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미영의 즐거운 글쓰기] 패러디, 패스티시…불멸의 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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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5-01-12 08:00  |  수정 2015-01-12 08:00  |  발행일 2015-01-12 제18면
[박미영의 즐거운 글쓰기] 패러디, 패스티시…불멸의 표절
<시인, 작가콜로퀴엄 사무국장>

난 이제 바람을 표절할래/ 잘못 이름 붙여진 뿔새를 표절할래/ 심심해 건들거리는 저 장다리꽃을 표절할래/ 어디서 오는지 알 수 없는 이 싱싱한 아침 냄새를 표절할래/ 앙다문 씨앗의 침묵을/ 낙엽의 기미를 알아차린 아직 푸른 잎맥의 숨소리를/ 구르다 멈춘 바닥에서부터 썩어드는 자두의 무른 살을 표절할래/ 그래, 본 적 없는/ 세상을 향해 달리는 화살의 그림자들을 표절할래/ 진동하는 용수철처럼 쪼아대는 딱따구리의 격렬한 사랑을 표절할래/ 허공에 정지한 별의 생을 떠받치고 선/ 저 꽃 한 송이가 감당했던 모종의 대역사와/ 어둠과 빛의 고비에서/ 나를 눈뜨게 하는 당신의 새벽 노래를/ 최초의 목격자가 되어 표절할래/ 풀리지 않는, 지구라는 슬픔의 매듭을 베껴 쓰는/ 불굴의 표절 작가가 될래/ 다다다 나무에 구멍을 내듯 자판기를 두드리며/ 백지(白紙)의 당신 몸을 통과할래/ 처음의 나뭇가지처럼 바람 속에 길을 열며/ 조금은 그렁이는 미래라는 단어를/ 당신도 나도 하늘도 모르게 전면 표절할래/ 자 이제부터 전면전이야(불멸의 표절 - 정끝별)


‘허공에 정지한 별’ 지구의 ‘싱싱한 아침’에 사각사각 소리 나게 연필을 깎아 공책에 이 시를 베껴 씁니다. 좋은 시를 만나거든 이렇게 써보라. 오래전 스승의 가르침대로 ‘풀리지 않는, 지구라는 슬픔의 매듭’과 그 순간을 떠받치고 선 ‘꽃 한 송이가 감당했던 모종의 대역사’ 경로를 또박또박 한 단어 한 문장 따라갑니다. 이렇게 ‘백지(白紙)’를 통과하다 보면 언젠가는 나도 바람과 뿔새와 씨앗의 침묵 그리고 푸른 잎맥의 숨소리를 베껴 쓸 훌륭한 ‘불굴의 표절작가’가 되어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타인의 논문 등 글에 대한 표절 시비가 심심찮게 대두됩니다. 실제로 인용 출처를 밝히지 않은 의도적인 표절은 명백한 범죄행위입니다. 하지만 위의 시처럼 바람이나 아침 냄새처럼 자연에 대한 표절에는 누구의 제재도 없을 것입니다. 시의 기법 중에서도 이처럼 ‘용인되는 표절’이 몇 가지 있습니다. 패러디(parody, 전통적인 사상이나 관념, 특정 작가의 문체를 모방하여 익살스럽게 변형하거나 개작하는 기법), 패스티시(pastiche, 기존의 작품을 차용하거나 모방하는 일종의 짜깁기 기법) 등이 그것인데요. 흔히 작가가 당대 가치관의 허위를 풍자하고 폭로할 때나 고급스러운 문학을 의도적으로 비틀 때 쓴답니다.

좀 어렵나요. 또 언급해 민망하지만 쉽게 드라마 미생과 그 인기에 힘입어 발 빠르게 기획된 후속극 ‘미생물’로 비교해 볼까요. 프로가 되지 못한 전직 바둑기사 비정규직 신입사원의 분투와 애환을 다룬 미생에 빗대어 실패한 연예지망생의 직장 분투기를 그린 미생물은 성공한 전작을 제목부터 모방, 변형, 개작한 패러디가 됩니다. 그렇다면 미생의 확실한 캐릭터를 가진 등장인물들과 장면, 명대사 등을 적재적소에 배치한 것은 일종의 짜깁기 기법인 패스티시에 해당합니다.

불멸의 표절, 이 시가 너무 아름다워서 저는 몇 번이나 읽어 봅니다. 그러다 ‘끝별’이라는 시인의 이름이 또 너무 예뻐 은근히 샘을 내기도 합니다. 이참에 저도 ‘첫별’이라는 이름이나 하나 표절해 지어둘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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