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세대 소리꾼 오영지씨

  • 이춘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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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5-10-02   |  발행일 2015-10-02 제37면   |  수정 2015-10-02
판소리 공연에 기타·아코디언·젬베·퍼커션까지…“소리엔 경계가 없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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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편제와 서편제의 기운을 동시에 갖고 있으면서도 국악과 양악의 경계까지 허물며 판소리 신지평을 열어가고 있는 소리꾼 오영지. 그녀는 자신의 소리에 세상과 삶의 고뇌를 담아 꽃처럼 환원시키기 위해 온갖 실험을 서슴지 않고 있다. 서울에서 대구로 내려온 지 5년째, 그동안 모두 여섯 번의 소리판을 열었는데 드러머 석경관의 리듬이 인상적이었던 두 번째 콘서트 ‘오영지 판소리 쑈우(사진 위에서 세번째)’에 큰 애착을 갖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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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 판소리계에 모처럼 희소식이 들려왔다. 경북도 무형문화재 제34호 판소리 흥보가 전수장학생이기도 한 젊은 소리꾼 오영지씨(36). 2013년부터 시작된 모두 6차례의 릴레이 소극장 오영지 소리판 공연이 ‘NO 초대권’, 유료관객으로만 전석 매진을 기록한 것. 요즘 무대가 워낙 서양음악 위주라 판소리 초청공연조차 가뭄인데 이런 척박한 여건에서 개인전 같은 판소리 콘서트를 1시간 이상 꾸려갔다. 그녀는 지금 시대와 소통하고 새로움을 추구하는 판소리 리모델링에 올인 중이다. ‘이게 판소리 맞아?’란 반응을 끌어내겠단다. 지난달 30일에는 차세대 여성 아코디언 주자인 홍기쁨과 협연했다. 아직 30대 중반. 그녀는 무대에 서면 순간 나이가 증발해버린다. 스트라이크존으로 팍팍 꽂히는 우람하면서도 애잔한 그녀의 소리에 객석은 울었다 웃었다 한다. 며칠 전에는 또래 소리꾼을 거제도 어느 공원에서 만나 팁박스 놓고 ‘판소리 버스킹’을 펼칠 정도로 자유분방한 기질. 지난달 28일 오후 5시 중구 대봉동 대봉치안센터 지하에 있는 그녀의 연습실을 찾았다. 철 지난 포스트가 벽에 옥수수 수염처럼 붙어 있다. 실내가 누추했고 옹색했지만 인터뷰 중간 쩌렁한 그녀의 목청이 그걸 제압해버린다. 열정과 포부라는 게 시름과 불편을 망각하게 하는 모양이다.

소리에 목숨 걸어야
자기 색깔이 나오고
관객을 감동시킨다

수소와 산소가 만나
물이 되듯
물리적 성질 변하는
그런 퓨전 추구

2013년부터 6차례
릴레이 소극장 공연
초대권은 NO
유료관객 전석 매진

안동에서 태어나 대구에서 자랐다. 대명여중을 나와 서울 국악고로 진학을 한다. 국립 국악중에 다녔던 한 살 터울인 친언니가 해금을 만졌다. 샘이 났다. 그 샘이 결국 그녀를 소리세계로 끌고 갔다. 대구MBC어린이합창단 단원이고 성가대에도 있었다. 초등학교 2학년 때 장구를 배우러 갔는데 연주보다는 소리할 재목이란 평가를 받는다. 흥보가 명창인 이명희 문하에 들어간다. 초등학교 5학년 때 KBS전국 어린이 판소리 대회에 출전해 수상한다. 하지만 전공하지 않은 언니는 국립국악중에 입학하고 그녀는 낙방. 매우 낙심했다. 그만둘 요량이었다. 그런데 다음해 우연히 전국어린이판소리 대회 광고에 나온 역대 수상자였던 그녀 얼굴을 보고 자극받는다. 다시 주운숙 문하에서 동초제 심청가를 사사한다. 국립국악고 시절 작고한 은희진 문하에서 동초제 춘향가를 배운다. 쾌활하고 괴짜였던 그녀는 고분고분한 국악고 생활에 잘 적응할 수 없었다. 자기와 살갑게 얘기할 친구가 없을 정도였다.

처음엔 살을 좀 빼서 댄스가수가 될 생각이었다. 서울예전 실용음악과 원서를 샀다. 그런데 그 길을 버렸다. 처음에는 이화여대 국악과에 시험을 쳤다. 물먹고 그 다음에는 지방의 모 대학교에 도전했는데 또 물을 먹는다. 패닉 상태였다. 부모와도 극도의 냉전. 서울 자취방 근처 대학교 잔디밭에서 세기말적 문체가 가득한 하루키 소설을 무작정 읽어댔다. 될 대로 되라는 식이었다. 한양대 국악과에 들어간 언니에게 자극받아 벼락치기 공부를 해서 서울대 국악과에 입학한다.

서울대 시절에도 판소리에 목을 맨 건 아니다. 그녀의 몸에는 여러 종류의 끼가 공존했다.

재즈 동아리에 가입해서 재즈보컬의 기본을 배운다. 힙합도 좋아해 동아리를 만들었다. 그것에 힘입어 2001년 최초로 우리 음악과 힙합 댄스를 접목했던 ‘서국묘성’이라는 팀을 만들어 활동한다. 당시 우리나라 힙합은 세계적이었다. ‘묘성’이라는 힙합 댄스 크루와 단순히 서울대 국악과를 줄인 ‘서국’이라는 팀을 합친 것이다. 힙합의 움직임에 맞춰 어울리는 국악을 링크시켰다. 율동과 호흡, 그리고 마음의 상관관계를 고민한다. 투자자가 있었지만 뭐가 잘못돼서 3년 만에 그만둔다.

그 다음에 영화 동아리에도 가담한다. 연기와 연출을 배우며 진보사상에도 잠시 침잠한다. 그녀는 안전핀을 제거한 수류탄 같은 존재였다. 상아탑에서는 판소리의 필살기를 가르치지 않았다. 그냥 순수 국악이론만 배웠다. 속으로 ‘과연 교수님들은 우리를 위해 뭘 할 수 있나. 판소리에 필요한 건 가르쳐주지 않는 이 현실은 어떻게 해석되어야 하나’라며 분통을 터트렸다. 종교와 사상에 더 치중했다. 현재 국립국악원 국악연구실장으로 있는 송지원 교수로부터 악기에 대한 새로운 해석, 작곡가 김대성 선생으로부터 음악을 다차원적으로 인식하는 법을 배웠다. 송순섭(적벽가 무형문화재) 문하에서는 말과 소리의 차이, 등장인물 분석에 따른 음색의 변화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절감한다.

어느 날 타계한 소리꾼 안향련의 소리를 접한다. 이 바닥에서는 요절한 천재 명창으로 불렸던 그녀의 소리를 듣고 나선 ‘그녀처럼 노래하다가 죽고 싶다’는 마음이 생겨난다. 선배들과 ‘미아리’란 작품을 올렸다. 작곡가 겸 한국예술종합학교 총장을 역임한 이건용 선생이 작곡하고 이태원이 편곡한 퓨전 국악 가요다. 유인촌 극장으로 불리는 유시어터에서 정가악회 멤버와 함께 공연했다. 그날 비로소 소리가 좀 되는 것 같았다. 판소리를 특정 장르에 가두어선 안 된다고 생각했다. 판소리와 가요의 구분이 아니라 음악 장르별로 열정을 분리시키지 않고 음악 그 자체의 본질에 충실하고 싶었다. 그녀에겐 판소리, 민요, 가요, 팝송의 경계가 점차 의미가 없어졌다.

어느 날 서울의 신세대 판소리꾼이 ‘타루’라는 창작판소리뮤지컬에 다 모여든다. 그녀도 객원으로 참여한다. 타루와 만나면서 ‘판소리는 일종의 극음악’이라고 여겼다. 2005년 서울대 국악과 정기연주회 때 수궁가 속 거북이 역할을 한다. 극적인 발림을 연출했다. 인상적이었던지 지금도 그녀를 보면 거북이라고 놀려대는 교수가 있다. 거기서 판소리와 놀이의 관계를 알게 된다.

일단 먹고사는 문제가 컸다.

KTV 안숙선의 소리마당 구성작가로 들어간다. 판소리에 대한 절실함이 있는 건 아니었다. 그냥 자신이 계속 이 일을 해야 하는지가 화두였다. 문득 단편영화 감독이 되어 있었다. ‘괜찮아 영희야’ 등 2~3편의 공동감독 및 주연배우로 활동했다. 이때 대구의 아버지가 뇌출혈로 두 번째로 쓰러진다. 동시에 집안에 악재가 닥친다. 소리보다 먹고사는 문제가 더 컸다.

‘일단 소리를 그만두고 포도청에 충실하자.’ 배운 게 도둑질이라고 돈 벌 수 있는 길도 소리밖에 없었다. 일단 유치원에 가서 국악놀이 강사 및 학원 입시 강사가 된다. 하지만 우울증에 걸린다. 그냥 사는 게 허무하게 여겨졌다. 음악에 대한 욕심까지 증발하고 있었다. 2009년에 21세기 한국음악 프로젝트에 ‘시로’라는 이름으로 나갔다. 국립국악원 주최였다. 그때 1등 하면 서울에 남고 2등 하면 대구로 가기로 다짐한다. 2등을 했다. 그래서 2009년 가을에 멍한 가슴만 안고 대구로 내려온다.

하지만 그게 전화위복이 됐다.

한국음악을 전공한 김성혜 박사에게서 연락이 왔다. 정순임 선생(경북 무형문화재 판소리 흥보가 동편제)을 소개받는다. 비로소 판소리가 운명이란 걸 절감한다. 3명의 여자 스승, 2명의 남자 스승이 지나갔다. 빈손으로 대구에 와서 20여차례 무대에 섰다. 하지만 아직 창작 판소리는 관찰 대상이다. 시대를 더 탐독하고 싶다. 그래야만 품어야 할 판소리를 창작할 것 같다. 민초와 시대의 아픔을 판소리로 닦아주고 싶다. 아직은 칼을 갈아야 할 시기다.

▲ 퓨전국악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

“‘퓨전’이라는 말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물리적으로 섞는 퓨전은 설탕과 물을 섞는 것 같다. 수소와 산소가 만나 물이 되는 것 같은, 원소 자체가 바뀌는 퓨전이어야 한다. 그걸 위해 기타, 아코디언이나 젬베, 퍼커션 등 타악기까지 동원한다. 흥보가 중 ‘제비노정기’란 대목을 보자. 옛날 말투라서 관객에게는 어렵다. 이걸 쉽고 재밌게 보여주는 게 소리꾼이 해야 할 일이다. 기타리스트에게 특정 부분을 블루스로 연주해 달라고 하거나 리듬감을 더 살려 달라고 하기도 하고 내가 쉴 때 같이 쉬어 달라고 주문한다. 심지어 공사장 소음도 전자음악으로 만들어 내 공연에 사용했다. 물론 원형은 원형대로 지켜야 한다. ”

▲ 본인이 가장 잘한다고 여기는 대목은.

“‘심봉사 눈 뜨는 대목’은 역시 오영지란 생각이다. 집에 있는 아픈 아버지를 품고 부르면 더 절절해진다. 소리를 할 때 항상 속으로 ‘오늘 세 명은 꼭 울리고 간다’고 다짐한다. 눈 뜨는 대목의 경우 흉내만 내서는 어림없다. 100% 심봉사이어야만 한다. 기교의 문제가 아니다. 진정성의 문제다. 삶의 깊이 문제이고 감정이입 차원의 문제다. 그냥 눈만 홉떠선 관객을 절대 감동시킬 수 없다. 목숨을 걸어야 자기 색깔이 나온다.”

▲‘득음’의 실체는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 내가 무슨 득음을 논할 수 있겠나. 모르겠지만, 득음은 자기가 판단하는 게 아니라 남이 판단하는 대상인 것 같다. 득음은 무용담이 아니다. 더 큰 장벽을 찾는 자가 바로 득음한 자인 것 같다.”

생애 첫 소극장 릴레이 오영지 소리판 공연의 첫단추는 2013년 대구시립국악관현악단 대금수석인 양성필 선생의 남구 대명동 연습실 ‘수오재’에서 흥보가로 시작됐다. 두 번째 공연은 ‘세모라미’라는 공연팀에서 연락이 와서 ‘오영지 판소리 쑈-우’로 꾸려졌다. 이때 드러머 석경관의 젬베와 전일환이라는 작곡가와 기타 협연을 시도했다. 세 번째 공연은 방천시장에 있는 ‘아트스페이스 청춘’에서 ‘보듬어주는 생활의 노래 남도민요’로 녹여냈다. 어머니뻘 되는 제자와의 합동공연이다. 막걸리와 전도 팔았다. ‘우리 남편은 담배를 태웁니다. 왜 담배를 피우냐고 잔소리를 하면 너는 왜 노래를 부르냐고 잔소리합니다. 그래서 오늘도 남편은 담배를 태우고, 저는 오늘도 노래를 합니다’ 등과 같은 눈물 나는 자기 이야기를 관객에게 들려줬다. 다섯 번째 공연은 수성구 상동 ‘공간 울림’에서 끄집어낸 자폐아동들을 위한 ‘돋움음악회’였다. 지난 5월 남구 대명동 ‘꿈꾸는 씨어터’에 싹을 틔운 여섯 번째 공연은 ‘Now and then’. 옴니버스 영화를 생각하며 만든 작품이다. 호메로스의 오디세이아에 나오는 사이렌을 생각하며 뱃노래를 편곡해 ‘사이렌의 뱃노래’로 만들어 버렸다. 공사장 소음을 전자음으로 만들어 ‘우리네 고장 좋고 좋네’라는 풍자곡으로 불렀다. 기타리스트 이동우와 젬베 연주자 이보람의 도움으로 부르는 ‘제비노정기’를 올렸다. ‘사랑가’를 부르며 옆 화면에는 곤충들의 교접 장면들을 틀어줬다.

 

◆ Comming soon 오영지 소리판

 

12월3일 대구시민회관에서 7회 콘서트인 ‘오영지 소리판-흥보가 톱아보기(자세히 보기)’는 새롭게 주물러보는 흥보가다. 흥보가를 완창하는 데 중간중간에 아코디언과 기타, 젬베 등이 묶인다. 오는 12월10일에는 수성아트피아에서 ‘한국의 구음, 판소리와 정가’를 준비중. 010-3270-5150


글·사진=이춘호기자 leekh@yeongn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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