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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이정선 ‘정신대할머니와 함께하는 시민모임’ 대표 겸 위안부역사관 ‘희움’ 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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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박진관기자
  • 2015-1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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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움 제품 판매 수익금, 위안부역사관 건립·운영 큰 보탬…관심 많이 가져달라”

안이정선 정신대할머니와 함께하는 시민모임 대표 겸 일본군 위안부역사관 ‘희움’ 관장이 위안부역사관 건립에 도움을 준 사람들의 이름을 새긴 유리판 앞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안이정선 관장이 위안부역사관 1충 전시실 안에서 미소를 짓고 있다.
안이정선 관장이 위안부역사관 2층 복도에 서 있다.
1998년 광복절을 하루 앞두고 경기도 광주시 퇴촌면 원당리 ‘나눔의 집’에 세계 최초로 ‘일본군위안부 역사관’이 건립됐다. 이어 2004년 부산시 수영구에 ‘민족과 여성 역사관’이, 2012년 서울에 ‘전쟁과 여성인권 박물관’이 설립됐다. 지난 5일 개관한 일본군위안부역사관 ‘희움’(대구시 중구 경상감영길 50)은 전국 넷째 강제위안부 역사관이다. 대구의 위안부역사관은 네 곳 가운데 가장 이상적인 사례로 꼽힌다. 위안부였던 고(故) 김순악 할머니가  “내가 죽어도 내게 일어났던 일은 잊지 말아 달라”고 유언하며 남기고 간 5천400여만원이 역사관 건립 종잣돈이 됐다.  이를 바탕으로 민간에서 자체적으로 역사관추진위원회가 발족되고 시민모금 등으로 이어졌다. 위안부역사관이 설립되기까지 대구여성회를 비롯한 시민단체의 역할이 컸다. 그 가운데 20여년간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의 인권과 명예 회복을 위해 노력해온 안이정선 정신대할머니와 함께하는 시민모임 대표의 헌신을 빼놓을 수 없다. 안이정선 대표는 대구지역 여성운동의 초석을 다진 인물이기도 하다. 그는 1995년 2월 대구여성회에서 정신대문제대책위원회를 결성하면서 대구지역 위안부 피해자들에 대한 복지 지원 활동을 시작했다. 1997년엔 최봉태 변호사, 곽동협 곽병원 원장 등과 정신대할머니와함께하는시민모임을 창립하는 데 주도적 역할을 했다. 그는 10년간 대구여성회 회장을 역임하면서 성매매와 결혼이주여성문제 등에도 특별한 관심을 가졌다.  안이정선 대표는 현재 ‘희움’의 관장과 대표를 겸하고 있다.


1990년부터 위안부문제 관심 가져
2012년 민간단체 자체적으로 추진
독지가의 후원·캠페인 벌이며 노력
정부·대구시·중구청 지원 이끌어내

희움은 ‘희망을 모아 꽃피움’ 의미
제품의 브랜드명이자 역사관의 이름
형광팔찌, 노트북·휴대폰 케이스
에코백·필통·파우치·가방·지갑 등
다양한 제품 인터넷 쇼핑몰서 판매

위안부역사관 1층에는 상설전시실
2층에는 기획전시실과 교육공간
내년부터 입장료 어른 2천원
어린이·청소년은 1천원 받을 예정

대구여성회 대표로도 10년간 일해
여성 불이익과 차별 없애는 데 공헌

▶위안부역사관 ‘희움’ 개관을 축하한다. 역사관 건립에 이르기까지 우여곡절이 많았던 걸로 알고 있다.

“힘들고 긴 여정이었지만 결국 해냈다. 개관하던 날 감개무량했다. 이런 날도 오는구나 싶었다. 2009년 일본군위안부자료교육관 건립추진위원회를 발족하고 이듬해 고 김순악 할머니의 건립기금 5천400여만원이 종잣돈이 됐다. 그해 자료교육관 명칭을 역사관으로 바꾸고 여성가족부, 대구시, 대구시교육청 등에 부지확보 등 지원을 요청했으나 기념관 건립은 국가사업으로 진행하는 것이 우선이고 민간단체 기념관 건립은 민간단체가 추진하는 것이 원칙이라면서 사실상 지원을 거부했다. 결국 2012년 민간단체가 자체적으로 추진하자는 뜻을 모으고 모금해 2013년 1차 역사관 부지를 매입했다. 수천만원을 후원한 독지가가 있었으며 주말마다 동성로 대구백화점 앞에서 길거리캠페인을 벌이며 팔찌 등을 팔았다. 노력한 결과 그해 국회 여성가족위원회가 역사관 건립 예산 2억원 지원을 결정하고 이듬해 2차 역사관부지를 매입했다. 후에 대구시가 2억원을 지원하고 지난해 8월 역사관 터잡기 행사를 가졌다. 중구청이 근대건축물 리노베이션 사업의 일환으로 4천만원을 지원했는데 역사관 건립에 총 13억5천여만원이 들어갔다.”

▶대구시가 뒤늦게 동참했는데.

“2010년초 대구시 중구 관내에 부지를 물색했다. 대구시가 보유하거나 관리하는 부지를 달라고 했는데 시내에는 없고 팔공산자락에 있는 폐교 두 칸이 있다고 하더라. 역사관은 입지가 중요한데 누가 그곳까지 가서 관람을 하겠나. 그래서 우리가 직접 하겠다고 선포하고 모금을 하고 부지를 확보했다.”

▶위안부역사관에 ‘희움’이란 명칭이 있는데 희움은 무엇인가.

“희움(Heeum)은 ‘희망을 모아 꽃 피움’이란 의미를 가지고 있다. 정신대할머니와함께하는시민모임이 2012년 출시한 브랜드다. 인터넷 쇼핑몰을 운영하는 희움에선 고 김순악·심달연 할머니의 원예압화(press flower) 작품을 모티브로 한 다양한 제품을 판매하고 있다. 예컨대 형광팔찌, 노트북과 휴대폰 케이스, 에코백, 필통, 파우치, 가방, 카드지갑, 편지지 등이 있다. 고려대 ‘인액터스 블루밍 프로젝트(Enactus Blooming Ptoject)’는 ‘Blooming Their Hopes With You(당신과 함께 그들의 희망을 꽃피움)’란 캐치프레이즈로 위안부 문제를 비즈니스 모델로 전환시킨 프로젝트다. 시민모임과 블루밍이 희움이란 브랜드를 론칭했다. 희움 제품을 판매한 수익금이 위안부역사관 건립에 큰 보탬이 됐다. 희움의 팔찌는 국내는 물론 해외에서도 불티나게 팔렸다. 2013~2014년 11만여개가 판매돼 2억4천669만원, 이듬해 4억9400만원을 모았다. 희망을 꽃피운 사람들의 정성을 담아 역사관의 이름도 희움으로 했다. 일본군 위안부 문제 해결을 당신과 함께 꽃피운다는 뜻도 있다. 앞으로 역사관을 운영하는 데도 희움의 수익금이 들어간다. 희움이 잘 돼야 운영하는 데 애로가 없어진다. 많이 홍보해 달라.(웃음)”

▶역사관 전시실은 어떻게 운영하나.

“1920년대 일제강점기 적산가옥을 리모델링했다. 공사를 진행하는 가운데 1926년 일본신문이 벽지로 사용된 걸 발견하기도 했다. 건물을 리모델링할 때 안뜰에 있는 라일락 나무는 그대로 두었다. 집을 지을 당시 심었으리라 추정되는데 90년 된 나무와 피해 할머니들이 살아온 시기가 비슷하다. 봄이 되면 하얀 색의 라일락꽃이 피는데 마음이 짠하다. 이렇듯 건물 자체에 스토리가 중첩돼 있다. 역사관은 지상 2층(연면적 273㎡)으로 1층은 상설전시실, 2층은 기획전시실과 청소년을 위한 교육공간으로 꾸몄다. 상설전시실에서는 위안부의 역사에 관한 각종 기록물과 피해 할머니들의 증언 등이 자료와 영상으로 소개되고 2층 교육관에는 피해 할머니들의 다큐멘터리 사진, 각종 유품이 전시돼 있다. 매주 화~토요일 오전 10시부터 오후 6시까지 문을 열고 월요일과 일요일은 휴관하는데 휴관일에는 시민모임 활동을 한다. 역사관에서 희움 제품을 판매한다. 시민들이 부담 없이 찾을 수 있는 역사관이다. 올해까지 무료로 개방하는데 내년부터 어른은 2천원, 어린이는 무료, 청소년은 1천원을 받는다.”

▶위안부 피해 할머니에 대한 관심은 언제부터 가졌나.

“1984~88년 일본에서 살 때 원폭 피해자와 위안부 문제를 다룬 아리랑의 노래는 재일교포인 박수남 감독에 의해 영화로도 만들어졌는데 영화를 관람했다. 귀국해 대구에 안착했는데 90년 한국사회에서 처음으로 일본군 강제위안부 문제가 제기되면서 본격적으로 관심을 갖게 됐다.”

▶대구여성회 활동도 했다.

“1988년 대구여성회가 창립되고 이듬해 봄에 가입했다. 88년 큰 아이가 초등학교에 입학했는데 그걸 계기로 김영란, 김정금, 김정숙, 이경희, 강보향 등과 참교육을 위한 학부모 모임을 만들었다. 대구여성회는 90년에 부회장, 91년에 대표를 맡아 94년까지 하고 2002년부터 2007년까지 대표를 맡아 총 10년간 했다.”

▶기억 나는 활동은 어떤 게 있나.

“‘주체적인 여성, 평등한 사회’를 모토로 여성에 대한 불이익과 차별을 없애기 위해 노력했다. 대구 북구 대현1동 파출소 내 경찰관에 의한 성폭력 사건, 결혼퇴직제 반대 운동, 3·8 세계여성의 날 기념 제1회 대구경북여성대회, 성폭력 대책 대구시민단체협의회 발족 등이 기억에 남는다. 여성회에 상근 활동가를 두기 위해 후원계좌도 만들었는데 후원인을 모집하기 위해 동분서주했다. 1994년 회장을 끝내고 이듬해 대구여성회에 정신대문제대책위원회를 설립해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에 대한 지원활동을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의료후원단도 그해 만들었는데 곽동협 당시 곽병원 제1내과 과장이 대구·경북지역 위안부 할머니가 평생 무료로 진료를 받을 수 있도록 배려해줬다. 참 고마운 분이다. 곽 원장은 대구·경북여성단체연합이 주는 제1회 디딤돌상을 받았다. 그 밖에 성심복지의원, 김만제내과의원, 신피부비뇨기과의원, 박현탁치과의원, 자매가정의학과, 경희한의원, 동양당한의원 등이 동참했다. 또 위안부 할머니 그림전시회를 열어 할머니 10여분께 각각 100만원의 수익금을 드렸다.”

▶이름 앞에 ‘안’과 ‘이’는 각각 누구인가.

“‘안’은 어머니 성이고 ‘이’는 아버지 성이다. 90년대 중반 호주제폐지 운동이 일어났을 때 어머니 성을 앞에 붙였다. ‘안’이 남편 성이 아니냐고 묻는데 그건 아니다. 어머니가 생존해 계시는데 어머니 성도 붙이니 흐뭇해 하시더라.”

▶정신대할머니와 함께하는 시민모임을 만든 계기는 무엇인가.

“위안부 할머니들이 고령인데다 입퇴원을 반복하면서 다 돌아가시면 어떻게 하나, 할머니가 생존해 계실 때 위안부 문제를 해결하도록 노력하자는 생각이 들어 절박한 심정으로 모임을 만들었다. 대구·경북에 26명의 피해자 할머니가 있는데 생존해 있는 분은 이제 5명이다.”

▶20여년간 위안부 피해 할머니와 함께했는데.

“1993년 일본군강제위안부문제아시아연대회의에 참석했다. 이때 일본의 모리카와씨를 처음 만났다. 모리카와씨는 ‘버마전선 일본군 위안부 문옥주’의 저자로 양심적인 분이다. 이후 95년에 일본군위안부문제아시아연대회의에 참석하고 그해 3월 모리카와씨 초청 기자간담회, 제4회 세계여성회의 NGO포럼에 참석했다. 96년 문옥주 할머니가 돌아가시자 대구여성회에서 시민단체장으로 할머니 장례식을 했다. 97년 일본의 국민기금 허위성 폭로 및 시민기금 마련을 위해 ‘우리 할머니는 우리가 지킨다’는 캐치프레이즈로 시민캠페인을 벌여 170여만원을 모금했다.”

▶그 와중에 책도 쓰고 대학원에도 진학했다. 또 침뜸요법사 자격증도 있다던데.

“권태임, 심달연 할머니의 삶을 채록한 ‘강제로 끌려간 조선인 군 위안부들’이란 증언집에 내가 채록한 것도 있다. 계명대 여성학대학원에서 ‘일본군 위안부 문제 해결 운동의 전개 과정에 관한 연구’로 석사학위를 받았다. 2007년 뜸을 배워 자격증을 땄다. 2009년 9월부터 2010년 4월까지 스리랑카에 세 차례 봉사활동을 갔다.”

▶말투에 부산·경남 억양이 배어 있다. 대구에 오기 전의 삶이 궁금하다.

“부모님이 칠곡 출신인데 아버지의 직장을 따라 부산에서 살았다. 서울에서 대학(서울대 사범대 불어교육과 73학번)을 마치고 일본에서 머물다 88년부터 대구에서 살고 있다. 고등학교 시절 흥사단에서 활동했는데 대학에 가서도 흥사단아카데미에 가입해 봉사활동과 야학을 했다. 당시 흥사단 멤버는 서울대 학생운동의 중심이었다. 나도 학생운동에 가담했는데 담당 형사까지 있었다. 사범대 교지인 ‘청량원’의 편집위원을 맡은 게 계기가 돼 잠시 출판사에 근무하기도 했다. 부산 성모여고에서 3년간 교편을 잡다 결혼 후 다시 서울로 갔다.”

▶대구에서 30년 가까이 살았는데.

“같은 경상도라서 부산과 큰 차이는 없는 것 같다. 다만 남편 고향이 경기도라 남편이 대구에 적응하느라 처음엔 힘들었다. 남편이 식도락가인데 대구 음식이 좀 짜고 맵지 않나. 대구 사람은 입이 아니고 구강이라 하더라.(웃음)”

글·사진=박진관기자 pajika@yeongn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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