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태영의 포토 바이킹 .3] 팔공산 한티재 휴게소∼군위 부계 ‘안나의 집’

  • 인터넷뉴스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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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5-01-30   |  발행일 2015-01-30 제40면   |  수정 2015-01-30
굽이굽이 아름다워도 구순의 수녀님 만나러 가는 길은 언제나 울컥거린다
[서태영의 포토 바이킹 .3] 팔공산 한티재 휴게소∼군위 부계 ‘안나의 집’
한티휴게소엔 기념사진 찍을 포토존이 없다. 매점을 한티재 라이딩 인증샷 배경으로 썼다.

자전거가 한티재휴게소에 오르니 보이는 것이 달랐다. 나뭇가지 사이로 얼핏얼핏 구름 낀 바다가 보였다. 제멋대로 자란 나무들은 눈앞에 펼쳐진 운해의 장관을 가리는 가림목처럼 보였다. 포토바이킹은 주마간산(走馬看山)이다. 그렇다고 산천을 대강 보고 지나치는 것이 아니라 조상의 묏자리를 구하려고 찾아다니는 정성을 기본 자세로 해야 할 것이다. 어느 시인은 ‘새해 새날은 산으로부터 온다’고 했다. 팔공산은 대구·경북의 백두대간(白頭大幹)이다. 이 산자락에 서면 모든 것이 새롭다. 우리가 찾는 것들은 길 위에 널려 있고, 놓치면 그만이다. 산 아래 비탈진 언덕길에 고개가 있고, 산 너머 너머 고갯길은 그리움 하나쯤 품고 산다. 그리움은 가슴속 깊은 골짜기에 숨어 살고, 산 너머에 있다. 나는 왜 돌아올 길 생각하며 아득하고 까마득한 대구 밖으로 행군을 해왔는가? 내가 새해 이벤트로 포토바이킹을 시작하기로 한 것도 따지고 보면 내 깊은 그리움을 향한 다짐 때문이다. 수난받던 사람들의 고통을 딛고 일어서 새로 난 한티재를 넘어가는 의미는 기존의 장벽을 허물고 새 장을 여는 사람을 일컫는 ‘새뚝이’의 길이다.


시베리아 같이 찬 겨울 바람 맞으며
한티재 내리막길 쏜살같이 내려가면
박정희 대통령이 나라 경사라 했다는
절벽의 연꽃 같은 삼존석굴을 만난다
벚꽃 피는 봄이나 눈 내리는 날 와야
석굴의 제 멋을 느낄 수 있으리

대홍수와 산사태 후 복구과정서 쌓은
한밤마을 돌담은 인간문화의 승리다

오전에 출발해 해질녘에야 도착한
부계면 가호리 오르막길 ‘안나의 집’
“나 올해도 안 죽을 것 같다”는
수녀님 최고의 덕담을 들으며
짧은 만남의 아쉬움을 달래야 했다


지나가는 자전거 한 대 보지 못하고 도착한 겨울 한티휴게소엔 주말 행락객들로 시끌벅적했다. 고속도로 휴게소 하나를 압축해서 산속 깊이 통째로 옮겨 온 듯한 요란함을 산마루에서까지 와서 느껴야 하나 싶어 서글펐다. 거기다 물 한 잔 얻어먹을 수 없는 우리네 공공휴게소의 빈곤함으로 어떻게 영남의 종가문화를 자랑할까 싶기도 했다. 100분 쇼 하듯 땀 뻘뻘 흘리며 안간힘 써가며 올라온 한티재휴게소는 순례자의 쉼터로는 성에 차지 않았다. 한국의 아름다운 길에서 가장 목 좋은 자리지만 영남의 아름다움을 느끼지 못하고 여장을 챙겼다.

고갯길이 가르쳐 주는 자연스러운 교훈은 오르막이 있으면 내리막이 있다는 것, 힘들여 오른 만큼 즐겁게 내려간다는 것. 그러나 걷잡을 수 없이 내리막을 타면 안 된다는 것. 길 위에서 자빠져 본 적 있는 바이커는 감당할 수 있는 속도로 다운힐을 해야 한다는 걸 몸으로 안다. 겨울 라이딩이 어려운 것은 몸의 계절을 조정하기 곤란하다는 점 때문일 게다. 땀 흘려 오를 때 벗은 옷들은 휴게소에서 꺼내 재무장하고 주행을 시작해야 하는데, 그걸 까먹으면 한티재 내리막길의 찬맛을 제대로 보게 된다.

내게 한티재는 울컥재이다. 자전거가 포즈를 취하자 안나의 집에 계신 구순의 노수녀님께서 버선발로 뛰어나오시는 것 같고, 이놈이 언제 찾아올지를 기다리며 기도하고 계실 것 같아 속도를 낸다. 혼자 가는 길은 추웠다. 자전거에서 내려 바람막이 옷 한 꺼풀 더 껴입고 싶었으나 쉬이 속도를 붙인 자전거는 서기를 거부했다. 앞에 달리는 차들은 자전거 속도가 무서운 줄 알 것이다. 한티재 너머로 난 길 위에 붙어 사는 휴게공간들은 한적해 보였다. 이 길에서 자전거 최고 시속은 50~60㎞까지 나온다. 차들이 내준 가장자리길은 군데군데 결빙되어 있어 기록경신엔 도전할 마음이 생기지 않아 적당한 속도감을 즐겼다. 빙빙빙 둘러가는 굽은 길이 아름다웠다고 말하고 싶다.

[서태영의 포토 바이킹 .3] 팔공산 한티재 휴게소∼군위 부계 ‘안나의 집’
삼존석굴 경내 연못가에 있는 석조비로자나불은 대웅전이 없고 비로전이 있는 이 절을 상징하고 있다.
[서태영의 포토 바이킹 .3] 팔공산 한티재 휴게소∼군위 부계 ‘안나의 집’
삼존석굴은 모전탑 보수공사를 하고 있었다. 국민에게 삼존석불 접견권을 보장하려면 시선을 방해하는 돌계단과 난간 공사를 추가로 해야 할 것으로 보였다.

10여분 LTE의 속도로 구불구불 굴러가니 군위 삼존석굴로 알려진 부계면 남산리에 도착했다. 삼존석굴로 들어가는 입구에는 마을 노전이 들어서 있다. 극락교를 건너가면 9세기 말 양식 석조비로자나불이 삼존석굴의 나한처럼 서 있다.

팔공산 자락은 동서남북 불국토다. 지금도 요소요소에 절집들이 난전을 형성하고 있으며, 산중심처(山中深處)엔 천년고찰들이 부처님들을 모시고 있다.

군위군 부계면 남산리에 위치한 팔공산 제2석굴암은 신라불교가 공인되기 전인 눌지왕(재위 417∼458년) 당시 아도화상이 숨어 수도전법하였던 도량으로, 처음 절(임진왜란 당시 소실)을 짓고, 그 후 원효대사가 절벽 동굴에 아미타삼존을 조성·봉안했다고 하는 석굴사원이다. 팔공산의 원효대사 행적과 관련해선, 팔공산에서 10여년의 세월을 수행하면서 군위 오도암(悟道庵)을 창건했다는 전설도 있다. 그러고 보면 우리나라 사찰의 내력은 해동고승을 활용한 스토리텔링의 본보기라 할 만하다.

삼존석굴과 관련해선, 1927년 한밤마을에 살던 최두환이라는 분이 절벽 꼭대기에 밧줄을 매고 내려가 절벽 50여m 아래 석굴에서 아미타여래삼존을 발견했다는 것이 제2 창건에 해당될 텐데, 히스토리 좋아하는 기자들 말고는 아무도 챙겨주지 않는 것 같다. 이 일이 있은 뒤 62년 12월20일에 군위 아미타여래삼존석굴(軍威 阿彌陀如來三尊石窟)이란 이름으로 국보 제109호로 등록되었다. 63년 박정희 전 대통령이 석굴 발견 소식을 듣고 나라의 경사라고 기뻐하며 삼존석굴을 찾았다. 22m 높이의 절벽에 위치한 삼존불을 직접 볼 수 없자 3천만원을 시주해 굴 입구까지 오르는 돌계단과 다리를 만들게 되었다고 한다. 지금 삼존석굴은 모전탑 보수공사로 어지러웠다. 저것이 고고학자 김원룡 선생이 말한 ‘보이소’ 하는 ‘경상도의 고집’이런가? 아차차, 절벽에 핀 연꽃 같은 삼존석굴은 벚꽃 피는 봄날이나 눈꽃 필 때 와야 제맛을 볼 수 있다는 걸 까먹고 왔구나!

[서태영의 포토 바이킹 .3] 팔공산 한티재 휴게소∼군위 부계 ‘안나의 집’
자전거가 한밤마을 입구에 도착하니 지게를 진 어르신이 나무하러 산으로 오르고 있었다.
[서태영의 포토 바이킹 .3] 팔공산 한티재 휴게소∼군위 부계 ‘안나의 집’
한밤마을의 새로운 상징물로 등장한 성안문. 성안숲의 조형을 깨뜨렸다고 안타까워하는 건축가의 견해에 공감한다.

한티재를 넘어서 만나는 군위군 부계엔 군위군의 캐치프레이즈 구실을 하는 ‘삼국유사의 본고장’보다 실체가 있는 부림홍씨 집성촌 대율리 한밤마을이 웅크리고 있다. 산사태를 얻어맞고도 담장으로 꽃을 피운 대율리로 향했다. 한밤마을의 돌담은 막돌을 그대로 쌓아올린 방식이다. 갖은 돌을 잇고 쌓아 무릎높이, 어깨높이로 돌담을 만들었다. 1930년 대홍수가 나 팔공산 자락 마을엔 산사태가 덮쳤다. 대율리의 돌담은 이를 복구하는 과정에서 자연이 준 참변을 이겨낸 인간문화의 승리로 보였다. 큰 희생을 당한 분들의 넋을 달래는 위령탑 그 자체였다. 그래서 아름다움이 더했다. 하늘의 눈물이 닿는 지점까지 차곡차곡 쌓아올린 한밤마을의 돌담은 현대판 고인돌로 끊이지 않고 이어지는 거석문화의 유풍이다.

그러나 한밤마을을 시각적으로 대변하는 돌담보다 비보 숲정이, 돌솟대 진동단보다 더 소중한 것이 있으니 이 마을 뼛속까지 깃든 경상도정신이다. 밤꽃 피는 마을은 유림의 본향이다. 부림홍씨 집성촌에서 만나는 역사인물은 고려의 역사를 주체적으로 기록한 ‘휘찬려사’의 홍여하 선생과 갑자사화(1504) 때 연산군에게 직간(直諫)했다가 유배 도중 사약받고 죽은 홍귀달 선생이다. 산천주유 풍광을 좇되 사람의 마을을 빠뜨리지 않는 포토바이커는 성은 달라도 정신의 조상으로 삼는다. 이 오래된 천년마을에서 벼슬을 줘도 기꺼워하지 않은 경상도 남인정신에 흠뻑 취했다 간다. 돌담길을 뒤로하고 안나의 집으로 가는 길에서 만난 공산의 ‘팔(八)’ 자를 본떠서 마을 상징조형물로 세운 성안문은 사족처럼 눈에 거슬렸다. 조상의 빛난 얼을 이용해 호작질하는 후손이 되지 말라는 바람의 말이 뇌리에 쌩쌩거렸다.

[서태영의 포토 바이킹 .3] 팔공산 한티재 휴게소∼군위 부계 ‘안나의 집’
군위군 부계면 가호리에 있는 안나의 집 성모상 전경.

이젠 살아 있는 정신을 만나러 갈 차례이다. 수녀님을 만나러 길을 나설 땐 언제나 울컥거린다. 유난히 못난 영혼들을 사랑하시는 당신 마음이 맨발로 달려오는 걸 느끼기 때문이다. 올해 92세를 맞이한 수녀님은 이승도 저승도 아닌 하느님나라에 살고 계신다. 그래서 찾아뵙기가 어렵다! 수녀님을 찾아가는 나의 2015년 새해 첫 라이딩은 기쁨으로 넘쳤다. 새해 아침에 어른을 찾아뵙고 인사드리는 세뱃길, 자전거를 타고 일제 식민지 시대에 태어나 나라말을 사랑하고 국어를 가르치는 선생으로 일생을 봉사하신 수녀님의 광복 70주년을 축하하러 가는 이벤트의 서막을 시작했다. ‘왼쪽과 오른쪽 균형을 잘 잡았기에’ 내 낡은 자전거는 ‘오늘, 여기까지, 이만큼이라도, 왔다!’

하루하루 햇살들이 무섭게 지나갔다. 1월이 다 지나가기 전 안나의 집에 도착해서 다행이었다. 안나의 집은 신의 가호가 머무르는 부계면 가호리 오르막길에 있다. 오전에 출발한 자전거가 안나의 집에 도착할 때쯤 해는 넘어가고 있었다. 오후 5시면 안나의 집은 문을 닫기 시작하는 시간이다. LTE의 속도로 달려갔지만, 수녀님과의 만남은 짧았다. 구순이 넘은 수녀님이 준비해온 차 한 잔을 마시고, “아오스딩, 나 올해도 안 죽을 것 같다. ㅎㅎㅎ”라는 최고의 덕담을 듣고 이런저런 말 몇 마디 주고받은 후 아쉬움을 안고 일어서야 했다.

어두워가는 산은 오싹하게 다가왔다. 다시 오르막길로 얼굴을 바꾼 한티재길은 혼자 자전거를 타고 끌며 넘어오면서 별의별 생각이 다 들 정도로 길었다. 혼자라는 고독의 시간을 즐기려면 한티재 밤길 기행을 해보라. 지나가는 무수한 차들 가운데 반가운 불빛으로 다가와 태워주는 귀인을 만날 것 같은 기대감을 주는 길이다.

인물 갤러리 ‘이끔빛’ 대표 newspd@empa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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