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 영남일보 문학상 단편소설 당선작] 슾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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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6-01-01   |  발행일 2016-01-01 제28면   |  수정 2016-01-01
20160101
서양화가 안창표 作

단이 눈을 떴을 때 병실에는 아무도 없었다. 다른 세 개의 침대는 말끔하게 정리가 되어 있었고 바로 옆 침대에 윤성의 여름 재킷이 반으로 접힌 채 놓여 있었다. 단은 그가 보이지 않아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조금 멍한 기분이 들었다. 그녀는 머리를 창문 쪽으로 움직여보았다. 맞은편 병동의 복도로 사람들이 오가는 것이 보였다. 매미 우는 소리도 들렸다. 바깥은 이제 한낮의 폭염 속일 테지만 그녀의 몸엔 조금씩 한기가 돌기 시작했다.



지난번 수술 때는 그저 단의 오른손을 한 번 꽉 잡아주는 걸로 말을 대신했던 담당의가 습관성 유산인 것으로 보인다고 우려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습관성 유산을 먼저 치료하지 않으면 시험관 시술은 의미가 없을 거라는 말도 덧붙였다. 습관성 유산이라…… 이런 말을 만들어내고 공식화하는 것은 어떤 사람들일까 하고 그녀는 맥락없는 의문을 가져본다. 그 단어는 그녀에게 이 모든 일의 처음부터 다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고 말해주는 것 같았다. 자기 속에, 그토록 미워하고 연민했던 사람들의 삶의 운율이 내재되어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 위해 젊은 시절을 다 보냈는데도 결국 미래의 아이에게는 그것을 납득시키지 못했다는 것도.



*

두 시간 전과 같은 뉴스를 다른 앵커의 목소리로 들으며 단은 저녁을 먹었다. 종일 만화영화만 방송되는 TV를 상상했던 어린 시절이 있었다. 상상이 현실이 된 지금 그녀는 거의 뉴스채널만을 본다. 게임 캐릭터를 상상하는 데는 실제의 인물들이, 그것도 뉴스에 등장할 만한 행위를 한 실제 인물들이 자주 영감을 불러 일으키기 때문이다. 몇 달 전에는 남편의 시신을 베란다의 고무통에 담아놓고, 여섯 살 된 아들에게 한 달에 두어 번 먹을 것을 들여주고 간 여자의 이야기로 떠들썩했는데 단은 그 여자를 FPS(1인칭 슈팅게임)게임에 사용될 캐릭터 시안으로 그렸다. 물론 여자의 얼굴을 보여주지는 않았지만 단에게는 그 여자가 어떤 이미지로 떠올랐다. 홀로 집에 갇힌 아이가 깊은 밤에 두렵고 악에 받친 긴 울음을 울곤 했다는 이웃의 증언도 방송되었다. 단은 그 모습도 자꾸만 떠올라 며칠 밤을 뒤척였다. 결국 그 장면도 그렸지만 그것은 그냥 개인 폴더에 넣어두었다. 파일 제목은 름이었다. 슬픔이라고 입력하려고 했는데 손이 떨렸던 모양이다. 그녀는 수정하지 않고 그냥 두었다. 그 낯선 단어가 그녀의 감정들을 가만히 빨아들이는 것 같았다.

윤성은 거래처 사장의 집들이에서 저녁을 해결하겠다고 했다. 그는 요즘 집에서 저녁을 먹는 일이 드물다. 두 번째의 상실은 단에게도 윤성에게도 혼자만의 시간을 요구했다. 슬픔을 나누면 반이 된다는 말은 자기 몫의 슬픔을 오롯이 견딘 후에야 가능한 일이다. 그런 후에야 내 것과 네 것의 질감과 무게를 느끼고 나눌 수 있는 것을 나누고 결코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을 가라앉히는 일을 함께하는 것이다.



밥을 다 먹을 때쯤 초인종이 울렸다. 윤성이 잊은 것이 있어서 다시 돌아온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인터폰 화면에는 뜻밖에도 12층 아이의 동그란 이마가 절반을 차지하고 있었고 그 이마 밑으로 미간 사이가 좀 벌어진 작은 눈이 화면을 바라보고 있었다. 단은 잠시 망설이다가 아이를 향해 질문했다.

누구세요.

아저씨 있어요?

아이는 이번에도 그녀의 말엔 대꾸도 없이 그렇게 되물었다.

아니, 없어.

단은 아이가 저번처럼 그대로 가 버리길 바라면서 대답했다.



같은 동 꼭대기인 12층의 개인택시를 모는 남자와 미용실을 하는 여자의 아이였다. 일주일에 한두 번 꼴로 남자는 만취했고 가재도구들을 부쉈으며 여자를 때리는 것 같았다. 8개의 동이 인접해 지어진 오래된 시영아파트에서 그런 식의 부부싸움은 흔하다곤 할 수 없어도 그렇게 놀랄만한 일도 아닌 것으로 비춰질 만큼의 빈도로 벌어지곤 했다. 습관성이건 우발적이건. 미용실 여자는 그런 날이면 아이를 바깥으로 내보냈다. 한밤이나 새벽일 경우가 많아서 아이는 아파트단지를 헤매다 결국 현관 앞에 쪼그리고 앉아 있거나 엘리베이터를 타고 오르내리며 시간을 보내는 모양이었다.



윤성이 야근을 하고 돌아오는 길에 아이를 데리고 들어온 적이 있었다. 단은 두유 한 팩을 내주고는 방으로 들어가 하던 작업을 계속했다. 컨셉 디자인을 수정해서 넘겨주어야 할 기한이 바짝바짝 다가오고 있을 때였다. 시안을 본 양 선배는 배경 수정까지 바라는 눈치였다. 그렇지 않았더라도 단은 아이와 엮이고 싶지 않았다. 아이의 얼굴이 싫기도 했다. 작고 까무잡잡한 얼굴에 조금 합죽한 입매, 상대적으로 기억나지 않는 코, 그런데 눈빛에 한기가 스밀 때가 있었다. 초점없는 멍한 눈으로 있다가 가끔씩 무언가를 집요하게 들여다볼 때 보이는 차가움이었다. 단은 그것을 알아보았다. 저런 얼굴을 하고 있는 게 저 애의 탓이 아니라는 것을 안다. 그럼에도 단은 아이에게 필요 이상으로 매정한 마음이 되었다. 윤성이 속으로 그녀를 타박한다는 것을 느끼고 있었음에도. 아이는 아이다운 기민함으로 단이 자기를 싫어한다는 것을 알아차린 모양이었다. 윤성을 따라서 집에 들어온 것은 그날 한 번뿐이었다. 가끔 밖에서 윤성이 아이스크림이나 자판기 음료를 사주곤 한다는 것을 알았지만 얼마 전 저녁에 벨을 누를 때까지는 아이를 잊고 있었다.

아이는 단의 기대대로 이번에도 별 말없이 돌아섰다. 그런데 단의 눈에 아이가 안고 있는 것이 보였다. 뻣뻣하게 경직된 작은 뒷다리가 눈에 들어온 것이다. 단이 미간을 찌푸리며 문을 열자 아이가 계단을 내려가려다가 무르춤하게 멈춰섰다. 생각대로 죽은 동물이었다. 자그마한 갈색의 고양이. 입 가에 피가 묻은 털이 뭉쳤고 뒷다리가 낙하의 충격을 고스란히 받은 듯 굳은 채 쭉 펴져 있었다.

단의 눈빛이 고양이의 사체에 가 닿자 아이가 합죽한 모양의 입술을 달싹거렸다.

화단에 떨어져 있었어요.

떨어져?

단의 음성이 갑자기 높아지는 바람에 갈라져 나왔다.

네, 화단에 떨어져 있는 걸 주워왔어요.

아이는 단의 생각을 읽기라도 한 듯 단을 바라보며 되풀이해서 말했다.

어쩌려고 들고 온 거니.

단은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떨어져 있었어요.

……

아저씨가 전에 동물도 죽으면 묻어주는 게 좋다고 해서요. 미련없이 다음 세상으로 건너갈 수 있을 거라고.

윤성은 아무런 종교도 믿지 않았지만 윤회만큼은 믿고 싶어하는 눈치였다.

누가 일부러 던진 거면 신고해야 돼.

그렇게 말하면서도 신고할 생각같은 건 없었다. 부산의 한 아파트에서 먹는 도중에 머리를 잘린 듯한 고양이 사체가 길고양이들의 사료를 담아주던 통에 담겨있었다던 뉴스를 기억하고 있었다. 길고양이들을 챙겨주던 아파트 여자가 울면서 인터뷰를 했다. 그녀가 담당구청에 신고를 했지만 돌아온 답은 길고양이들은 보호대상에 속하지 않고 증거가 없으면 처벌이 어렵다는 설명과 고양이 한 마리 갖고 뭘 그러시냐는 핀잔 섞인 말을 들었을 뿐이었다. 그러나 아이에게 그렇게나마 알려주고 싶었다. 아이는 아랫입술을 소리가 나게 한 번 빨았을 뿐 단의 경고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잠깐 기다리렴.

단은 다용도실에서 조그만 종이상자를 가져와서 고양이를 담게 했다.

늦었는데 집에 돌아가지 않아도 되니? 아저씨가 오면 묻어주라고 할게.

엄마한테서 카톡오면 들어가야 돼요.



단은 죽은 고양이를 집 안에 두고 잠이 드는 것도 싫어서 아파트 뒷산 산책로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묻어주고 오기로 했다. 아이가 조금 떨어져서 따라오는 것을 내버려두었다. 밤 산책을 하던 노인부부가 단과 아이를 미심쩍게 쳐다보곤 지나갔다. 부삽같은 것이 없어서 부드러운 흙과 검불 부스러기같은 것이 뒤섞인 곳을 찾느라 조금 헤매야했다. 나뭇가지로 땅을 조금 파내고 고양이를 묻었다. 몸집이 작아서 그마만해도 충분한 것 같았다. 고양이를 묻고 흙과 낙엽을 조금 쌓아올렸다. 아이는 별 말이 없이 단의 곁에서 단이 하는 양을 지켜보다가 거들다가 했다. 살구와 마루는 이렇게 묻어주지도 못했지. 잠깐 그런 생각이 들자 눈시울이 시큰해져서 마른침을 삼켰다. 살구와 마루는 아이들의 태명이었다. 하긴 아이의 심장 뛰는 소리를 들었을 때는 겨우 강낭콩만한 크기였을 것이다. 그녀의 손으로 묻어주지 못한 건 슈까도 마찬가지였다. 연한 갈색의 보드라운 털에 작고 앙증맞은 발이며 새까만 눈동자를 하고 있던 햄스터 슈까……이렇게 오랜 시간이 지났는데 완전히 잊히지 않는다.

이만하면 됐다.

고양이에게 할 말이라도 있니?

그녀의 입에서 저도 모르게 그런 말이 튀어나왔다.

아이는 멀뚱하게 단을 쳐다보더니 고개를 저었다.

카톡은?

아이는 한 번 더 고개를 저었다.



*

아줌마는 왜 내가 죽였다고 생각했어요?

아이는 식탁의자에 앉아 한 쪽 다리를 떨며 물었다. 몸집이 작고 야윈 어깨가 구부정한 아이는 보기보단 나이가 많았다. 봄이면 5학년이 된다고 했다.

난 그런 말 한 적 없다. 왜 그렇게 생각했니?

단은 아이가 한 것처럼 아이의 눈을 바라보며 거짓말을 했다.

사실은 내 방에서 떨어뜨려 보고 싶을 때가 있었어요. 고양이는 높은 데서도 사뿐하게 착지할 수 있대요.

거긴 12층이야.

그러니까요. 시험해보고 싶을 만한 높이잖아요.

왜 그러지 않았니.

12층이니까요.

아이는 쓱 웃고는 단을 바라보았다. 요 녀석 봐라, 하는 표정을 기다리는 듯이.

그러면서도 다리는 계속 떨었다.

그래 그 사실을 꼭 기억해두려무나.

단은 심상하게 말하곤 냉장고에서 팩에 든 두유를 하나 꺼내 아이 앞에 놓아주었다. 배아가 착상하는데 도움이 된다고 하여 냉장고에 재어둔 두유였다. 두유라면 진저리가 쳐질 만큼 많이 마셨다. 게다가 유통기한이 길어 버리지도 못했다.

아이는 잠시 입술을 내밀고 고민하는 듯하더니 빨대를 꽂고 단숨에 마셨다.

그런데 아줌마 미련이 뭐예요.

아이가 마시는 것을 생각없이 지켜보던 단은 잠시 말문이 막혔다.

글쎄. 마음이 남아있는 걸 말하는 걸 거야.

그 말을 들은 아이가 다 마신 두유 팩을 흔들어보였다. 빨대로 빨아올려지지 않을 양의 두유가 그 속에 남아 있을 것이었다.

이렇게요?

단은 아이에게 처음으로 마음이 약간 누그러졌다.

아이는 빨대를 계속 빨면서 공기가 올라오는 소리를 몇 번 듣더니 두유팩을 탁자 위에 내려놓았다.

고양이를 던진 건 아버지에요.

아이의 눈과 단의 눈이 마주쳤다.

그런데 죽인 사람은 아줌마 생각대로예요.

단의 눈이 또 한 번 아이와 마주쳤고 그 눈에 매서운 차가움이 서려 있는 걸 보았다.

단은 이번에는 거짓말을 하지 않았지만 그 눈을 피하지도 않았다.

내가 그 고양이를 빨래바구니에 넣어서 소파 옆에 가져다 두었어요. 엄마는 깨지지 않는 물건들을 아빠가 던질 수 있게 해놓거든요.

단은 아이가 왜 그랬는지 묻고 싶지 않았다. 그 마음을 짐작할 수 있다는 사실을 들키고 싶지 않았다. 그런데 아이는 집요했다.

아줌마는 왜 내가 죽였다고 생각했어요?

단은 대답하지 못했고 대신 아이가 식탁 위에 올려놓은 휴대폰이 드륵드륵드륵 세 번 진동했다.



*

토요일 오후 단과 윤성은 강릉으로 가는 길이었다. 두 번째 유산 후 처음으로 찾는 강릉이었다. 강릉엔 초등학교 2학년 때 교통사고로 부모를 잃은 윤성을 길러준 고모님이 살고 계셨다. 그녀는 독신이었는데 대학에서 철학강의를 하며 윤성이 경제적 자립을 할 때까지 뒷바라지를 해준 사람이었다. 그녀만큼이나 어린 시절의 얘기를 잘 하지 않는 윤성이 언젠가 고모님에 대해 말한 것이 기억났다.

“살림을 돌봐주는 도우미 이모님이 계셨지. 고모는 요리를 거의 할 줄 몰랐거든. 그리고 한 번 책을 읽으면 몇 시간씩 꼼짝도 하지 않아서 그런 날엔 몰래 방문을 열어보곤 했지. 고모가 그 안에 있나 확인해보려고…… 그러다 고모가 나를 발견하면 고모는 내 마음을 눈치 채고서 책상에서 일어나 나를 꼭 안아주었어. 고모 여기 있다. 계속 니 옆에 있을 거다. 그런 말들을 해주었어. 그러면 안도감과 동시에 무언가 서러운 감정이 들어서 엄마 아빠가 더 보고 싶어졌고 슬프면서도 미안해졌지. 그때는 그렇게 여러 개의 감정을 한꺼번에 소화해내는 게 힘들었던 것 같아.”

첫 아이가 들어섰을 때 윤성은 단을 끌어안고 한참 동안 서 있었다. 그는 지금 몇 개의 감정을 소화해내는 중일까…… 하고 단은 그에게 안겨서 그런 생각을 했었다. 정작 그녀 자신은 잘 실감이 나지 않았다. 병원에서는 4주차라고 얘기해주었다. 6주차엔 심장소리를 들려주었다. 의사는 배에 초음파 기계를 대고 이리저리 문지르더니 마침내 가만히 기계를 멈추었다. 아이는 겨우 강낭콩만큼 자랐다는데 아이의 심장은 믿을 수 없을 만큼 빠르게 뛰고 있었다. 살구야, 라고 아이의 태명을 부른 건 윤성이었다. 그녀는 입을 달싹여보긴 했지만 제대로 이름이 나와주진 않았다. 그 아이를 잃은 건 심장소리를 듣고 난 나흘 뒤였다.



아무래도, 그 애는 네게 거짓말을 한 것 같아.

별 말없이 운전에 집중하던 윤성이 갑자기 그렇게 말하는 바람에 단은 괴로운 기억에서 놓여날 수 있었다. 그녀는 갑작스런 말의 맥락을 헤아리느라 잠깐 어리둥절해졌다가 휴게소에서 커피를 마시며 며칠 전 아이가 찾아왔던 이야기를 했던 것이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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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화가 안창표 作

거짓말이라니?

이제 기억이 났는데 그 애 엄마는 심한 고양이 알레르기, 아니 동물 털 알레르기야. 엘리베이터에 반려동물을 안고 타려는 사람이랑 다투는 걸 본 적 있거든. 자기 팔을 막 걷어 보여주면서 항의하더라고. 집 안에 고양이를 들였을 리가 없어.

단은 아연해졌다.

하지만 왜 나한테 그런?

글쎄, 거짓말을 하고 싶었나보다. 너한테.

단은 앞으로 내밀었던 몸을 조수석 등받이에 다시 기대며 대꾸했다.

말도 안 돼. 난 그 애를 몰라.

그런데 왜 화단에 떨어져 있었다는 그 애 말을 믿지 않았어?

……

단은 말문이 막힌 채 잠시 창 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차창 밖에는 동해바다가 펼쳐져 있었고 제법 큰 파도가 밀려오다가 막 허물어지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아줌마는 왜 내가 죽였다고 생각했어요? 아이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그 말을 할 때의 아이 표정도 생생했다. 식탁의자에 앉아 한 쪽 다리를 계속 떨면서도 도전적인 눈빛으로 물었다. 그래 화단에 떨어져 있었어요, 라고 했었던가, 그 아이가.



너울성 파도 중에는 수천 킬로미터를 여행해 온 것도 있대.

……

이번에는 윤성이 잠자코 듣고 있었다.

저렇게 밀려오는 파도가 눈 앞의 바람 때문에 일어난 것이 아닐 수도 있다는 거지. 그런데 그런 생각을 할수록 내 자신이 구제불능처럼 느껴져. 마흔이 다 되어가는데도 아직도 과거탓을 하고 있으니.

그녀는 파도에서 눈을 떼지 않고 말했다. 파도는 밀려왔다가 허물어지고 허물어지고를 반복했다.

구제 불능이 맞을지도 모르지.

쌀쌀맞네.

과거에서 너를 구제할 수는 없을 거니까. 이미 지나가버린 걸 과거라고 하잖아. 어떤 사실들과 기억들을 잔뜩 남겨놓고. 그걸 먼저 인정해줘. 그리고 나서 좀 떨어져서 들여다보는 건 어때? 네 말대로 탓은 그만두고.

……객관적이 되란 거야? 어른스럽게?

단은 그렇게 대꾸했지만 자기가 듣기에도 억울한 목소리였다.

네 자신을 과거의 희생자로만 본다면 네 스스로에게 그리고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는 일을 하고도 깨닫지 못하게 될 거야.

윤성이 정색하고 이런 이야기를 꺼낸 것은 처음이었다. 전방을 응시하는 그의 오른쪽 이마와 눈언저리가 살짝 올라갔다. 눈 옆에서 이마로 이어진 커다란 갈색 얼룩이 같이 움직였다. 단은 그의 얼굴에 있던 그 점을 오랫동안 잊고 살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윤성과 단은 캐주얼한 분위기를 준 한정식집에서 처음 만났다. 그는 디자인팀 아트 디렉터인 양선배의 대학동기였지만 생각보다 나이가 많아보이지는 않았다. 그런데 오른쪽 눈 옆에서 이마 위쪽으로 갈색의 얼룩 같은 점이 시선을 단박에 끌 정도로 꽤 크게 자리잡고 있었다.

제가 더 일찍 와서 이런 후줄근한 모습은 안 보였어야 되는데 말이에요.

5분 정도 늦게 도착한 그는 손수건으로 연신 얼굴의 땀을 닦고선 미안한 듯 웃었다. 그가 웃자 오른쪽 눈가의 얼룩이 같이 움직였다.

음식이 한두 개씩 들어왔고 두 사람은 양 선배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공통적으로 호감을 갖고 있는 대상에 대한 이야기가 오가자 어색한 분위기가 조금 누그러졌다.

양태인 밑에서 일하기 힘들지 않아요? 직속 부하직원인가요?

예전에 회사 다닐 때 저희 디자인팀 아트디렉터였어요. 지금은 제가 프리로 일하고 있어서 일종의 갑과 을이죠. 제게 일감을 주시는.

아, 프리랜서시구나. 시간 관리하기가 힘들지 않습니까?

단은 그의 목소리가 마음에 들었다. 약간 비음이 섞인 낮은 목소리였는데도 거슬리지 않았다. 차분하게 말하는 태도 때문인 것 같았다. 대화가 끊어졌을 때도 무리하게 침묵을 깨뜨리려 애쓰기보다 음식을 먹는 일에 집중하면서 기다릴 줄 알았다.

가자미구이도 그렇고 갈치조림도 영 안 드시네요. 이 집 생선이 싱싱한 편입니다.

제가 생선을 못 먹어요. 비린 냄새 때문에 좀……

그렇죠? 아무래도. 비리죠.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어쩔 수 없는 특성 같은 거죠. 생선은 원래 비리다. 이렇게 생각해두면 그다음엔 생선의 다른 맛을 찾아갈 수 있어요. 생선의 비린 맛에만 집중하면 비리다, 안 비리다 밖에 느낄 수 없어요. 하지만 그걸 인정해버리면 몸통과 꼬리, 껍질이 가진 맛의 차이와 고등어의 비린내와 갈치의 비린내에 차이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대구와 명태의 담백함의 차이, 아귀와 복어의 쫄깃함이 다르다는 것도요. 그 많은 종류의 생선을 비리다 안 비리다로만 파악하면 생선 입장에서도 그렇고 단씨 입장에서도 그렇고 좀 억울하지 않겠어요?

그렇게 말하고서 그는 갈치의 가운데 토막을 솜씨 좋게 발라서 입에 넣었다. 그가 맛있게 먹는 걸 보니 아닌 게 아니라 조금 억울한 것 같기도 했다. 그가 입을 우물거릴 때마다 눈 옆의 갈색 점이 눈에 들어왔다.

그와 오랜 시간을 함께 보낸 지금, 단은 여전히 생선을 먹지 못한다. 생선은 원래 비리다라고 생각해두어도 여름이니까 덥지, 같은 말이 팔월의 폭염을 견딜 수 있게 해주지는 않는 것처럼 비린내음을 참을 수 있게 되지는 않았다. 그런데 그 얼굴의 점은 거의 의식하지 못하고 살아왔다.

아...점. 이상하게 들릴 지도 모르겠는데 난 별로 신경쓰이지 않았어. 처음 거울 볼 때부터 그게 있었으니까. 내 일부구나, 하고 생각했지. 당신이 내 점을 의식한다는 걸 알아차렸을 때는 좀 신경이 쓰였지만 당신이라는 거울 속에서도 익숙해질 거라고 믿었어.

만약 사랑에 빠지는 순간 같은 것이 실제로 있다면 그가 그렇게 말했을 때가 아닐까, 라고 그녀는 생각한다. 자신의 얼굴에 그렇게 큰 점이 있다면 내 일부구나, 라고 받아들이기 어려웠을 것이다. 왜라고 물었을 테고, 왜 나에게라고 물었을 것이다. 그의 그 태도가 사랑스러웠다. 그리고 그녀 삶의 얼룩조차 그렇게 받아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약삭빠른 마음이 그 순간에 함께 자리잡았다. 그것이 잘못이었을까.

과거의 희생자로만 산다면, 이라는 그의 말이 강릉에 도착해서도 내내 그녀를 따라다녔다. 나 자신에게, 그에게, 그 아이에게, 살구와 마루에게, 슈까에게 나는 무엇이었나.



*

아이를 다시 만난 것은 아파트 놀이터 옆 미니 농구장에서였다. 몇몇 아이들이 어울려 농구를 하고 있었다. 아이는 그 무리에 끼지 못하고 조금 떨어진 벤치에서 휴대폰을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어지간히 집중하고 있어서 단이 다가서는 것도 눈치채지 못했다. 그녀가 마트의 쇼핑봉투를 바스락거리며 옆에 앉자 아이가 힐끗 눈길을 주는가 싶더니 고개를 돌려버렸다. 그녀는 아이의 화면을 훔쳐보며 옆에서 한참을 끈질기게 기다렸다.

그거, 숲속을 지나는 사람을 잡아서 긴 초록색 머리칼로 간질여서 죽이는 초록마귀 그리냐프, 아줌마가 그린 거다.

거짓말!

아이는 게임 화면 속의 캐릭터와 그녀를 번갈아 보더니 단호하게 말했다.

단은 그러거나 말거나 자신의 스마트 폰에서 폴더를 열어 캐릭터를 완성하기까지 여러 개의 수정본 파일을 열었다.

원래는 이렇게 생겼었어.

아이가 호기심을 이기지 못하고 그녀의 폰 쪽으로 고개를 들이밀었다.

다음 달에 업데이트 될 건데 그때는 이런 무기들이 추가될 거야. 머리카락 색깔도 바뀌고.

여전히 미심쩍은 표정이다가 단의 그 말에 작은 눈이 반짝거리기 시작했다.

정말 아줌마가 그린 거에요?

단은 고개를 끄덕였다.

아줌마 이 게임 만드는 회사에 다녀.

그런데 너야말로 왜 나한테 그런 거짓말을 했니?

그녀는 추궁하는 어조가 되지 않도록 조심했다.

단의 질문에 아이는 시무룩해져서 툭하고 벤치를 찼다.

아줌마가 먼저 거짓말했잖아요.

예상했던 대답이었다.

그래. 미안해. 사과할게.

그녀가 순순히 그렇게 말하자 아이는 놀란 눈치였다. 뭐라고 말을 하려다가 농구를 하던 아이들이 소리를 지르며 왁자지껄하자 그쪽으로 눈길을 돌렸다. 한 녀석이 코트에 쓰러져 있고 그 위에 장난치듯 아이들이 포개져 뒹굴고 있었다. 벤치 옆에는 그 아이들 것으로 보이는 가방들이 한 무더기 쌓여있었다. 아이는 가방을 지키는 역할인 모양이었다.

전부 거짓말인 건 아니었어요.

아이는 작게 한숨을 쉬더니 벤치 아래턱에 다리를 올려놓고 발을 까닥거리며 말했다.

그렇게 해보고 싶었거든요. 근데 엄마가 고양이 같은 걸 데려오면 금방 눈치를 채버려서……

그게 거짓말보다 더 나쁜 거야. 알지?

아이의 눈이 순식간에 매서워졌다.

아빤 나를 집어던지려고 한 적도 있어요. 어릴 때, 학교 가기 전에, 그래도 기억은 나요.

이번엔 단이 한숨을 내쉬었다.

왜 사람들은 아이를 낳을까. 아이를 낳고 기르는 일이 그 부모의 삶 또한 자라게 하는 일이라고 어떤 이들은 말한다. 그런데 그 부모가 자라지 못하면 어떻게 되지. 자기 삶의 무게로 아이를 짓누르면 어떻게 되지.

무서웠겠구나.

……

그런데 네가 그렇게 하면 고양이도 너처럼 무서울 거야.

……

그리고 그런 고양이를 보는 너도 무서울 거고.

……

안 해봐서 무슨 말인지 모르겠지?

아이는 그녀의 말을 듣는 건지 어쩌는 건지 아무런 대꾸도 없었다. 그녀는 마트의 비닐봉투 끝을 빙빙 돌려 묶었다가 풀고 묶었다가 풀면서 얘기를 계속했다.

아줌마가 너만큼 작았을 때 햄스터를 키웠어. 아줌마한테도 그런 아빠가 있었거든. 너처럼 그런 아빠. 엄마를 때리는 아빠 말이야.

아이는 그녀를 바라보았다. 지금까지와는 다른 낯선 표정이었다. 그녀는 그런 아이의 눈을 마주보지 못하고 쇼핑봉투 끝을 돌리는 일을 계속했다.

엄마를 때리고 난 다음날에는 먹을 걸 잔뜩 사들고 들어오거나 분홍색 키티가방도 새로 사오고 햄스터도 사 주었지.

아이가 그녀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까닥거리던 발이 가만히 모아졌다.

그 햄스터가 어찌나 이뻤는지…… 연한 갈색 털에 작고 귀여운 발이며 새까만 눈동자가 아직도 생각이 나. 아줌마가 너만큼 어릴 때였는데 말이야. 기억이 나.

우리 반에도 햄스터 키우는 애 있어요.

그래?

두 마리.

아줌마는 한 마리만 키웠어.

죽었어요?

……응.

왜 죽었어요?

아줌마가 학교 뒷산에 갖다버렸거든.

왜요?

아줌마가 화가 많이 나서, 너무 화가 많이 나서, 그러면 안 되는데 그랬어. 아줌마 엄마가 아줌마랑 아줌마 아빠가 자고 있을 때 말도 않고 어디론가 가버렸거든. 며칠이 지나도 오지 않아서 무섭고 화가 나서 그러면 안 되는데 그랬어.

슈르르까라고 이름 붙이고 슈까라고 줄여서 부르던 햄스터를 상자째로 학교에 가져가서 뒷산에 내려놓고 집에 오던 길이 어제인 듯 생각났다. 뾰족한 가시덤불에 팔이 찔리는 것도 몰랐다. 마른 가시들이 양말에 잔뜩 붙어 있었다. 아무도 없는 현관에 쪼그리고 앉아 그걸 떼어내며 훌쩍였다. 다음날, 잠도 못자고 아침밥도 먹지 않고 헐레벌떡 학교에 뛰어 갔을 때 슈까는 상자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있었다. 얼굴과 내장이 날카로운 무언가에 쪼아진 채로. 작고 귀엽던 발이 비틀려져서.

아줌마

응?

그래서 그 햄스터 묻어줬어요?

아니. 무서워서 도망쳤어.

그 후로 한 번도 그 숲길로 가지 않았다. 엄마가 돌아왔으면 엄마의 손을 잡고 한 번쯤 갈 수 있었을 텐데, 라고 생각해 본 적이 있을 뿐이다.

아줌마, 이제 아줌마한테는 거짓말 안 할게요.

그래 고맙구나. 아줌마는 새 캐릭터를 그리면 너한테 보여줄게.

정말요?

그래, 네가 좋다면 아줌마 컴퓨터에 저장되어 있는 몬스터 원화도 보여주마. 아빠가 술에 취하면 아줌마 집에 벨을 누르고 네 이름을 대렴. 이름을 말하는 건 암호를 대는 거나 마찬가지야.

좋아요.

좋아. 이 동맹은 성립되었음.

아이의 눈꼬리가 둥글게 쳐지면서 합죽한 입매가 슥 올라갔다. 그것만으로도 단번에 개구진 소년의 얼굴이 되었다. 너는 그런 얼굴이었구나.



*

엄청나게 큰 무덤이었다. 무덤 쪽으로 휘어진 소나무들이 쭉 둘러서 있었고 키 큰 소나무들은 바람이 솨솨 불 때마다 이리저리 흔들렸다. 그 모습이 쓸쓸하고 교교했다. 무덤이 있는 언덕 아래로 구획이 잘 된 논들이 이어졌고 그 뒤로 비슷한 모양의 집들이 옹기종기 모인 작은 마을도 있었다. 무덤 쪽에는 바람이 많이 불었는데도 햇볕이 내리쬐는 양지에 자리잡은 때문인지 마을 쪽은 고요하고 평화로웠다. 윤성과 단은 마을 입구에 서 있었다.

무덤이 저기 있어.

윤성은 소나무 숲에 둘러싸인 큰 무덤을 가리켰다. 무덤 쪽엔 여전히 바람이 불고 있었다.

저렇게 큰 무덤이 왜 필요해. 아이들은 그렇게나 자그마한데.

단은 너무 커다랗고 바람소리가 울리는 그 무덤이 무서웠다.

무서워.

아이들이 기다리잖아.

윤성이 무덤쪽으로 걷기 시작했다. 그쪽은 바람이 점점 더 거세어지고 있었다. 다가가면 다가갈수록 윤성의 몸조차 흔들리는 것 같았다. 그녀는 큰소리로 계속 윤성을 불렀지만 그는 돌아보지 않았다.

잠에서 깨었을 때는, 아홉시 뉴스가 한창 진행되고 있었다. 목이 말랐다. 소파에 기댄 채로 잠이 든 모양이었다. 윤성은 오늘도 회식이 있다고 연락을 해왔다. 단은 그를 기다릴 참이었다. 슬픔을 나눈다고 그 우거진 어두운 숲의 크기가 줄어들지는 않을 것이다. 바람소리가 잦아들지도 않을 것이다. 그래도 들어가보아야 한다. 그 그늘 속으로.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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