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등을 넘어 공화국 대한민국으로 .3] 산재 공화국 대한민국

  • 구경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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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6-01-21   |  발행일 2016-01-21 제7면   |  수정 2016-01-29
근로자 5시간마다 1명꼴 숨져…안전 중심의 기업문화 시급하다
20160121

노동개혁을 둘러싼 정부와 노동계 간 갈등의 골이 깊어지고 있다. 지난 19일 노·사·정 대타협 파기를 선언한 한국노총은 정부가 노동5법(기간제근로법, 파견근로자법, 고용보험법, 통상임금·근로시간단축의 근로기준법, 산재보험법), 그리고 ‘일반해고’와 ‘취업규칙 변경요건 완화’ 등 양대지침을 일방적으로 추진하고 있다며 전면투쟁에 나서겠다고 선언했다. 반면 정부는 한노총을 겨냥해 ‘국민이 용납하지 않을 것’이라며 노동개혁을 독자적으로 추진하겠다며 맞서고 있다. 이같은 노·정 갈등은 오는 4월 총선과 맞물려 극단으로 치달을 전망이다. 그러나 정말 중요한 사실은 따로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바로 우리나라가 OECD 최고의 산업재해 국가라는 사실이다.

삼성 반도체 사태로 60명 사망
반올림 투쟁 9년만에 최종합의

사고사망 만인율 ‘선진국 5배’
연간 경제적 손실액 19조 육박

산업계 전반 외주화 급속 확산
안전관리 능력 약화로 이어져

취약계층에 사고 피해 집중돼
사회적 양극화 심화요인 작용

◆9년 만에 받은 사과와 보상

지난 12일 삼성전자 반도체 사업장에서 일하다가 백혈병 등 난치병에 걸려 사망하거나 고통받고 있는 퇴직 근로자, 그리고 그 유족 등이 삼성전자와 재발 방지안을 담은 최종 합의서에 서명했다.

이번 합의안의 골자는 반도체 사업장의 유해 안전성을 검증하는 옴부즈맨 제도를 도입해 직업병 추가 발병을 막자는 것이다. 이를 위해 삼성전자는 반도체 생산 핵심 사업장 내부를 외부 검증단에 공개하는 데에도 합의했다. 이어 14일엔 권오현 삼성전자 대표이사(부회장)가 유족 등 관계자들을 만나 위로의 뜻과 함께 대표이사 명의의 사과문도 전했다.

삼성전자 기흥반도체 공장 여성노동자였던 황유미씨가 급성 백혈병으로 2007년 3월 사망하면서 세상에 알려진 삼성전자 백혈병 사태에 대한 사과와 보상이 있기까지 9년 가까운 시간이 걸린 것이다. 이 와중에 160명이 백혈병, 뇌종양, 유방암, 자궁경부암, 피부암 등으로 고통받았고, 이 가운데 약 60명은 사망했다.

삼성 측은 그간 백혈병은 직업병이 아니라는 입장을 고수해오며 전문가들을 동원해 자신들에게 유리한 연구 결과를 발표하는 한편 소송을 진행하며 유족들을 압박했다. 이 때문에 2007년 11월 발족된 ‘삼성반도체 집단 백혈병 진상 규명과 노동기본권 확보를 위한 대책위원회(반올림)’와 피해자 유족들의 9년간 지난한 투쟁이 시작된 것이다.

◆5시간마다 1명씩 산재로 사망

당시 삼성 백혈병 관련조사에 참여한 한 직업환경의학과 의사(익명을 요구함)는 “기업주라면 산업안전보건법에 따라 근로자들의 건강과 안전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하지만, 삼성은 과학적 증거가 없다는 방패 뒤에 오랜 시간 숨어왔다”며 “사람의 안전보다 생산성과 효율성을 중시하는 기업 문화가 바뀌지 않으면 이런 일은 계속될 것”이라고 비판했다.

실제 고용노동부가 최근 내놓은 ‘산업재해 현황분석’ 자료에 따르면 국내 산업재해 근로자는 2001년 8만1천434명에서 2007년부터 9만명대를 유지하며 2013년 9만1천824명을 기록했다. 특히 산재 사망자는 1990년 이후 2천명대를 25년째 유지하고 있다. 하루 5.4명, 5시간마다 1명씩 산재로 목숨을 잃고 있는 셈이다.

연간 근로자 1만명당 사고로 인해 몇 명이 사망하는지를 나타내는 사고사망 만인율은 1.45(2013년 기준)로 선진국 수준(0.3)과 비교해 5배 가까이 높다. 또 OECD 조사에 따르면 2006년 말 기준으로 10만명당 산재 사망자 수는 우리나라가 20.99명으로 2위를 기록한 멕시코의 10명에 비해 무려 2배가 넘었다.

산업재해로 말미암은 경제적 손실도 막대하다. 안전보건공단에 따르면 2013년 산업재해로 인한 직접손실액은 약 3조8천억원이며, 간접손실액을 포함한 경제적 손실액은 18조9천억원에 달한다. 또 현대경제연구원에 따르면 2008년 파업으로 인한 손실액이 1조4천억원이었던 반면 같은해 산업재해로 인한 경제적 손실 추정액은 무려 17조1천억원으로 집계됐다.

최근엔 하도급업체 사망자가 급증하고 있다는 것이 문제로 지적된다.

◆급속도로 진행 중인 ‘위험의 외주화’

고용노동부에 따르면 하도급 근로자 사망 비율은 2012년 37.4%에서 2013년·2014년 38.6%로 증가했고, 지난해 6월엔 40.2%를 기록했다. 더구나 사내하도급이나 외주 사용 비율이 높은 조선, 건설업은 지난해 하도급 사망자가 각각 93.7%(32명중 30명), 52.9%(425명 중 225명)로 심각한 수준이다.

산업계 전반의 외주화가 확산되면서 안전관리 능력이 취약한 하도급업체로 위험이 전가되는 이른바 ‘위험의 외주화’가 급속도로 진행되고 있는 것이다. 반면 이들의 권익을 보호해야 할 노조는 대기업 중심으로 이뤄져 있다.

한국노동연구원이 2014년 발표한 ‘일자리 창출과 노동시장 구조 개선을 위한 노사정의 역할’이란 제목의 자료에 따르면 노조가 조직된 대기업 정규직(137만명)의 평균 월급은 392만원인 반면, 노조가 없는 중소기업 비정규직(485만명)의 평균 월급은 134만5천원이다.

또 대기업 정규직(유노조)의 99.1%는 상여금을 받고, 99.6%는 퇴직금이 적용되는 반면, 중소기업 비정규직(무노조)은 36.6%만 상여금을 받고, 36.4%가 퇴직금을 적용받았다. 국민연금과 건강보험 가입률을 보면, 대기업 정규직(유노조)은 각각 99.5%, 99.8%인데, 중소기업 비정규직(무노조)은 34.2%, 40.9%에 불과하다.

문제는 2014년 8월 기준 비정규직이 608만명인데 노동계의 이익을 대변한다는 한국·민주노총 조합원의 대부분이 대기업 근로자라는 것이다. 노동부에 따르면 2013년 기준 임금 근로자는 1천841만명인데, 양대 노총 조합원 수는 145만명으로 근로자 10명 중 1명이 채 안 된다.

◆신뢰와 소통 절실

한국노동연구원 조규식 박사는 “산재사고로 인한 피해는 사회적 취약계층에 집중되는 경향이 있으며, 고령화사회로 진입하는 우리나라의 경우 미래사회에 커다란 부담요인으로 작용할 것으로 전망된다”며 “산재사고는 사회적 양극화 현상을 가중시키는 요인으로 작용할 것으로 예상되기에 산재사고에 대한 대책마련이 시급하다”고 당부했다.

이 때문에 정부는 노동개혁으로 ‘노동시장 이중구조 개선’을 통한 정규직과 비정규직 간 격차를 해소하겠다고 밝혔지만, 노동계는 쉬운 해고와 비정규직을 늘릴 뿐이라며 맞서고 있다.

김대환 노사정위원장은 19일 긴급기자회견을 열고 “정부가 노총 집행부의 비공개 요청을 묵살하며 조급하게 협의를 재촉해 불신을 초래한 것이 이 사태를 촉발했다”며 “양대 지침에 대해 충분히 논의할 수 있는 기회가 있었음에도 논의 자체를 거부하고, 모든 책임을 정부에 떠넘기는 한노총의 행위도 문제”라며 양측이 다시 대화에 나설 것을 촉구했다.

특히 산업재해 문제와 관련, 노상철 단국대 직업환경의학과 교수는 2005년 세계보건기구(WHO)가 제정·발표한 ‘전염병 발생 소통 지침(Outbreak communication guidelines)’을 참고할 것을 제안했다.

이 지침의 원칙은 첫째, 대중과 먼저 신뢰(trust)를 쌓고 둘째, 질병발생에 대해선 가능한 한 조기에 공표(announcing early)를 하고 셋째, 투명성(transparency)을 확보하며 넷째, 대중(the public)의 생각과 말을 이해하며 다섯째, 전염병 발생 소통 계획(planning)을 수립해 놓을 것 등이다.

구경모기자 chosim34@yeongn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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