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관 개청 100년 1914~2014 칠곡 .19] 3명의 국무총리를 배출한 지역

  • 임훈 손동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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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4-11-21   |  발행일 2014-11-21 제11면   |  수정 2014-11-21
대한민국에 헌신한 큰 인물 기른 고장…주민 자부심 남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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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곡군민 대부분은 ‘칠곡에서 큰 인물이 났다’라는 자부심을 안고 살아간다. 여기에는 칠곡이 총 3명의 국무총리를 배출했다는 자신감이 내재되어 있다. 신현확 총리가 살았던 칠곡군 왜관읍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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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관개청 100년-1914~2014 칠곡’은 칠곡군의 군청 소재지가 왜관으로 옮겨 개청한 1914년부터 100년 동안, 칠곡의 주요 역사와 인물을 다룬 시리즈이다.


#1. 국무총리를 배출한 터전

대한민국 역사상 한 기초자치단체에서 3명의 국무총리가 배출된 사례는 사실상 칠곡군이 전국에서 유일하다.

서울 종로에서 제19대 김정렬, 제26대 이회창, 제38대 한덕수 국무총리를 배출했지만 이회창 전 국무총리는 충청권 인사(충남 예산)로 분류되기에 종로는 칠곡군보다 한 명 적은 국무총리를 배출한 셈이다. 국무총리 서리와 총리의 역할을 담당한 제2공화국 초창기 내각수반(장도영·송요찬·박정희·김현철)까지 포함하더라도 충남 청양군과 전북 고창군, 북한의 평북 용천군이 각각 두 명의 국무총리를 배출했을 뿐이다.

행정부에서 대통령 다음의 자리가 국무총리라는 점을 감안한다면 이는 매우 의미있는 결과다. 실제로 최규하 대통령이 국무총리직 수행 중 박정희 대통령 서거로 국가통치권을 거머쥐었기에 더욱 그러하다. 게다가 수많은 국무총리 역임자들이 유력 대선후보에 올랐거나, 그 이름이 거론되었기에 국무총리는 매우 중요한 직으로 인식되고 있다.

이에 칠곡군 주민들의 자부심은 남다르다. 일부는 금오산과 유학산의 지기가 낙동강을 따라내려와 칠곡에 도달한 덕분에 걸출한 인물을 배출할 수 있었다고 믿고 있다. 또한 칠곡은 인근의 구미 선산과 같이 영남 사림 선비들이 터전을 일구고 살았던 고장이다. 명문가 후손이 많으며 칠곡군 출신의 국무총리 역시 명망있는 가문의 후손들이다.

대한민국 헌정사에 자취를 남긴 칠곡 출신 국무총리에 대해 지역민들은 좋은 감정을 숨기지 않는다. 이수성 전 총리의 일가로 칠곡군 왜관읍에서 살고 있는 이택씨(72)는 “3명의 국무총리 모두 청렴하고 강직한 분들이다. 항상 지역보다 대한민국을 위해 살아온 분들로 기억하고 있다”며 자랑스러워했다.

#2. 희대의 풍운아 장택상

제3대 국무총리를 지낸 장택상은 1893년 10월22일 칠곡군 북삼면 오태동(현 구미시 오태동)에서 태어났다. 그는 독립운동가이자 정치인, 경찰관, 외교관이며 서예가였다.

장택상은 조선 중기의 학자 여헌 장현광의 후손으로 부유한 집안의 자손이었다. 이러한 배경 덕분인지 장택상은 매우 활달하고 카리스마 있는 성격의 소유자였다. 매사에 적극적이었으며 소신을 굽히는 법이 없었다.

신학문에 관심이 많았던 장택상은 1901년 경성으로 가서 본격적인 공부를 시작한다. 장택상은 1908년, 15세가 되던 해 일본으로 유학해 1년 뒤 와세다대학에 입학한다. 비록 일본 대학에 입학했지만 민족에 대한 장택상의 자존심은 여전히 높았다. 와세다대 재학 중이던 장택상은 1909년 안중근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한 것을 두고 “그것은 의병의 행위이지 폭도의 행위가 아니다”며 일본을 규탄했다. 쾌활하고 자유를 꿈꾸었던 장택상은 곧 일제의 탄압이 없는 곳으로 떠나고자 했다.

1910년 중국과 러시아를 다니며 항일투쟁에 눈을 뜬 장택상은 1919년 영국 에든버러대 경제학과에 입학, 해외에서의 독립운동에 힘쓴다. 1929년 29세의 나이로 귀국한 장택상은 항일운동에 본격적으로 뛰어든다. 1945년 광복 후부터 19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 때까지 수도경찰청장의 임무를 수행하며 혼란정국의 수습에 힘쓴다. 이후 외무부장관, 국회의원, 국회부의장 등을 거쳐 1952년 5월6일 제3대 국무총리에 오른다. 장택상은 국무총리 취임 후 안동 병산서원 류성룡 위패 앞에서 “대감 이후로 영남에서 정승이 나오기는 제가 처음입니다”라며 감흥을 드러내기도 했다.

제3공화국 시절 장택상은 야당 지도자로 활동했다. 1963년 구 자유당 인사인 윤치영과 임영신 등이 자유당을 탈당해 민주공화당으로 넘어갔지만, 장택상은 자유당을 지켰다. 당시 구미 출신인 박정희 대통령이 자신과 동향이나 마찬가지인 장택상을 민주공화당으로 영입하려 했다고 전해지지만 확실치는 않다. 결국 제6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공화당 후보에 패한 장택상은 병마에 시달린 끝에 1969년 8월1일 76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현재 구미시 오태동에는 장택상의 저택이 남아있지만, 식당으로 이용되면서 과거의 모습을 유추하기가 쉽지 않다.

#3. 역사의 산증인 신현확

격동의 시기인 1979년, 제13대 국무총리에 취임한 신현확은 칠곡군 출신의 경제관료다. 타협을 모르는 꼿꼿한 성격의 소유자로도 알려져 있다. 신현확은 조선 효종대의 무신 신유 장군의 후손으로 1920년 칠곡군 약목면 남계리에서 태어났다. 신현확은 어린시절 경북 일대에서 신동으로 소문이 났다. 경북고 전신인 대구보통고를 졸업하고 경성제국대 법학부에 진학했다. 1943년 일본고등문관시험에 합격해 1년간 사무관으로 시보 근무 후 정식 관리로 임명되었지만, 부임지를 이탈해 고향으로 돌아왔다. 스스로 일제의 엘리트 관료를 포기한 것이다.

신현확은 이후 영남대의 전신인 대구대 법학과 조교수를 지내다 장택상의 권유로 상공부공업국 공정과장에 취임, 경제관료의 길에 첫걸음을 내디딘다. 1957년 부흥부 겸 외자청장 서리에 임명되었으며, 1959년 39세의 나이로 부흥부 장관에 임명된다. 신현확은 이때 6개년의 경제개발계획을 수립해 1960년 국무회의에서 통과시켰는데, 이는 박정희 대통령의 제1차 경제개발 계획의 모태가 된다.

1979년 10월26일 박정희 대통령 시해사건의 중심에도 신현확이 있었다. 당시 부총리였던 신현확은 살벌한 정국 속에서도 대통령의 죽음과 원인을 파악하기 위해 용감하게 나섰다. 당시 전두환 보안사령관 등 신군부 세력을 압박한 것이다. 1979년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최규하 대통령이 당선되자 신현확은 국무총리에 오른다. 1980년 신군부의 비상계엄 전국확대 결의 국무회의를 주재한 뒤 반대의사를 표시하고 내각 총사퇴를 단행했다. 자신의 역할을 수행하면서도 소신을 지키려 했던 신현확의 의중이 묻어난 사건이었다. 정계은퇴 이후 삼성물산 회장을 지내며 삼성그룹의 정신적 대부역할을 맡기도 했다. 이는 경제관료 시절 이병철 삼성그룹 창업주와 맺은 교분 때문이었다. 신현확은 2007년 4월26일 87세로 세상을 떠났다.

#4. 용기와 소신의 총리 이수성

1995년, 제29대 국무총리에 취임한 이수성은 칠곡군 지천면 출신이다. 일제강점기 창씨개명을 거부하고 판사직을 버린 이충영의 아들이다. 서울대 법대를 졸업하고 서울대 법대 교수와 학장, 총장을 거쳐 국무총리를 역임했다.

이수성은 총리보다 법대 교수로 더 긴 인생을 살았다. 사법시험에 합격할 충분한 능력이 있었지만 학자의 길을 선택했다. 이수성은 학생들에게 법을 가르치며 늘 ‘따뜻한 법치’를 강조했다. 이수성은 평범한 교수였지만, 대범한 면도 있었다. 1980년 서울대 학생처장으로 재임할 당시 군사독재에 반대하는 학생들 편에 섰다가 신군부에 끌려가 모진 고문을 당하기도 했다.

그러나 학생들이 정도를 벗어나 행동하면 원칙과 소신으로 제자들을 가르쳤다. 이수성은 1980년 폭력시위에 나선 학생들을 꾸짖었는데, 그는 “이러한 행위는 민주화를 요구하는 학생들이 취할 바가 아니다. 전경들은 여러분의 형제다. 그들에게 돌을 던지려면 나에게 던지라”고 말했다. 이어 전경들에게 “학생은 여러분의 동생과 같으니 최루탄을 쏘지 말라”고 호소하기도 했다.

비록 학자에서 정치인의 길로 들어섰지만, 이수성은 권력지향적 인물은 결코 아니었다. 대통령의 결정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하면 총리직을 걸고 직언한 소신있는 관료였다. 임기 중 여섯 번 사의를 표명한 것만 보아도 그의 강직한 성품을 추정할 수 있다. 2000년 제16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서울대 법대 제자인 이인기 후보에게 패해 낙선했다. 현재 이수성 전 총리는 국학원 명예총재와 평화와 통일을 위한 복지기금 이사장으로 왕성한 활동을 펼치고 있다.

임훈기자 hoony@yeongnam.com

사진=손동욱기자 dingdong@yeongnam.com

도움말=장인희 칠곡문화원장, 이택 씨(이수성 전 총리 일가)

참고문헌=이광수 저 칠곡문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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