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자 눈높이서 마음 제자리 돌려놓기…미술음악치료·요가명상법도 활용”

  • 이춘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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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5-05-22   |  발행일 2015-05-22 제34면   |  수정 2015-05-22
■부처님 오신 날 특집‘길’ 위의 두 스님
20150522
현대불교의 한계와 극복 방향에 대해 누구보다 고민하고 있는 묘향사 혜민 주지 스님. 새벽같이 일어나 50여종의 채소를 관리하고 있는 그의 몸짓은 수행자가 아니라 농부를 연상시킨다.


팔공산 묘향사 혜민 주지스님

깨달음 위해 수행하는 것도
치료하기 힘든 욕망의 하나

상처받은 청소년 찾아오자
스스로 마음 안정 찾게 하고
부모와의 관계 회복 도와줘

대웅전 후불탱화엔 놀랍게도
사회의 인간군상 담은 부처님
법회 최소화 매년 꼭 4차례만
공양 땐 염불 대신 각종 음악

홀로된 어머니 모시고 봉양도

칠곡군 동명면 기성리 기성전원주택마을이 끝나는 지점에서 산으로 500m 올라가면 묘향사가 있다. 묘향사 안내판은 전주에 손바닥만 하게 걸려 있다. 묘향사는 도무지 절 냄새가 나지 않았다. 숲속 쉼터 같았다. 혜민 주지 스님은 묘향사를 ‘그 섬’으로 간주했다. 그 섬이란 정현종의 시 ‘그 섬에 가고 싶다’를 염두에 둔 듯했다.

절 안팎 산책로에는 떼어가고 싶은 충동을 일으키는 80여개의 크고작은 명언 팻말이 붙어 있다. 스님은 명언을 굳이 불교경전에서 찾지 않았다. 영화·드라마 대사, 공익광고 카피, 타 종교 지도자의 금언조차 외면하지 않는다. ‘가장 큰 기쁨은 절대 쓰러지지 않는 것이 아니라 쓰러질 때까지 다시 일어나는 것이다’(공자), ‘지식은 다른 사람에게 전달될 수 있지만 지혜는 그렇지 않다’(헤르만 헤세), ‘다른 사람하고 비교하지 말어. 그 사람은 그 사람이고 나는 나여. 온 우주 통틀어 나는 오직 나 하나여. 왜 딴 사람하고 비교해서 나를 시시하게 만들어. 이 세상에서 시시한 사람은 하나도 없어’와 같은 드라마 ‘엄마가 뿔났다’의 명대사도 끌고왔다.

합장으로 스님에게 예를 표했다. 그런데 청아한 수행승의 기색이 느껴지지 않았다. 종일 힘든 일을 하고 돌아온 이웃집 아저씨 같았다. 그러나 그의 음성은 깊은 우물 같았다.

“나처럼 찌그러진 게 말간 것보다 더 자연스럽지 않은가?”

◆ 노트북을 보는 부처

대웅전을 보고 또 한번 놀랐다. 울릉도 굴피집을 연상시키는 대웅전 지붕. 너무 작아 꼭 ‘혓바닥’ 같다. 대웅전 외관은 예고편이었다.

법당은 수수했다. 새로운 버전의 후불탱화가 압권이었다. 2008년 7월 점안식을 가진 이 모자이크 버전의 벽화식 탱화는 동양화가인 홍익대 문봉선 교수의 수묵담채 작품. 가로 30㎝, 세로 36㎝ 그림 165장을 모아 본존불 뒤에 부착했다. 폭 2m, 길이 12m 모자이크형 벽화였다. 노트북을 보고 있는 부처, 화투를 치고 있는 부처, 술을 마시는 부처, 골프 치는 부처, 기타 연주하는 부처, 실직자 부처 등 현대 사회의 숱한 인간군상을 담았다.

그가 갓 완성한 비뚤비뚤한 원두막 같은 힐링 대지방(선원의 휴게 공간)으로 안내한다.

아카시꽃 튀김을 내놓았다. 그러면서 승려의 빈익빈 부익부의 현실을 무척 걱정했다.

“80년대까지만 해도 승려생활에 그렇게 돈이 들어가지 않았다. 그런데 전국 도로망이 완비되고 절 입구까지 포장되면서 절도 속세의 연장에 서게 된다. 경쟁적으로 대형불사에 올인한다. 2000년을 넘어서면서 관광사찰 등의 곳간은 풍성해져 갔다. 99% 승려는 가난하고 1%만 부유해졌다. 탁발정신으로 돌아가야 한다.”

◆ 나는 묘향사의 머슴

그는 ‘묘향사의 머슴’이라고 했다. 하나에서 열까지 직접 챙겨야 한다고 했다. 아침에 일어나면 예초기로 풀을 정리하고 50여종의 각종 채소·유실수·야생초·나물까지 돌본다. 건강보험 등 각종 공과금도 혼자 해결해야 한다. 먹고 살기 위해 스님도 비즈니스맨처럼 뛰어다니는 실정이다.

“한번은 모 대학교 사회교육원에서 강의를 했다. 강사료가 정말 쥐꼬리만 해 좀 더 달라고 했다. 담당자가 대뜸 하는 말이 ‘아니, 스님이 무슨 돈이 필요하세요’라고 뜨악한 표정을 짓더라. 속으로 ‘당신들 정말 절집 사정을 몰라도 너무 모르구나’ 자탄했다. 예전에는 돈 없는 승려가 가능했지만 이젠 돈 없는 승려가 불가능하다. 이 대목이 정말 서글펐다. 아프면 병원에 가야 하는데 승려전용 병원도 없으니 어쩌겠는가.”

그는 신도가 오면 오고 가면 가도록 놔둔다. 하지만 현실은 개별적으로 신도에게 전화를 해서 관리를 해야 절이 굴러간다. 얼마나 많은 종교가 있는가. 자칫하면 다른 데로 가버린다. 그는 ‘좋은 사회는 종교가 군림하지 않는 사회’라고 여긴다.

“불교는 물론 지금 여타 종교는 너무 권력적이다. 종교야말로 다이어트해야 할 시점이다. 성전이 너무 커졌다. 다들 출세하고 복 받으려고 매주 성전에 간다. 그게 과연 종교일까. 이제 절에 산다는 것 빼고 나머지는 승려나 일반인이나 똑같다.”

그는 불자와 눈높이로 만나기 위해 높다란 법상도 치우고 사주도 봐주지 않는다. 대신 현대 정신분석학과 각종 미술·음악치료·요가명상법 등을 동원해 맘을 제자리로 돌려보내려고 한다.

“깨닫기 위해 수행하겠다는 것도 치료하기 힘든 욕망의 하나다. 그것보다 그냥 재밌고 행복해지기 위해 참선하겠다고 생각하면 좋겠다.”

◆ 한때 극작가를 꿈꿨다

그는 지난 세월 한국 불교의 빛과 그늘을 동시에 체험했다. 80년대 개혁종단 때 지리산 실상사 도법 스님 등과 함께 서울 조계사로 올라갔다. 선방도 다녔고 주지, 조계종 총무원, 원로회의에도 간여했다. 하지만 그는 그 어느 곳에도 맘을 의탁할 수 없었다.

그는 자신이 승려가 될 줄 꿈에도 생각 못했다. 유명 극작가가 되는 게 꿈이었다.

어느 날 부산 범어사 행자가 돼 있었다. 21세였다. 주말이면 절 근처에 놀러온 또래가 야외전축을 틀어놓고 음주가무하는 광경을 멀리서 지켜봤다. 아직 출가란 개념이 희미했다. 그는 그냥 ‘절에 쉬러 왔다’고 믿었다. 다른 행자는 모두 도를 닦으러 왔다고 했다. 그때부터 그는 좀 삐딱한 행자로 통했다. 범어사 강원에 들어갔다. 공부가 재미없었다. 방황은 계속됐다. 그 많은 선지식이 자기 절망 하나 구해내지 못했다. 도반들이 그에게 화두참선을 권한다. 양산 통도사에 기거하고 있던 경봉 대선사도 친견한다. 입적하기 얼마전의 경봉은 화두를 구하는 그에게 눈깔사탕 두 개만 손에 쥐어준다. 여기저기서 깨쳤다고 하는데 그는 뭘 깨쳤는지 항상 의문이었다.

새벽예불 올리고 염불하고 각종 법회와 49재를 지내고 방생을 간다. 승려의 삶은 사회인과 다를 바가 없었다.

1984년 서울 중앙승가대에서 박종철 고문치사 및 분신정국과 마주한다. 운동권 학생이 승가대에 들어와 ‘세상은 격동기인데 스님은 왜 참선과 해탈만 운운하느냐’고 성토했다. 그도 충격을 받는다. 이 무렵 민중불교가 싹트게 된다. 그는 해인사 승려대회 때 성명서 작성에도 간여한다. 해인사 승가대에서 열린 10·27불교법란 모의 재판극의 극본도 만들고 연출까지 맡는다. 원로 스님은 그에게 중립을 강요했다. 승가대를 졸업한 후 꿈에 그리던 선원에 들어간다. 그동안 선원만은 그에게 신비와 외경의 대상이었다. 수수께끼가 풀릴 줄 알았다. 일상은 좋았지만 그에겐 변화도 일어나지 않았다.

◆ 어머니와 함께 살다

범어사 포교국장이 되어 금정불교대학을 세운다. 국내 불교대학의 첫 흐름이었다. 체계적인 신도교육을 하는 공간이었다. 한승원, 박범신 등 유명 소설가를 강사로 초빙했다. 세상은 여기도 말, 저기도 말이었다. 말로만 불교인 것 같았다. 다시 회의가 일었다. 어떤 대안을 내놓지? 그에겐 마땅한 답이 없었다.

국면전환이 필요했다. 인도로 간다. 라즈니시, 마하리시 등 각급 명상센터를 순회한다. 미얀마의 위빠사나 수행법도 익히면서 태국, 말레이시아, 중국, 일본 등을 돌아다닌다. 기독교의 교리도 탐독한다. 세상은 넓고 자신은 아는 게 쥐꼬리만 했다. 낮추고 살았는데 낮출 게 더 많았다. 불교가 아니라 세상을 더 배우기 위해 5년간 만행을 더 한다. 그는 강원룡 목사의 크리스찬 아카데미처럼 복합문화예술공간 같은 절문화를 구축하고 싶었다.

그때 어머니가 등불처럼 나타났다. 불가에선 ‘부모와 등져라’ 했지만 그는 달리 생각했다. 중도 외롭고 슬프고 화가 난다. 무기력하고 어딘가 숨고 싶을 때 가장 의지가 됐던 게 사실 어머니였다. 불가에 오면서 저만치 밀쳐두었던 어머니를 다시 펼쳐봤다. 19세에 시집 와 일찍 남편을 여의고 자식을 자기 손으로 성장시킨 여인이었다. 어머니(3년전 별세)를 봉양하기로 결심한다. 일흔 넘은 어머니와 외딴 남해 바닷가에서 살았다. 2003년 팔공산으로 들어온다.

앙상한 산에 매년 200그루의 나무를 심었다. 나무는 그의 자식이었다. 출가한 후 가장 행복한 나날이었다.

소문도 내지 않았는데 부모한테 상처를 받은 청소년들이 제 발로 찾아왔다. 애들은 다들 자기 부모한테 뿔이 나 있었다. 이런 아이한테 불법이 통하겠는가. 해탈이 어쩌구 저쩌구. 그건 부모의 잔소리와 다를 바 없었다. 아이들에겐 불법이 아니라 부모와의 관계 회복이 더 절실했다. 아이가 절에 오면 아무것도 시키지 않는다. 그냥 원없이 놀게 놔둔다. 맘이 비교적 차분해지면 족구, 탁구, 골프, 농구, 헬스, 배드민턴 등 각종 운동을 함께한다. 가족을 불러 달빛명상도 했다. 신기하게 알아서 착해져갔다. 집이 밝아졌다.

법회도 최소화시켰다. 매년 딱 네 차례(초파일, 백중, 동지, 정초)만 올린다. 법회 때 요가명상도 하고 명상음악도 소개한다. 불교 용어는 가능한 사용하지 않으려고 했다. 공양 때는 염불 대신 1시간 정도 클래식, 재즈, 영화음악, 가요, 판소리 등을 튼다. 신도회도 없다. 공양주의 방이 주지보다 더 좋다.

승려 같지 않은 승려, 절 같지 않은 절이었다. 묘향사는 그래서 22세기를 겨냥하는 걸까.

글·사진=이춘호기자 leekh@yeongn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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