의 손올갠’으로 잘 알려졌다. 하지만 손님에겐 역시 무명. 손님은 취해서 음악적으로 소통할 수도 없었다. 그렇지만 나는 괜찮았다. 난 오르간 중독자였다. 1년에 딱 하루, 현충일만 놀았다. 동촌카바레도 끝내 문을 닫는다. 대구 카바레 시대도 종언을 고한다.

차효선 악단장은 다시 시설이 괜찮은 수성카바레로 간다. 동촌과 수성카바레 주인은 형제간이었다.

악단 오프닝 30분 전 나는 독주를 한다. 특이하게 카바레에선 감상용인 팝송류가 인기 없다. 춤꾼의 스텝을 감동시키려면 사교춤 라인에 어울리는 룸바, 차차차, 탱고 등이 제격이었다. 체리핑크맘보, 베사메무초, 키사스 키사스 키사스 등이 각광을 받았다. 당시엔 핀조명조차 없었다. 백열등 아래서 연주하는 수준이다. 거기서 본 조금은 지쳐있던 패티김, 나훈아, 최무룡 등이 기억난다.

이런 가운데 ‘미디’가 나온다. 다양한 음악 데이터를 하나로 묶을 수 있는 꿈의 디지털 기기였다. 이것만 잘 활용하면 작곡도 맘대로 하고 혼자 교향악단 같은 연주도 가능했다. 그때 D800 야마하 미디 가격은 750만원. 당시 황금아파트 작은 평수가 350여만원. 나는 아파트를 구입하지 않고 그 악기를 샀다. 그런데 지금 그 악기는 50만원 수준.

이어 효목카바레로 옮겨간다. 당시 대구의 대표적 카바레는 동경, 삼일, 동원, 팔팔, 남남, 성당 등이었다. 나는 이미 악단 멤버가 아니었다. 그냥 프리랜서 독주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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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Mnet 트로트 서바이벌 오디션 프로그램인 ‘트로트 X’에서 세미파이널까지 진출, 40여년 무명의 설움을 날릴 수 있었다.

◆ DVD 오르간 독주시대 열다

오르간 주자는 예상외로 단결이 잘 되지 않았다. 왜냐하면 노는 날이 없었기 때문이다. 요즘 색소폰 부는 사람이 지천으로 널렸듯 그때도 좀 한다 싶으면 다 오르간 주자였다. 하지만 실력파는 역시 손에 꼽을 정도였다. 그런 사람만이 최소한 카바레 무대에 설 수 있다.

오르간은 정식 독주교본도 없다. 체계적으로 가르칠 수 있는 곳도 없다. 거의 독학이라서 이론 정립이 잘 안 돼 있다. 이 무대에서 살아남기 위해선 국내 가요사를 관통하는 히트곡을 거의 암보해야 된다. 신곡은 즉시 공부해야 하는데 시간이 없어 연주하면서 익힌다.

효목카바레도 문을 닫는다. 경주로 가서 금강카바레에서 6년 정도 있다가 대구로 와서 효목동에서 개인 녹음실을 운영하면서 잠시 오르간을 쉰다.

녹음실을 운영하는 중에 부산시 서면 뉴월드카바레로 출퇴근했다. 이때 ‘나운도’란 가명을 사용한다. 원래 이 이름은 설운도가 사용하려고 했다.

연주만으로 만족할 수 없었다. 일단 멀티트랙 녹음기를 갖고 4시간짜리 현장녹음 CD를 업소용으로 제작했다. 개당 15만원이었다. 그런데 그게 오히려 독주자의 목을 죄었다. 영세업소에서는 굳이 개런티를 많이 주고 독주연주자를 부를 필요도 없이 그냥 이 CD만 틀었다. 버스 안내양이 사라지듯 오르간 주자도 사라졌다. 누가 막을 수 있는 흐름이 아니었다. ‘오르간 독주음반 시대’가 열린다. 돈이 된다기보다 일종의 ‘과시용’이었다. 그런 음반 하나도 갖고 있지 못하면 업소에 설 수 없었다.

◆ 나만의 색깔의 창법을 찾아가다

7년 전 난생처음 방송과 인연을 맺는다.

모 케이블TV에서 7080 프로그램을 제작해보자는 제의를 받는다. 통기타 가수 등 여러 전문 보컬을 만날 수 있었다. 난 내 독주에 맞춰 노래하다 보니 그들만큼 세련되고 정교하지 못했다. 가수와 밤무대 독주 병행 가수의 창법은 엄청 다른 데가 많았다. 우리는 자기도 모르게 원곡을 많이 굴절시킨다. 건반을 자유롭게 옮겨 다녀야 하고, 그때마다 음악을 잠시 끊고 지나가야 한다. 한 호흡에 노래 부르기가 어렵다. 새로운 창법을 연구했다. 음량보다 보이스컬러가 중요했다. 감정보다 표정이 더 중요하다는 걸 깨닫는다.

이 방송을 타면서 많이 알려진다. 이 힘을 등에 업고 국내 첫 오르간 독주 DVD를 출시한다. 오디오에서 비디오 시대로 건너갔기 때문에 나도 거기에 적응해야만 했다. 제작 과정에 김기사의 도움을 받았다. GM뮤직(옛 서울음반)을 찾아가 DVD를 보여줬다. 좋다고 했다. 비로소 전국 고속도로 휴게소에 내 DVD가 깔린다. 2년간 3집까지 발매하고 나니까 다크호스 여가수 금잔디가 나와 같은 DVD를 출시했다. 나운도와 금잔디 영상비디오 시대가 열린다. 한 장에 1만5천원. 일부 후배 연주자는 그 DVD로 전국에서 나밖에 할 수 없다고 하는 ‘나운도표 가락리듬’ 터치를 배웠다.

트로트도 영상이 없으면 잘 팔리지 않았다. 현재 모두 7집을 펴냈다. 1집당 42곡 정도가 수록돼 있다. 관광버스가 주 고객이다.

그 상황에서 나를 성찰해 봤다.

나는 오르간 연주자 나운도인가, 가수 나운도인가, 이미테이션 방송인 나운도인가. 참 헷갈렸다. 아무래도 오르간이 없으면 어색했다. 오르간 연주자 나운도를 잡았다. 그런 도중에 지난 6월 Mnet 트로트 X 프로그램에 출연했고, 16명이 겨루는 세미파이널에 진출했다. 당시 3만여명이 출전했다. 1차 본심에 60여명이 올라갔다. 5번 서바이벌 무대를 가졌다. 나와 비슷한 연배인 태진아가 심사위원석에 앉아 있었다. 예전에 그가 대구에 내려왔을 때 반주도 해주었다. 순간 만감이 교차했다. 하지만 유명과 무명이란 종이 한 장 차이란 생각을 했다. 오히려 보람이었다. 추락하던 전국 밤무대 오르간 연주자의 자존심을 증폭시키는 데 내가 일조한다는 자부심까지 생겼다. 그 이후 지방 행사 섭외가 부쩍 늘었다.

요즘 새로운 음반 취입을 준비하고 있다. 대표곡은 ‘발코니에 앉아서’. 나훈아가 잠적 직전에 부른 곡인데 작곡가 정주희씨와 협의해서 그 곡을 내가 가질 수 있게 됐다. 내 곡도 몇 개 썼다. 김병걸이 작사하고 내가 작곡한 ‘앙큼한 여자’는 안동에 있는 박정희씨, ‘있다 없다’는 대구에서 활동하는 정인숙씨가 불러주고 있다.

요즘 성인가요 활성화를 위해 대구 도시철도 2호선 메트로센터 공연장에서 실시하는 능금가요제, 희망가요제의 심사위원 겸 악단장을 맡게 됐다. 능금가요제 본선은 15일, 희망가요제는 매주 수요일 오후 5시, 금요일은 오후 3시 아무나 출전하면 된다. 다음과 네이버 팬카페 회원도 360여명 있다. 신곡이 취입되면 내년쯤 대구에서 생애 첫 콘서트를 개최할 것이다.

연주자까지 겸하고 있어 노래만 하는 가수에 비해 무명의 설움을 덜 받았다. 모두 빛이 있는 무대만 기억한다. 하지만 세계음악사를 보면 음악의 출발은 그늘, 그러니까 밤무대다. 빛나는 무명을 오래 기억할 의무가 우리에겐 있다. 그래야 우리 일상이 ‘백점’이 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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