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0회 이상화시문학상 수상 박덕규 시인

  • 이춘호
  • |
  • 입력 2015-08-07   |  발행일 2015-08-07 제36면   |  수정 2015-08-07
“자본 논리에 굴복한 문학 서울·지방 마찬가지 …각 지역의 소집단운동에 기대”
제30회 이상화시문학상 수상 박덕규 시인
대구은행 본점 글판 문안선정위원으로, 분기별로 한번씩 대구에 내려오는 박덕규씨가 대구은행 본점 지하 로비로 내려가는 계단에서 포즈를 취했다.



전방위 프리랜서 작가로 불리는 박덕규씨(57). 국내 문인 중 지방문학과 중앙문학의 허와 실을 가장 예리하게 파악하고 있는 문인 중 한 명이다. 대구에서 중·고교 시절을 보냈고 거기서 문학청년기를 국내 유수의 시인 등과 교유하면서 보낸다. 서울로 올라가선 한국 시문학 소집단운동의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을 주도한 1980년 ‘시운동’의 주축이 된다. 하재봉, 류시화(안재찬), 남진우, 이문재, 박기영, 장정일, 황인숙, 박주택, 장석남, 김기택, 원재훈, 권대웅, 기형도 등 80년대 국내 시문학을 주물렸던 쟁쟁한 시인들과 의기투합해 제도권 시학을 압박한다. 시운동은 90년대를 넘어오지 못하고 자동소멸해버린다. 그는 시에서 소설로 말을 바꿔탄다. 평론도 하고 출판기획도 하는 전방위 프리랜서 작가로 외연을 넓힌다. 시인의 굴레에 갇히는 걸 거부한다. 어느 날 문예창작과 교수가 된다. 하지만 캠퍼스는 결코 호락호락한 곳이 아니었다. 얽매여 살아야 했다. 다시 시인으로 돌아오고 싶었다. 두 번째 시집 ‘골목을 나는 나비’를 지난해 서정시학을 통해 발간했다. 첫 시집을 낸 지 30년이 흘렀다. 그 시집 덕분에 제30회 이상화시문학상을 수상했다. 그는 요즘 분기별로 한 번 대구은행 글판 문안선정위원 자격으로 대구에 온다. 올 때마다 문학청년 시절의 그리움이 왈칵 그를 엄습한다.

30년만에 낸 두번째 시집으로 수상
여러 편의 시에 이미지를 살리는 데
대구 중구 근대문화골목이 일조했죠
팍팍한 삶 극복 빚 없이 가는 게 중요
생산·소비자 중심 세계로 돌려놓아야


▲최근 두 번째 시집을 내고 이상화시문학상까지 받았는데 소감은.

“등단 35년에 이번 이상화시문학상만 한 상을 받은 게 없습니다. 별로 내세울 게 없었으니 당연한 거죠. 1984년 ‘아름다운 사냥’ 이후 30년 만에 낸 두 번째 시집입니다. 오래 전 소설, 평론 등으로는 작은 상을 받기도 했지만 시는 고교 3학년 가을 어느 백일장에서 장원한 이후로는 처음입니다.”

▲고향의 대선배 시인의 이름으로 받은 상이라 남다른 기분이겠어요.

“이상화와 이육사 시인을 늘 자랑 삼는 대륜중학교를 다녔고 거기서 문학의 꿈을 키웠어요. 지금 대구시 중구 계산동에 이상화 시인이 살던 집이 보존돼 있지요. 이 집을 중심으로 동산 청라언덕에서 약전골목을 거쳐 진골목에 이르는 근대문화골목 투어가 개발돼 있습니다. 제가 2002년에 김원일의 장편소설 ‘마당깊은 집’의 무대를 찾는 행사를 처음 진행한 적이 있는데, 뒷날 이 무대가 중구 골목 투어에서 빠질 수 없는 공간이 됐습니다.”

▲대구에서 태어났어요.

“제 본적이 중구 삼덕동입니다. 60년대 초중반 대구교도소 건물 곁 긴 골목의 끝집에 살았어요. 이번 시집의 여러 편은 그 집의 이미지를 그대로 살린 건데요, 이미지가 잡히는 데 근대문화골목이 일조했지요. 물론 제 이런 개인사는 이번 문학상 수상과 직접적 관련이 전혀 없는 거지만요. 어떻든 제가 다닌 중학교, 저의 본적, 저의 문학답사 체험 등 이상화 시인과의 인연이 이 상으로 이끌었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30년 만에 두 번째 시집이라니, 너무 늦은 감이 있는데 이렇게 늦은 이유는 뭔가요.

“아시다시피 제 문학 이력이 꽤 번잡합니다. 대륜중을 졸업하고 대건고를 들어갈 무렵 장래희망이 소설가로 굳어져 있었어요. 속되게 말하면 명작도 쓰고 그걸로 돈도 많이 벌고 싶었던 겁니다. 대학을 소설 특기생으로 입학했는데, 입학하고 나니 소설이 안 되고 시 쪽으로 경도돼 갔어요. 이후 시인이 되는 데는 80년 당시 신군부 계엄 치하의 언론통폐합이라는 정치 문제가 방해하고, 평론가가 되는 데는 우리 문단의 특별한 관행이 얹어졌어요. 꼭 소설을 쓰고 싶었기 때문에 94년 소설가로 나섰고 그러자 그게 계기가 돼 대학 문예창작과의 소설창작 교수가 될 수 있었어요. 대학에서 소설도 쓰고 논문도 쓰고 그렇게 세월이 흐르니까 그동안 참았던 시심이랄까 하는 게 몸속에 샘으로 고이고 있었던 거죠. 시를 만나니까 시를 쓰던 옛시절은 물론이고 아득히 지난 옛 유년까지 새록새록 살아났어요.”

제30회 이상화시문학상 수상 박덕규 시인

▲고교시절 문학청년 시절의 얘기가 궁금하네요.

“제가 세상에 대해 제법 진지하게 고민하게 된 것은 중3때부터인 듯합니다. 사춘기의 심리 상태가 가중되기도 했고, 입시에 대한 공포도 컸고, 거기에 70년대 초중반 심화되고 있던 반공과 개발독재라는 정치사회의 억압을 학교와 가정의 가르침을 통해 받고 있었던 거지요. 고교에 입학하자마자 1년 휴학을 했어요. 이 1년의 고독과 방황은 나중에 제 삶에 상당한 자양분이 됩니다. 복학을 하자 한 선배가 교내 문예반 가입을 권하더라고요. 별칭 ‘태동기’인데 여기서 또한 많은 걸 경험했지요. 지도교사가 이 지역에서 가장 유명한 시인의 한 분인 도광의 시인이었습니다.”

▲서울로 올라가기 전 대구에서 만난 문인들의 면면이 궁금하네요.

“중·고교 시기 만난 분 중 문학인이 된 사람을 꼽으려면 조금 과장해서 신문 한 면은 채워야 하지 않을까 싶네요. 도광의 선생님의 저에 대한 신뢰와 지지는 ‘편애’라 할 수밖에 없을 정도였고요. 이재행이라는 특출한 선배 시인도 있었죠. 나중에 등단하는 동문은 시인 류휴기, 홍승우, 서정윤, 조성순, 안도현, 이정하, 오석륜, 소설가 박상훈, 권태현, 김완준, 평론가 하응백, 수필가 곽호순 등이고 지금은 서구 국회의원이지만 당시 학생문사로 이름을 날린 소설가 지망생 김상훈도 있었고요. 이웃 고교의 선후배로 김선굉, 김수복, 장옥관, 송재학, 문형렬, 오정국, 홍영철, 박명호, 박진형, 김상윤, 박상봉, 라문석, 김경호, 김흥기, 이상수, 윤상수, 손태도, 강남옥, 윤성근, 김유수, 홍민석, 박숙련 등 문사들이 있었지요. 당시 대구는 ‘시의 천국’이었습니다. 고교 문예반이 시내 YMCA 2층 복도 등에서 시화전을 개최하는 게 유행이었는데 그게 문학과 문화의 교류 그리고 사교의 장이 되기도 했어요. 고3 때 돌연 나타난 박기영 시인(현재 충북 옥천에서 옻된장을 만들고 있다) 덕분에 우리 또래 문학도들은 더욱 뜨겁게 규합했지요. 80년대 중반 혜성처럼 나타난 장정일은 박기영이 ‘발굴’해 우리 집단으로 인도했고, 이 둘 모두 제가 하던 ‘시운동’의 동인으로 활약하게 되지요. 당시 이런 문화를 멀찍이 보고 있은 하창수(소설가)도 있었고, 또 여러 해 후배로 이 분위기를 익히 알고 자란 류철균(소설가 이인화)도 있어요.”

▲대구는 시문학이 왕성했는데 상대적으로 다른 장르는 어떠했나요.

“80년대까지 대구 문단은 시를 중심으로 크게 번성했지요. 여기에 중앙 문단에 진출해 대성하는 과정이던 김주영, 김원일, 이문열, 김원우, 서동훈 등 선배 소설가의 활약도 고무적이었어요. 이런 분들이 서울의 유명 문예지와 출판사의 문학인들을 대거 대구와 연계시켜 주기도 했어요. 한편 추리작가이자 언론인인 이상우 선생도 계셨고, 원로 작가이자 기업인인 김준성 선생, 평론가 권기호, 장윤익, 오양호 선생의 측면 활약도 있었지요. 아동문학에서는 김동극, 최춘해, 하청호, 박방희, 시조에는 류상덕, 김종륜, 박기섭 선생 등이 계셨어요. 이 지역 신문 신춘문예 상금이나 연재소설 고료 등은 언제나 최상위를 유지했고요. 그러니 대구 문단이 서울과 동격이라고 큰소리를 칠 수 있었어요. 지금은 여러 면에서 그렇지 않은 듯하네요.”

▲지방문학과 서울문학의 본질에 대해 잘 알고 있을 줄로 압니다. 특히 지방문인들은 마치 서울의 유명문인이 한국문단을 어떻게 하는 줄로 아는데 일견 맞는 지적이면서도 틀린 지적일 수도 있다고 봅니다. 과연 지방문인이 그렇게 소외받고 있다고 봅니까.

“문학은 지역을 배경으로 성장합니다. 그런데 그게 일정한 기성의 가치로 발휘되자면 좋은 매체가 있어야 하지요. 좋은 매체는 인문학과 문화예술에 대한 인식 수준이 높은 지역에서만 생겨나게 돼 있어요. 인문학과 문화예술의 수준은 동시대 경제 수준과 맞물리게 되고, 그건 또한 그 사회의 이데올로기 문제와 관련됩니다. 문학은 이 나라의 자본주의 체제에 크게 함몰돼 있습니다. 국가와 국민이 자본의 논리에 굴복당한 꼴입니다. 서울과 지방을 따질 것도 없게 됐습니다. 기대할 것이 있다면 서울·지방이 아니라 각 지역에서의 소집단 운동입니다. 나라의 위기에도 문학의 위기에도 개별화된 소집단운동이 각자 하나의 ‘정신의 실천화’를 이루고 그것들이 서로 소통·비판하면서 거대한 문화적 물결을 만들어 갔어요. 일제강점기인 1910년대 ‘창조’ ‘폐허’ 등이 우리나라 근대문학을 열었고 30년대 이런 소집단운동이 가로세로 결집하면서 문학의 다양한 꽃을 피웠지요. 신군부의 독재가 시퍼랬던 80년대 여러 동인지들이 시의 시대를 열었습니다. 이젠 인터넷이나 휴대전화가 작은 움직임을 세계로 전파할 길을 열었습니다. 지방과 중앙을 뛰어넘어야 합니다.”

▲고향이 뭐라고 생각하세요.

“고향은 스스로 ‘변방’이라 생각하는 경향이 있지요. 그럴 필요 있나요? 내가 사는 곳이 세계의 중심이죠. 떠난 사람은 떠나가서 머무는 그곳이 중심, 남은 사람은 남은 그곳이 중심. 그 중심에서 중심의 문화를 창출하는 게 문화요, 문학이죠. ‘고향 떠나 사는 사람이 말 쉽게 하네’라고 하실 수 있겠는데, 제가 고향을 떠나 느낀 게 바로 그런 겁니다. 저도 제 발로 이렇게 수시로 고향이라는 중심을 향해 찾아오잖아요.”

▲날로 살아가는 게 팍팍합니다. 세상은 한없이 거인스러워지는데.

“빚 없이 가는 게 중요합니다. 세계 자본주의는 앞당겨 돈 쓰게 해서 그 돈에 삶을 종속시키려 하고 있으니, 우선 그 빚을 넘어라고 주문하고 싶어요. 이건 삶의 문제이기도 하지만 정신의 문제이기도 합니다. 은행과 증권회사, 매체와 유통회사가 중심이 되어 버린 세계를 다시 생산·소비자가 중심인 세계로 돌려놓기. 그게 각 지역의 소집단운동으로 가능하다는 믿음으로 작은 내 일에 매진합시다.”

글·사진=이춘호기자 leekh@yeongnam.com

◆ 박덕규는

1958년생으로 대구에서 성장하면서 대륜중·대건고·경희대 국문과를 졸업했다. 80년 ‘시운동’ 창간호에 시를 발표하면서 시인 등단, 82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평론 당선으로 평론가 등단, 94년 문예지 ‘상상’에 소설을 발표하면서 소설가 등단. 첫 시집 ‘아름다운 사냥’(1984)을 낸 뒤 여러 장르의 작품집 발간. 소설집으로 ‘날아라 거북이!’(1996), ‘포구에서 온 편지’(2000), 장편소설 ‘시인들이 살았던 집’(1997), ‘밥과 사랑’(2005), ‘사명대사 일본탐정기’(2010), 탈북 소재 소설선 ‘함께 있어도 외로움에 떠는 당신들’(2012) 등이 있다. 지난해 30년 만에 제2의 시집 ‘골목을 나는 나비’(서정시학)를 발간했다. 제30회 이상화시문학상을 수상했다. 현재 단국대 문예창작과 교수.

영남일보(www.yeongnam.com),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

위클리포유인기뉴스

영남일보TV





영남일보TV

더보기




많이 본 뉴스

  • 최신
  • 주간
  • 월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