③ 46년째 한자리 영업 ‘고향의 맛’ 명성 …냉면 뽑는 기계 싣고 2군사령부 간 적도

  • 박진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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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5-06-26   |  발행일 2015-06-26 제35면   |  수정 2015-06-26
[평양에서 온 남자의 6·25 기억 그리고 삶] 대구‘부산안면옥’ 방수영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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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수영씨가 거처하는 아파트 서재에서 책을 읽고 있다. 팔순이 훨씬 넘도록 손에서 책을 놓지 않는 그는 20년간 한·일관계를 연구해오고 있다.


겨울철 불공평 과세 항의의 뜻
가게 문을 닫은 것이 계기
40년째 매년 4월1일부터
꼭 추석 전날까지만 일해

20년 전부터 일본에 관심
연구물 단행본으로 만들어
손님에게 무료 배부하기도

장남 방문일 변호사는
대구지방변호사회 독도위원장

◆ 냉면과의 재인연

그는 체력적으로 교사생활이 힘에 부쳤다. 한편 부산으로 거처를 옮긴 큰 외삼촌은 광복동에서 ‘부산안면옥’이란 상호로 냉면가게를 냈다. 작은 외삼촌(안차천)도 대구에 와 중구 계산동에‘대동면옥’이란 냉면가게를 했다. 두 냉면 가게가 다 잘 됐다. 그는 1967년, 교직을 접고 부산에서 철근장사를 했는데 생각대로 사업이 잘 되지 않았다. 그러던 차에 작은 외삼촌이 대구가 날씨가 더운데 대구에서 냉면가게를 하면 어떻겠느냐는 제안을 했다. 큰 외삼촌도 도와주겠다고 했다. 둘 다 그를 친자식처럼 아꼈던 분이다. 그는 69년 대구시 중구에서 ‘부산안면옥’을 개업했다. 부산에 있던 ‘부산안면옥’은 1년 뒤 문을 닫았다. 그리고 큰 외삼촌도 대구로 왔다.

“냉면집 외손자로 태어났지만 냉면에 대해선 사실 잘 몰랐지. 부산에서 일하던 솜씨 좋은 주방장이 대구에 와서 한 달 동안 가르쳐줘서 배웠어. 처음엔 가게가 옛 국세청 뒷골목에 위치해 장사가 잘 안 됐어. 그래서 인근 법원이나 검찰청에 전단을 돌렸지. 2군사령부 장교도 많이 찾았는데 한번은 냉면 뽑는 기계를 트럭에 싣고 2군사령부에 간 적도 있었지. 고위장성들 모임을 할 때였는데 150그릇을 만들어달라는 것이야. 고향이 이북인 장교가 많았던 것 같은데 우리 가게 냉면 맛이 뭐 고향의 맛이라나.”

작은 외삼촌이 했던 대동면옥은 지금도 영업을 하고 있다. 하지만 주인이 서너 차례 바뀌었다고 했다.

“보통 물냉면은 평양식으로, 비빔냉면은 함흥식으로 하는데 비빔면은 고구마전분을 사용하고 물냉면은 메밀로 하지. 손님의 취향에 따라 해주기도 해. 주방 일은 중노동이야. 우리 가게에선 쇠고기 육수를 쓰는데 온육수는 인삼을 넣고 푹 고아. 46년째 한 자리에서 하고 있지. 처음엔 4계절 내내 했어. 국세청장에게 모범납세 표창장을 받기도 했는데 여름과 겨울의 매출액 차이가 10분의 1이야. 냉면이란 게 사실 계절 장사이거든. 그래서 겨울엔 세금을 적게 낼 수밖에 없었지. 그런데 하루는 왜 이렇게 세금을 내느냐고 하면서 세무서에서 세무조사를 나왔어. 그래서 정직하게 세금을 냈는데 못 하겠다 하면서 문을 닫아버렸지. 겨울엔 사실 직원들 월급주기도 빠듯해. 나중에 국세청에 있던 모 국장이 오라고 하는거야. 앞으로 우리가 공평과세를 할 테니 세금을 낮춰주겠다고 하더라고. 일 없다고 하면서 계속 문을 닫았지 뭐. 그렇게 한 게 40년 됐어. 그 국장 지금도 가끔 냉면 먹으러 우리 가게에 오곤 해.”

부산안면옥은 매년 4월1일부터 그해 추석 전날까지만 영업을 한다. 직원들도 그것을 다 알기에 겨울엔 다른 일을 찾는다. 25년 넘게 같이 일을 한 직원도 있다. 지난해 30년 가까이 가게에서 만두를 빚었던 아주머니가 돌아가시는 바람에 평양식 만두를 못 낸다고 했다. 다만 만둣국은 한다.

◆대구경북에서 처음으로 낙농업 시도

방 전 대표는 73년, 한 지인의 권유로 낙농업을 시작했다.

“냉면 가게에서 나오는 잔반을 어드렇게 처리해야 되는데 처음엔 돼지를 길렀어. 기런데 그게 여간 어려운 게 아니더라고. 일도 많고 기래서 근처에 4만6천280㎡(1만4천평) 정도 되는 땅을 구입했어. 대구미술관 근처야. 거기서 목초 종자사업을 했더랬지. 그러다 다시 아는 공무원이 젖소를 길러보면 어떻겠느냐고 권유하기에 낙농업을 시작했어. 당시 정부가 낙농업을 권장하던 때라서 소를 무상으로 받다시피 했지. 한 스무 마리쯤 될 거야. 아마 대구·경북에서 젖소를 키운 건 내가 처음일 게야.”

그는 낙농업을 제대로 한번 해야겠다는 결심을 하고 이민을 가기로 한 적이 있다. 그는 선진국의 낙농업 실태를 파악하기 위해 82년 홀로 캐나다로 갔다.

“기땐 여행자유화가 안 돼 출국하는 게 까다로웠어. 캐나다라는 나라가 엄청 넓더군. 기런데 그곳 낙농업은 사람이 일일이 하는 게 아니야. 대개 자동화시설이 돼 있는 기야. 시설도 대규모라서 내가 과연 한국에 귀국해 이렇게 할 수 있겠나 하는 의문이 들더군. 게다가 큰아들과 아내도 반대를 했어.(옆에 있던 부인 홍기량씨가 남편은 일을 저지르고 수습은 자신이 한다며 적극 말렸다고 했다) 장남이 사법시험 준비하는데 놔두고 간다는 것도 그렇고 이런저런 이유로 이민은 포기를 했지 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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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수영씨가 펴낸 책.

◆‘일본 제대로 알자’연구에 심혈

방 대표는 20년 전부터 일본을 연구하기 시작했다. 일제강점기에 태어나 일본말을 익힌 것도 여행에 도움이 됐다.

“사실 일본이야 뭐 볼 게 있나 싶어 염두에도 두질 않았어. 기런데 우연히 일본에 들렀다 일본을 제대로 알아야 한다는 의무감 같은 게 들더라고. 일본의 역사를 보니 그들의 조상신이 한국인이야. 일본에 있는 한국의 흔적을 찾아 일본의 고분이나 유적지를 샅샅이 훑고 다녔지. 예컨대 가라구니다케의 가라는 가야의 옛말이지. 스미요시 신사 같은 것도 한국인이 조상이야.”

그는 점점 일본을 해부하기에까지 이른다. ‘일본의 겉과 속’ ‘독도와 일본군 성노예 문제의 진상을 밝힌다’와 같은 단행본도 출간했다. 올해 500권을 찍어 손님에게 무료로 나눠줬는데 이미 동이 났다. 그의 장남인 방문일 변호사도 현재 대구지방변호사회 독도위원장을 맡고 있다. 부자가 함께 독도지키기 선봉장에 나선 셈이다. 방 대표는 최근 광복절을 앞두고 언론이 한·일 간 화해무드를 언급하는 것에도 고개를 내저었다.

“일본을 잘 모르고 하는 소리야. 간토, 도호쿠 지방은 온화한 사람이 많아. 하지만 야마구치, 규슈, 시코쿠인은 과격한 군국주의자가 대부분이지. 메이지유신을 이끈 사람이 요시다 쇼인과 후쿠자와 유키치 같은 이들이야. 후쿠자와 유키치는 일본 화폐에도 들어간 사람이지. 이 사람이 제자들을 가르칠 때 개인과 개인 간의 잘못에 대해선 시시비비를 가려 잘못한 사람은 사과를 할 수 있어도 국가 간 일은 그렇게 하면 안 된다고 했어. 아베가 이런 사람을 따르는 인간이지. 지난번 아베가 미국에 갔을 때 사과할지도 모른다고 했지만 사과를 안 했잖아. 난 확신해. 일본은 진실로 과거사를 사죄할 리가 없어. 우리나라 사람이 주변 강대국을 이기려면 영어, 중국어, 일본어, 러시아어 중에 2개 정도는 할 수 있어야 해. 학자도 더 열심히 공부하고 평화통일도 해야 하는데 말이야.”

방 대표는 일본에서 발간된 문예춘추를 번역한 인쇄물을 기자에게 보여주었다. 전시배상, 종군위안부, 영토, 신사참배를 언급하면서 일본은 중국, 한국과 100년 전쟁을 대비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가와무라 유스케 같은 군국주의 역사학자와 살아있는 친일파 오선화, 대만 출신 황문웅 같은 일본 극우파의 발언들을 요약한 것들이다. 그의 집 서재에는 각종 서적과 자료, 스크랩 등이 빼곡하게 들어차 있다.

“주택에 살 땐 이것보다 훨씬 많았는데, 큰애가 다 본 것들인데 들고 가봐야 짐만 되니 버리고 가자고 해서 많이 줄었어.”

방 대표는 요즘 식당 출입을 거의 하지 않는다. 부산안면옥의 실질적 경영은 차남인 방문진씨 부부가 하고 있다. 방 대표는 부산안면옥이 사철 영업을 하려면 음식의 종류가 다양해져야 한다고 말했다.

글·사진=박진관기자 pajika@yeongn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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