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정한 선생님像은 대한민국이나 영국이나 똑같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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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가방을 챙기던 소영이에게 실비아 선생님이 다가와 책선물을 주셨다. 동양이나 서양이나 스승의 은혜는 하늘과 같다. |
#1.소영이의 영어학원 ‘더 잉글리시 스튜디오’ 서머스쿨의 종강 파티. 담임인 실비아 선생님의 진행으로 학생들의 풍선 터뜨리기 게임이 한창 진행되고 있다. 선생님의 배려로 학생이 아닌 정호도 열심히 게임에 참여하고 있고 재선과 정희도 한쪽에서 아이들을 응원하고 있다.
정희 소영아, 왼쪽! 왼쪽! 그래, 그거 터뜨려!
소영 (머뭇거리다 다른 아이에게 풍선을 빼앗긴다)
재선 호세(Jose, 정호의 스페인어 이름), 아니모(animo, 힘내라는 뜻의 스페인어)!
정호 (다리에 풍선을 매달아 높게 들어올린 한 학생에게 간지럼을 태워 풍선을 터뜨린다)
재선 캬…. 이정호, 저 간지럼 작전은 진짜 ‘신의 한 수’다.
정희 가만 보면 정호는 은근히 악바리 근성이 있어.
재선 그래, 자고로 남자는 근성 빼면 시체 아이가. (어깨를 으쓱 하며) 저런 게 다~ 누굴 닮았겠노?
정희 (웃으며) 거야 물론! 남자 중의 상남자, 아버님을 닮으셨겠죠.
재선 진짜다. 소싯적에 내보다 덩치 두 배는 큰 놈이랑 싸움이 붙어도….
정희 (말을 끊으며) 열 대를 맞다가도 결정적인 한 방으로 때려눕혔단 그 얘기? 사골도 아닌데 몇 번을 우려먹는 거야.
재선 그만큼 내 끈질긴 근성을 우리 애들이 닮았다는 거지.
정희 (듣는 둥 마는 둥) 오, 애들 팀이 이겼다.
소영과 정호가 속한 옐로 팀의 승리로 게임이 끝나고 학생들과 선생님, 학부모들이 모여 준비된 음식을 먹고 사진을 찍으며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정희 친구들이랑 사진 많이 찍었어?
소영 응, K-pop 팬인 프랑스 친구하고는 계속 e메일하기로 했어. 서로 한국어랑 프랑스어를 가르쳐 주는 거야.
재선 이야, 우리 집 우등생 이제 프랑스어까지 섭렵하시려고?
정호 누나는 이상해. 왜 어려운 공부를 자꾸 더 하려고 해?
소영 친구가 프랑스어는 스페인어랑 비슷해서 배우기 쉬울 거래.
정희 그건 그렇고…. 저기 계시는 남자 선생님 한번 봐봐. (피식 웃으며) 해리 포터를 어설프게 닮았어.
소영 (킥킥대며) 그지? 그래서 별명도 ‘나이 든 해리 포터’야.
재선 선생님 별명 얘기하니 갑자기 생각나네. 내 고등학교 때 담임선생님 별명이 ‘잠수함’이었다.
정희 잠수함? 왜 잠수함이야?
재선 보통 교실문은 위쪽만 유리잖아? 유리창 두 장! 근데 유리창도 위쪽은 투명 아래쪽은 불투명이었는데 보통 사람이 복도를 지나 가면 뭐가 보여야 되노?
정호 얼굴?
재선 얼굴이지! 근데 그 쌤은 늘 머리꼭대기만 보였지, 잠수함처럼.
소영 푸하하! 키가 작으셨구나.
재선 응. 딱 교실 문에 있는 창 높이. 더 웃긴 건 쌤이 대머리라서 몇 올 안 남은 머리카락이 하늘하늘 날렸다는 거지.
정희 호호. 웃긴다. 조스도 아니고.
재선 말도 마라. 조스 등장만큼 떴다 하면 학생들한텐 살벌한 쌤이었지.
정희 근데 오빠가 선생님 키 지적할 때야?
재선 (못 들은 척 딴청 피운다)
소영 어? 잠깐만. 실비아 선생님이 지금 졸업장 주시려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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졸업장을 받은 소영이와 정호. 정호는 매주 열리던 금요 서머스쿨파티에 개근을 한 공로(?)로 졸업장을 받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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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글리시 스튜디오 뒤뜰에서는 매주 금요일 서머스쿨파티가 열린다. 승부욕이 강한 정호가 레크리에이션 시간에 열심히 참여하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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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코에서 온 소녀 바르바라는 발레를 배워서 몸이 아주 유연하다. 풍선을 터뜨리지 못하게 하기 위해 발을 높이 들었는데 정호가 간지럼을 태워서 기어코 풍선을 터뜨리고야 말았다. |
실비아 선생님이 학생들에게 졸업장을 나누어준다. 마지막으로 소영이가 졸업장을 받고 활짝 웃는데 실비아 선생님이 종이 한 장을 더 꺼낸다.
실비아 오늘은 ‘더 잉글리시 스튜디오’에 아주 특별한 졸업생이 한 명 더 있습니다. 그 주인공은 바로… 소영이의 동생, 정호 학생입니다.
정호 (영어를 못 알아들어서 무슨 일인지 어리둥절해 한다)
실비아 비록 나이가 어려서 이번 서머스쿨에 함께 하지는 못했지만 누나와 함께 모든 파티에 빠지지 않고 참석했기에 기쁜 마음으로 졸업장을 드립니다.
신이 난 정호가 졸업장을 들고 여기 저기 뛰어다니는 동안 소영이는 가방을 챙기려고 교실로 들어간다. 실비아 선생님이 가만히 소영이 뒤를 따라가서 선물을 하나 건넨다. 순간 소영이의 표정이 환하게 밝아진다. 먼발치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던 재선, 잠시 옛 추억에 잠긴다.
#2.시간을 거슬러 무대는 재선이 다니던 고등학교 교실. 재선이 덩치가 훨씬 큰 동급생과 주먹다짐을 하고 있다. 친구들은 말릴 엄두도 내지 못하고 빙 둘러 서서 구경을 한다. 덩치에 눌려 계속 맞기만 하던 재선이 상대가 틈을 보이자 필살기 주먹을 명치에 날린다. 덩치가 허리를 굽히며 푹 쓰러진다. 그때 망을 보던 친구 하나가 소리를 지른다.
학생1 (당황하며) 어어! 자, 잠수함 떴다! 아아아!
잠수함 (학생1의 귀를 잡아당기면서 나무 막대로 교탁을 내려친다) 이노무 시키들 안 떨어지나!
학생2 (소리죽여) 헉, 역시 잠수함이다. 언제 왔노? 안 보인다, 안 보여.
교무실 앞 복도에 방금 싸웠던 두 학생이 머리를 박고 있다. 잠수함 선생님이 덩치가 큰 학생을 발로 차서 쓰러뜨린다. 덩치가 벌떡 일어나더니 90도로 인사를 꾸벅하고는 교실로 달려간다. 이번엔 재선의 엉덩이를 발로 찬다. 재선도 복도에 나동그라진다. 그때 벗겨진 신발 사이로 드러난 양말 구멍이 잠수함 선생님의 눈에 들어온다. 재선 벌떡 일어나 90도로 인사를 하고 교실로 돌아가려고 한다.
잠수함 이 시키가 어딜 가노? 재선이 니는 내 따라 들어와.
재선 (못마땅한 얼굴로 교무실을 따라 들어간다)
잠수함 (자리에 앉아 책상서랍을 뒤적거린다) 니는 대체 정체가 뭐꼬? 깡패도 아이고 그렇다고 모범생도 아이고. 수업시간에 말썽은 안 부리는데 공부는 개판에다가 가끔은 지가 무슨 영웅이라꼬 불량배들하고 주먹질이나 해싸코….
재선 ….
잠수함 여 있었네. (서랍 깊숙이 있던 신사용 양말을 꺼낸다) 갈아 신어라 임마.
재선 (퉁퉁 부은 눈으로 양말을 쳐다본다)
잠수함 니 학교 끝나고 칠성시장에서 배달해가 집에 보태는 거 다 안다. 그런 건 알아서 잘하면서 학교에서 괜히 쌈박질한다 카마 어무이 좋아하시겠나?
재선 (퉁퉁 부은 눈으로 양말을 만지작거린다)
잠수함 니가 지금부터라도 정신 차리고 공부 열심히 하면 좋은 대학에 갈 수 있다. 내 말 믿어라!
재선 (놀라서 고개를 들고 선생님을 쳐다본다)
잠수함 …카는 말은 새빨간 거짓말이다. 다른 어떤 선생님이 니한테 그렇게 용기를 주더라도 그건 헛소리다. 솔직하게 얘기해주까? 니는 흔히 말하는 명문대 좋은 학과는 꿈도 못 꾼다.
재선 (퉁퉁 부은 눈으로 양말을 쥐고는 부르르 떤다)
잠수함 그런데 이거 하나는 분명하다. 니는 몸으로 하는 거는 워낙 뛰어나니까 체육 전공으로는 대학갈 수 있다. 대학 꼭 가라! 체육 선생을 하든지 주먹질로 깡패를 하든지 그건 대학 가서 그때 결정해라.
재선 ….
잠수함 인생에 정답은 없다. 그렇다고 대가리에 피도 안 마른 시키들이 벌써부터 인생 포기하고 지멋대로 노는 거 보면 진짜 답이 안 나오는 기라. 근데 내가 보기에 니는 싹수가 보인다. 대학 가라. 가 보마 또 딴 길이 보일 끼다.
재선 (퉁퉁 부은 눈에 눈물이 맺힌다)
잠수함 (수업시작 종이 울리자) 이 시키가 뭐하고 서 있노? 종소리 안 들리나? 퍼뜩 튀어 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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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원근처 런던의 풍경. 이제 빨간색 이층버스를 볼 날도 얼마 남지 않았다. |
#3.‘더 잉글리시 스튜디오’ 교문 앞. 재선 가족이 이야기를 하며 걸어 나오고 있고, 소영이는 책 세 권을 소중하게 끌어안고 있다.
정희 선생님이 소영이를 예뻐하시긴 했나 보다. 소영이한테만 선물을 다 주시고.
재선 글치, 우리 딸이 얼마나 공부 잘하고 태도도 좋은데. 선생님들이 이뻐할 수밖에 없다. 근데 아까 쌤이 선물주시면서 뭐라 카던데?
정희 내년에 또 오라지? 원래 학원선생님은 동양이나 서양이나 같아.
정호 아싸, 내년 종강파티 게임도 내가 다 1등이다!
소영 내년에는 영어 학원 오지 말고 그냥 이 책으로 열심히 공부하래.
재선, 정희 (동시에) 진짜?
소영 응, 단계별로 세 권인데 CD도 있고 웹사이트에 1년 무료수강 코드도 있으니까 학원 안 다녀도 충분할 거래.
정희 실비아 선생님 고맙네. 우리 형편을 아시나 보다.
소영 실비아 선생님도 스페인어 공부할 때 스페인어 선생님이 이렇게 책을 선물해주셔서 용기를 잃지 않고 공부하셨대. 나보고도 열심히 공부해서 옥스퍼드대학 꼭 가라고 하셨어.
재선 (혼잣말로) 진정한 선생님은 동양이나 서양이나 같구나.
문화점조직 이공컬처 대표 20culture@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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