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 캠페인 ‘책읽는 도시 행복한 시민’ 책 읽어주는 남자] 벤야멘타 하인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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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5-11-21   |  발행일 2015-11-21 제1면   |  수정 2015-1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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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제이들이 블루스 기타리스트 로이 부캐넌을 소개할 때 ‘기타리스트들의 기타리스트로 불리는 사람’이라는 수식어를 붙이곤 했다. 대중에게 널리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선수’들의 세계에서는 추앙받는 사람이라는 의미다. 소설가들의 세계에서는 로베르트 발저(1878~1956)가 그런 사람일 것이다. 그는 프란츠 카프카, 로베르트 무질, 헤르만 헤세, 발터 벤야민 등으로부터 높은 평가를 받았지만 대중에게는 알려지지 않았다. 수십년간 묻혀 있던 그의 소설은 탈근대 담론이 본격화한 1970년대 이후 다시 주목을 받게 됐고, 발저는 이제 스위스의 국민작가 반열에 올랐다고 한다.

‘벤야멘타 하인학교-야콥 폰 군텐 이야기’(문학동네, 2009)는 1909년 독일에서 ‘야콥 폰 군텐-일기’라는 제목으로 출간됐다. 귀족 가문 출신의 소년 야콥이 하인을 양성하는 학원에서 지내며 쓴 일기 형식의 소설이다. 시작은 이렇다.

“우리는 여기서 배우는 것이 거의 없다. 가르치는 교사들도 없다. 우리들, 벤야멘타 학원의 생도들에게 배움 따위는 어차피 아무 쓸모도 없을 것이다. 말하자면 우리 모두는 훗날 아주 미미한 존재, 누군가에게 예속된 존재로 살아갈 거라는 뜻이다. 우리가 받는 수업은 우리에게 인내와 복종을 각인시키는 데 가장 큰 의의를 둔다.”

야콥이 인내와 복종을 참지 못하고 뛰쳐나온다거나, 자신이 그 누구에게도 예속될 수 없는 자유인임을 깨닫고 세상에 도전하는 일은 없다.

 

성장소설, 교양소설에서처럼 자아의 발견이나 더 나은 존재로의 발전 따위는 없다. 굳이 주인공의 변화를 찾는다면 마지막 부분에 나타난다. “나 개인은 그저 영(零)에 지나지 않는다. 이제 이 펜도 던져버리는 거다. 생각하는 삶일랑 이제 집어치운다.” 그런데 이건 성장이라기보다 퇴보에 가깝지 않은가.

 

이성의 빛을 따라 인류는 계속 전진할 것이란 낙관이 지배하던 시대에 이 소설은 자아완성이 아니라 자아소멸을 이야기한 것이다. 발저가 미래 세계에 대한 우울한 전망을 내놓으려고 한 것은 아니었겠지만, 100년이 지난 지금 이 소설은 현재를 이야기하고 있는 듯하다. 벤야멘타 학원의 이상을 체화하고 있는 완벽한 학생인 크라우스는 후기자본주의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의 모습과 닮은 구석이 많다.

 

그리고 “‘내가 만약 …한다면 어떨까?’라는 말로 나를 결박하거나 구속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만약’이라는 말도, ‘어떨까’라는 말도 더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라는 야콥의 말은 요즘 젊은이들의 독백처럼 들린다. 우리가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믿음을 잃어버린 세대, 자신들은 그렇게 믿었으나 자식들을 그렇게 키우지 못한 세대의 한숨 소리도  들리는 듯하다.

김광재(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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