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열 칼날에 全文이 삭제된 ‘빈 사설’마저 준엄했다

  • 이은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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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5-10-08  |  수정 2015-10-08 10:03  |  발행일 2015-10-08 제20면
때론 백지로 때론 준열한 통박으로…영남일보 名사설에 비친 시대정신
20151008
백판으로 나온 1963년 4월9일자 2면의 사설란.


한 줄의 기사는 세상을 바꿀 수 있다. 언론의 힘이자 존재 이유다. 특히 기사에 해석과 의견이 덧붙여진 사설은 시대적 상황과 맞물릴 때 폭탄만큼 파괴적 영향력을 보여줬다. 짧은 시간 동안 격동기를 거친 한국사회에서 유달리 많은 명사설이 등장하는 이유다. 세계적으로 이데올로기 투쟁이 본격화된 해방기에 창간하여 6·25전쟁, 3·15 부정선거, 4·19, 5·16, 유신체제, 80년의 봄, 민주화 투쟁, 지방자치 실시 등 수많은 격동의 역사 현장을 지켜온 영남일보에도 대구·경북과 대한민국의 지형도를 바꾼 명사설이 많이 탄생했다. 시대를 꿰뚫어 보는 냉철한 시각과 차가운 이성을 바탕으로 객관성과 논리를 잃지 않으면서, 공동체와 인류애에 바탕한 뜨거운 가슴으로 써내려간 영남일보의 명사설들을 살펴본다.

혼란의 시대, 자기반성과 원칙을 말하다

1945년 10월11일 창간∼

창간사서 과거 반성과 함께
당파 초월 진실한 보도 다짐
46년 8월1일 ‘원칙은 하나’
불편부당 社是 면면히 이어


광복 직후 대구·경북은 신문의 공백상태였다. 당시 지역에서 발행되는 신문이라고는 일본인에 의한 일본어 신문인 ‘대구일일신문’이 전부였다. 신문 발행에 필요한 우리말 활자를 구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해 9월 조선상공신문 경북지사장이던 한응렬씨는 직접 ‘우리’ 신문 창간에 나섰다. 1945년 10월11일 13명의 동인은 아트지에 인쇄된 타블로이드판 2면짜리 창간호 300부를 찍었다. 누구에게도 영향을 받지 않을, 그래서 신문 본래의 목적을 실현할 수 있는 순수한 신문, 신문다운 신문을 발행하겠다는 그들의 간절한 꿈이 이뤄지는 순간이었다.

영남일보는 과거에 대한 자기 비판과 함께 광복 조국의 미래에 대한 열정으로 가득찬 창간사를 통해 영남일보의 창간 정신을 분명하게 밝혔다.

“원시 우리들은 찬연히 빗나는 태양의 국민이었다. 그리고 세계에 잇서 누구에게도 뒤떠러지지 아니한 숭고하고도 아름다운, 문화에서 훈육바다온 고결하고도 진정한 백성이엿노라. …… 비로소 우리의 생명은 우리 조선의 선배와 세계각제국의 힘으로서 훌륭히 구제되여 건전한 자주생명을 창조하려는 열과 역량을 가지고 무궁화 삼천리강산을 새로히 건국하려는, 참다운 일꾼이 되고저 우리는 강호첨위 앞에 일간 영남일보를 여기에 창간하여 널이 동포압패 보내게 되엿다.”

영남일보 창간사에서 눈길을 끄는 것은 우선 과거에 대한 솔직한 반성이다. 모두 일제 치하의 언론인이었던 창간인들은 자신의 행동이 일제를 위한 ‘주구적 행동’이었으며 우리 동포에게는 ‘민족성을 해독으로서 전파시킨 미균제조자’였다고 고백한다. 당시 대부분의 친일파가 과거 행적을 감추려 하거나 변명으로 일관했던 것과는 대별되는 행동이다. ‘청류도 정지성을 가짐에, 부식됨과 같이 조국의 역사가 조금이라도 멈출 수 없다는 사명감에 신문을 발행한 동인들은 창간사를 통해 당파와 알력을 초월하고, 삼천만 동포에게 진실한 보도전사가 되겠다’는 다짐을 한다. 좌우익 대립의 혼란 속에서 편견 없는 진실된 보도라는 가치는 신문이 가져야 할 기본적이면서 근본적인 정신이었다.

창간 이후 영남일보가 꾸준히 내세운 사시는 불편부당이었다. 이러한 정신은 사설을 통해 면면히 이어져왔다. ‘자유인의 자유’(1945.12.4.), ‘민중이여 현명하라’(1946.2.1.), ‘정치는 예술이다’(1946.7.9.), ‘원칙은 하나뿐이다’(1946.8.1.), ‘자유는 방종이 아니다’(1946.2.15.), ‘3·1 정신으로 결집하다’(1948.3.1.) 등 창간 초기 일련의 사설들은 이러한 성격을 잘 보여주는 대표적 사설들이다.


20151008
1964년 8월29일자 2면의 언론윤리위법 사설.

독재의 시대, 저항정신을 보여주다

1960년∼80년 11월 폐간

‘작은 구멍을 메꾸기 위해서…’
60년 4·19 당시 정부에 경고
79년까지 강권정치 항거 계속
‘군검필’ 난도질 당하다 절필

굵직굵직한 현대사의 사건에서도 영남일보의 사설을 통해 퍼진 목소리는 울림이 컸다.

4·19 혁명 당시에는 1면에 고대생들의 데모를 톱 기사로 보도하고 ‘작은 구멍을 메꾸기 위해서 더 큰 구멍을 파는 방식’이라는 제목의 사설을 실어 정부 당국자들이 실정을 인정하지 않고 분출하는 민중의 울분을 강압적으로 저지하려는 처사는 자멸에의 길임을 경고했다. 비상계엄령이 내려 사전검열을 받아야 했지만, 영남일보는 굴하지 않고 경북대를 비롯해 청구대, 대구대, 효성여대의 데모 상황을 상세히 보도했다. 하지만 20일 이후에는 검열을 통과하지 못해 전문이 삭제된 빈 사설이 이렇게 실리기도 했다.

‘이들 젊은 학생들은 순수하다. 아무 사심이 있을 리 없다. 권력에 대한 침흘림도 사권에의 추구도 없다. 돈과 계집에의 취한 관심도 명예심에의 향수도 없다. 하물며 부질없는 소영웅심리가 있을 까닭이 없다. 이들에게는 오직 희망에 찬 내일이 있을 뿐이다. 찬란한 태양-축복된 아침이 있을 뿐이다.’

1979년 비상계엄이 선포되면서 계엄군은 6일간 영남일보에 주둔하고 신문검열에 나섰다. 1면에 4호 활자로 ‘군검필’이란 글자가 매일 매일 선명하게 찍혔다. 11월27일에는 사설 없는 영남일보가 발행되기도 했다. 영남일보는 2면 하단에 알림을 게재해 ‘사정에 의해 오늘 사설 못 싣읍니다’고 밝혔다. 급박하게 진행되는 계엄하 정국 및 시국의 변화로 정치사설이 문제가 되어 전문이 삭제된 것이다. 잊지 못할 비운의 날이었다.

시대의 칼바람은 이어졌고 영남일보는 1980년 11월25일자 지령 1만1천499호로 폐간됐다. 군데군데 문장이 검열에 의해 삭제되었지만 고별 사설은 비감했다. 1면에 실린 ‘자유성’도 원고 뒷부분이 완전히 삭제되어 게재되었다.

지역·독자와 함께, 창간정신을 잇다

1989년 4월19일 복간∼

복간사서 權·言유착 배격 다짐
91년 4월19일·2011년 10월9일
‘지역 소식 지역 이익에 충실…’
지방언론의 소명 수행 되새겨

복간 이후 영남일보는 사설을 쓰는 기본 자세로 권력과 언론의 유착을 배격하고 제도권 언론으로 비난받은 지난 한 시대의 언론자세를 단호히 거부할 것을 독자들에게 다짐했다.

“신문이 사회의 거울이라면 사설과 칼럼은 신문의 거울이다. 신문이 사설과 칼럼 등 의견란을 통해 막중한 계도적 기능을 잘 감당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공정성과 신뢰성이 확립되어야 하고 자주·중립·공익의 기준이 공정성·신뢰성 확립의 절대 전제가 된다. 영남일보의 사설과 칼럼은 이것도 옳고 저것도 옳다는 식의 양시론, 구렁이 담 넘기식의 언어유희, 권력송덕문을 쓰는 것 등을 스스로 경계하고 오직 치열한 문제의식과 민주의 잣대로 사상 뒤에 숨은 진실을 밝혀내고 구시대적인 권위주의나 권력의 독선을 바로잡는데 주력할 것이다.”(‘이런 사설·칼럼을 쓰겠다’. 1989.4.6.)

“본격적인 지방시대를 맞아 더욱 지방언론의 자세를 견지할 것이다. 이웃의 작은 아픔이 먼 데 사람들의 아픔보다 더 절실히 와 닿고 이웃의 작은 기쁨이 모르는 사람의 큰 기쁨보다 더 소중한 인지상정처럼 지역소식 지역이익에 충실하겠다는 뜻이다.”(‘지방시대 지방언론’. 1991.4.19.)

“영남일보는 지방분권과 K2공항 이전 및 인근 주민의 소음피해 현황, 동남권 신공항 건설 등에 시·도민의 여론과 역량을 결집하는데 온 힘을 다했다. 수도권 언론의 중앙집권적 사고에 맞서 지역균형발전 논리 개발로 지역의 이익을 대변하는데 전력했다. 1990년대 이동민원상담실을 운영해 주민들의 고충 해결에 나선데 이어 요즘 동네기자 및 시민기자 활성화로 독자들에게 다가가는 지역밀착형 기사를 발굴하는데 앞장서고 있다. 영남일보는 어떤 어려운 여건 하에서도 지역민의 눈과 귀가 돼 그들의 목소리를 생생히 전하고, 여론을 결집하는 구심점 역할을 다할 것이다.” (‘지역의 소중함을 되새기며’. 2011.10.9.)

1989년 4월19일 복간 특집호 1면에는 ‘민주·통일·바른 향토지’라는 제하의 복간사와 함께 박용규 논설실장이 쓴 논설을 통해 “영남일보의 목표와 방법, 그 처음과 끝은 순수한 향토신문이라는 창간정신”임을 밝혔다. 이후 지금까지 영남일보는 ‘독자와 함께 전진하는 향토지’(1990.4.19.), ‘지방시대 지방언론’(1991.4.19.), ‘독자와 함께 성장하는 향토지’(1992.4.19.), ‘독자제일주의 영남일보’(1993.4.19.), ‘지역민과 더불어’(2003.10.10.), ‘독자와 하나되는 신문’(2007.10.11.) 등의 사설을 통해 독자제일주의 정신과 지방시대 지역신문의 역할을 성실히 수행하고 있다.

이은경기자 lek@yeongn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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