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는 최근 수십년간 한국 보수 정치의 맥을 이어왔다. 아무래도 야권성향의 인물이 정치적 입신을 도모하기가 어렵다. 국회의원만 해도 2012년 총선에서 대구 12개 의석을 새누리당이 휩쓸었다. 정치적 다원화를 통해 지역의 활력을 도모해야 한다는 주장이 나오는 배경이다. 척박한 정치적 현실에도 불구하고 여기 ‘퍼스트 펭귄’으로 새로운 정치적 도전의 길을 열어가는 이들이 있다.
◆ 3선 성공한 정의당 장태수 대구 서구의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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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태수 대구 서구의원 |
전세 세입자 권리보장에 앞장
진보정당 소속으로 ‘3選’ 기염
“지자체 조례로도 주민 삶 변화
정치 국회서만 하는 것 아니다”
장태수 대구 서구의원(44)은 3선 구의원이다. 지난 6대 서구의회에서는 부의장, 현재(7대)는 상임위원장을 맡고 있다. 이력만 보면 새누리당 소속 지역 유지의 이미지를 떠올리기 쉽다. 하지만 장 구의원의 소속은 정의당이다. 야당의 불모지인 대구에서, 진보정당 소속으로 3선을 한 것. 기초의원이지만 쉽지 않은 일이다.
왜 그는 험난한 길을 선택했을까. “뭔가 이상했어요. 아버지는 새벽부터 농사를 짓고, 어머니는 시장에서 장사를 했고, 누나들은 공장에서 일하고 모든 식구가 열심히 살았는데 우리 집은 계속 가난했거든요.”
진보 정당에 몸을 담게 된 원인에 대해 장 구의원은 청소년 시절 가진 사회에 대한 의문을 꼽는다. 사회에 의문을 가진 젊은 청년은 영남대 국문학과 91학번으로 입학하면서 자연스레 학생운동에 몸을 담았다. 학생회와 운동권 언더서클에서 활동했고, 4학년 때는 총학생회장 선거에도 출마했다.
정치권에 뛰어들 결심을 한 것은 졸업 후인 1997년 ‘서구문화복지센터’에서 일하면서부터다. 서구문화복지센터는 대구에서 진보정당을 준비하던 인사들이 의기투합해 만든 곳으로, 장 구의원은 당시 주민들을 상대로 하는 ‘임대차상담’을 담당했다.
장 구의원은 “1997년은 IMF 외환위기 직후라 전세분쟁이 많았는데, 당시만 해도 대부분의 세입자가 ‘확정일자’를 받지 않았고 공무원도 확정일자에 대해 잘 몰라 세입자의 권리가 보장되지 않았다”며 “그래서 조례제정 청구권한을 활용해 동사무소 직원이 세입자에게 확정일자 도장을 찍을지 여부를 먼저 묻는 방식으로 조례를 제정하는 활동을 시작했다”고 말했다.
그는 주민들의 피해상황을 들고 서구의회를 찾아가 구의원들을 설득했고, 마침 YMCA도 캠페인을 벌이며 관련 조례가 제정됐다.
“‘아~ 지방자치단체의 조례만으로도 우리 주민들의 삶이 바뀔 수 있구나’라는 생각을 했어요. 그때까지만 해도 정치는 국회에서 법을 만드는 것이라고만 여겼던 생각이 변한 거죠.”
이후 2002년 지방선거, 만 서른의 나이에 그는 대구 서구에서 민주노동당 후보로 구의원 선거에 출마했다. 당시는 구의원 선거도 소선거구 방식이었기 때문에 장태수 후보의 당선을 예상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하지만 개표결과는 대이변. 그는 새누리당 후보를 따돌리고 당선됐다. 대구·경북 지방의원 최연소 당선자였다. 장 구의원은 당시 선거결과에 대해 “나조차도 당선될 것을 기대하지 않았기에 많이 놀랐다”며 “3년 가까이 임대차상담을 담당하며 진행한 7천여건의 상담결과가 표로 이어진 결과였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4년 후 벌어진 지방선거에서 장 구의원은 낙선의 고배를 마셨다. ‘장태수 구의원’에서 ‘시민운동가 장태수’로 다시 돌아왔다. 하지만 그의 활동은 오히려 더욱 활발해졌다.
먼저 동네 학부모들과 힘을 보아 서구 어린이들을 위한 ‘놀토마을학교’를 개설했다. 2009년에는 이를 발전시켜 학부모들과 함께 ‘마을어린이도서관’ 건립에 나서 이듬해인 2010년 비산6동의 한 상가 2층에 122.3㎡(37평) 규모의 어린이 도서관이 개관됐다.
4년여간 시민운동을 거친 장 구의원은 2010년 지방선거에서 재선 구의원이 됐고, 2014년 선거에서는 3선에 올랐다.
올해 만 나이로 44세. 지역정가에서는 장 구의원이 향후 대구라는 지역의 특수성 및 3선 구의원이라는 정의당 내에서도 드문 경력을 내세워 국회의원 비례대표에도 도전할 가능성을 높게 본다. 경쟁력도 높다는 평이다.
그러나 장 구의원은 “진보정당의 비례대표 당내경선은 유력한 경로지만 어찌보면 쉬운 경로라고 생각하며, 도전 의사가 전혀 없다”고 명확하게 부정적인 입장을 밝혔다. 그 이유에 대해서는 “난 서구청장이 되는 게 꿈이라고 늘 말하고 이를 위해 서구에서 계속 노력할 것이다. 성공이 아니라해도 실패로 그 가능성을 증명해 보이고 싶다”고 했다.
인터뷰를 마치며 재차 서구를 떠나지 않을 것을 명확히 하는 그에게서는 비장함까지 엿보였다. “아시다시피 서구 비산동은 대구에서 가장 가난한 곳으로 힘든 주민이 많고, 가끔은 저도 그들을 보면서 왜 저렇게 구질구질하게 사나 하면서 울화통이 터져요. 하지만 그들이 내 눈에 보이는 이상 저는 그 구질구질한 동네에 오늘도 들어갑니다. 제가 같이 있고 싶은 사람들은 서구의 주민들이거든요.”
◆ 지역갈등 해소 실천 더민주 이헌태 대구 북구의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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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헌태 대구 북구의원 |
영호남 갈등 망국병 해결하려
대구 기자출신으로 야당 입당
“주위서 구의원 왜하냐 하지만
고향의 발전 위해 할 일 많아
“나도 다른 사람들처럼 성공하고 싶었다. 하지만 나는 그 길을 걷지 않기로 맹세했다. 그것은 개인적 승리에 불과하므로….”
쿠바의 혁명가 체 게바라가 남긴 명언이다. 개인의 성공보다는 대중의 성공을 위해 노력하겠다는 것. 실제 체 게바라는 중남미의 민중혁명을 위해 불꽃같은 삶을 살았다.
대구 북구의 이헌태 구의원(52)은 앞서 언급한 체 게바라의 명언을 인용해 본인 삶의 궤적을 정의했다. 대구에서 초·중·고교를 졸업한 이 구의원은 연세대 경영학과에 81학번으로 입학 후 학생운동을 시작했다. 노동현장에 위장취업을 했고, 이념 언더서클에도 가입했다. 하지만 그는 1988년 졸업과 동시에 지역 한 일간지에 입사했다. 통상적인 운동권 출신 정치인과는 궤를 달리하는 이력인 셈.
이에 대해 그는 “대구 촌놈이 서울에 올라가니 의식화된 것이었다. 그러나 운동권의 논리는 너무 관념적이라 현실과는 괴리가 있었고, 회의를 느꼈다”며 “언론이라는 조직을 사회변화의 도구로 사용하기 위해 언론사에 들어갔다”고 설명했다.
이후 그는 국무총리실, 여당, 야당, 국회를 출입했고 98년 2월 김대중(DJ) 정부출범 때부터는 청와대를 출입했다. 99년에는 청와대 출입기자가 바라본 한국 정치의 실상을 담은 ‘전라도 대통령과 경상도 기자’라는 책을 출간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의 기자생활은 거기까지 였다. 2000년 돌연 사직서를 제출한 것.
이후 그는 주위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DJ 정부 초대 대통령비서실장으로 민주당 대선경선에 출마한 김중권 후보 캠프에 합류해 비서실 차장을 맡았다. 정치계 입문에 대해 그는 “대구 출신 기자가 민주당으로 들어가니 다들 미쳤다고 만류했고, 나도 김 비서실장의 당선이 힘든 것을 알았다”면서 “하지만 영호남 지역갈등이라는 망국병 해결을 위해서는 영남후보론을 내걸고 나온 김중권씨를 돕는 게 맞다고 판단했다”고 말했다.
기적은 일어나지 않았고, 그 역시도 몇년간 야인생활을 거친 뒤인 2005년에야 보건복지부 산하의 ‘한국국제보건의료재단’에 입사했다. 그리고 한국국제보건의료재단에서 그는 삶의 목표를 찾게 된다. 사업본부장으로 금강산 ‘온정인민병원’, 평양 ‘고려약제약공장’ 등에 대한 설립을 담당한 그는 우즈베키스탄에 고려인을 위한 최초의 양로원인 ‘아리랑 요양원’ 설립을 주도해 2009년 초대 원장에 취임한다.
당시에 대해 그는 “1937년 스탈린에 의해 중앙아시아로 이주당한 어르신들을 찾아다녔고, 시골 움막 같은 데서 거지처럼 살던 할아버지, 누추한 오두막집에서 홀로 외롭게 지내던 할머니, 자식도 일가친척도 없이 노후를 보내던 할머니 등을 요양원으로 모셔왔다”며 “내 인생에서 가장 아름답고 보람된 시절이었고 그들을 위한 삶을 살고 싶어졌다”고 회상했다.
그렇지만 2011년 10월, 그는 자신의 삶에서 가장 행복했다는 아리랑요양원의 원장을 그만두고 다시 정치에 뛰어들었다. 언론사에 이어 정년이 보장된 정부기관에조차 사직서를 제출하자 주위에서는 다들 만류했다. 그는 뜻을 꺾지 않았다.
이 구의원은 “당시 아리랑요양원을 담당하는 복지부 과장이 비용문제 등을 이유로 요양원을 위탁관리하려고 했다”면서 “내가 위탁관리할 경우 요양원 운영이 제대로 안된다고 반대하면서 갈등이 심해졌고, 근본적인 해결책은 정치밖에 없다는 생각에 정계로 다시 뛰어들었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이번에도 그는 험난한 길을 선택했다. 2012년 총선에서 야당인 민주통합당(현 더불어민주당) 소속으로 ‘대구 북구을’에 출사표를 던진 것. 이 구의원은 “야당으로 출마하니까 친구들도 피하고 모임 같은 곳에서도 다들 외면했다. 유권자들이 면전에서 명함을 찢은 일도 허다했다”고 회상했다.
총선 실패 후 새정치민주연합(현 더불어민주당) 대구시당에서 대변인을 맡았던 그는 2014년 지방선거에 출마해 북구의원으로 당선됐다.
“주위에서는 구의원을 왜 하냐고 하지만 찾아보면 구의원도 많은 일을 할 수 있는 만큼 저는 만족해요. 바라는 게 있다면 정권교체에 밀알이 돼 제가 사랑하는 아리랑요양원이 제대로 운영되는 것, 또 제 고향 대구가 발전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모두가 승리하는 길이라고 생각해요.”
글·사진=최우석기자 cws0925@yeongn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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