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비들의 사랑이야기 .1] 묏버들 가려 꺾어 보내노라- 최경창과 홍랑<중>

  • 김봉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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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6-03-10   |  발행일 2016-03-10 제22면   |  수정 2016-04-21
밤비에 새잎 나거든
최경창, 파직보다 컸던 이별의 아픔…홍랑, 살아서는 잊지못한 그리움
20160310
경기도 파주시 교하읍 다율리에 있는 홍랑 묘와 묘비 ‘시인홍랑지묘(詩人洪娘之墓)’. 홍랑 묘 바로 위에 최경창 부부 합장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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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랑 묘비 뒷면. 최경창과 홍랑의 사연이 새겨져 있다.

詩才·미모 타고나…어릴적 부모 여읜 후 관기의 삶

■ 함경도 태생의 기생 홍랑

홍랑은 함경도 홍원 태생의 기생이다. 정확한 생몰 연대는 전하지 않는다. 홍랑은 일찍 아버지를 여의고 홀어머니와 함께 살았다. 둘도 없는 효녀라는 칭찬을 들었고 어려서부터 미모와 시재가 뛰어났다. 어머니가 깊은 병으로 자리에 누워 일어나지 못하게 되자, 어느날 어린 홍랑은 80리 떨어진 곳에 명의가 있다는 말을 듣고 혼자서 꼬박 사흘을 걸어 찾아갔다. 찾아 온 어린 소녀의 효성에 감탄한 의원은 나귀 등에 홍랑을 태우고 그녀 집에 도착했으나, 이미 어머니는 숨져 있었다. 슬픔과 절망 속에 동네 어른들의 주선으로 어머니를 양지 바른 뒷산에 묻었다. 몸도 부실한 상태에서 어린 홍랑은 석 달을 어머니 무덤 옆에서 떠나지 않고 울음을 토하며 살았다. 당시 홍랑은 12세였다.

의원은 그 후 다시 와서 홍랑의 갸륵한 효심과 사람됨을 보고 자기의 집으로 데리고 가서 수양딸처럼 키웠다. 시문을 가르치고 여자가 해야 할 예의범절 등을 가르쳤다. 덕분에 홍랑은 절세가인으로 자라 꽃처럼 아름답게 피어났다. 천부적인 시재도 잘 가꾸었다. 그러나 홍랑은 어머니의 무덤이라도 자주 볼 수 있는 곳으로 가기를 원했고 결국 집으로 돌아와 어머니의 무덤을 돌보며 살았다. 그리고 타인에게 신세를 지지 않고 살 수 있는 길을 찾다가 기적(妓籍)에 이름을 올리고 경성 관아의 기생으로 살아가게 되었다.


◆홍랑에게 날아든 비보

사랑하는 임을 떠나보낸 뒤 오매불망 연인을 생각하며 지내던 홍랑에게 어느 날 최경창이 아파 몸져누웠다는 비보가 날아든다. 최경창이 함경도 경성에서 한양으로 돌아온 뒤 그 이듬해 초부터 시름시름 앓더니 결국 병석에 눕고 만 것이다. 홍랑과의 이별이 너무 아팠던 것일까. 병명도 정확히 알 수 없는 병에 걸려 자리에 누운 그는 그 해 겨울까지 일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이 소식이 머나 먼 함경도에 있는 홍랑의 귀에까지 흘러들게 되었다.

소식을 접한 홍랑은 곧바로 여장을 챙겼다. 사랑하는 사람을 보고픈 마음으로 하루가 삼년 같았던 그녀는 청천벽력 같은 소식을 듣고는 바로 남장을 하고 한양을 향해 천 리 길을 나섰다. 위독하다는 최경창을 하루 빨리 보고 싶은 마음에 정신없이 밤낮으로 걸어 7일 만에 한양에 도착했다.

최경창과의 만남은 실로 감격스러운 재회였다. 홍랑은 감격적인 재회 이후 최경창의 병수발을 들면서 함께 지냈다. 홍랑의 지극정성이 더해져 최경창은 조금씩 회복되어 건강을 되찾게 되었다.

최경창은 당시의 상황을 이렇게 적고 있다. ‘을해년(1575)에 내가 병이 들어 오랫동안 낫지 않아 봄부터 겨울까지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했다. 홍랑이 이 소식을 듣고 바로 출발해 7일 밤낮을 걸어 한양에 도착했다.’

그러나 두 사람의 재회는 뜻밖의 파란을 몰고 온다. 홍랑과 최경창이 함께 산다는 소문은 최경창이 홍랑을 첩으로 삼았다는 이야기로 비화된 것이다.

동인과 서인의 당파싸움이 한창이던 1576년 봄, 사헌부는 최경창의 파직을 요구하는 상소를 올렸다. 홍랑이 관기의 신분으로 지역을 이탈, 함경도와 평안도 사람의 도성 출입을 금지하는 제도인 ‘양계의 금(兩界之禁)’을 어겼다는 것이다. 당시 정치상황도 안 좋은 시기였다. 홍랑이 최경창을 찾아온 때는 명종의 비 인순왕후가 죽은 지 1년이 안된 국상기간이었던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동인들이 서인에 속한 최경창의 기생 사랑 이야기를 들어 공격한 것이다. 사헌부의 상소로 결국 최경창은 파직을 당했고, 홍랑도 함경도 경성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최경창은 관직을 박탈당한 것보다도 홍랑을 다시 돌려보낸다는 게 너무도 힘들었다. 최경창은 자신의 절절한 당시 마음을 한편의 시 ‘송별(送別)’에 담아 경성으로 돌아가는 홍랑에게 주었다.


고운 뺨에 눈물지으며 한양을 떠날 때(玉頰雙啼出鳳城)/새벽 꾀꼬리 저렇게 우는 것은 이별의 정 때문이네(曉鶯千爲離情)/비단옷에 명마 타고 하관 밖에서(羅衫寶馬河關外)/풀빛 아득한 가운데 홀로 가는 것을 전송하네(草色送獨行)


아래 시도 이때 지은 것으로 보인다.

서로 말없이 바라보며 그윽한 난초 그대에게 드리네(相看脈脈贈幽蘭)/아득히 먼 길 이제 가면 어느 날에 돌아오리(此去天涯幾日還)/함관령 옛날의 노래는 다시 부르지 마오(莫唱咸關舊時曲)/지금도 궂은비 내려 푸른 산 아득하겠지(至今雲雨暗靑山)


◆홍랑의 시묘살이

그들은 이 이별을 마지막으로 생전에는 다시 만나지 못한다.

시간이 흘러 1582년 봄 최경창은 특별히 종성부사(鍾城府使)에 임명되었다. 그러나 얼마 후 북평사의 참소로 성균관 직강으로 좌천되고, 부임을 위해 상경하던 도중 함경도 경성의 객관에서 세상을 떠났다. 1583년 3월, 그의 나이 45세 때였다.

최경창과 이별한 후 행여 사랑하는 사람을 만날 날이 혹시나 올까 기대하며 가슴 아픈 나날을 보내던 홍랑을 찾아온 것은 최경창의 부음이었다.

소식을 접한 홍랑은 바로 경성의 객관을 찾아가 염을 하는 것을 돕고, 영구를 따라 최경창이 묻힐 경기도 파주까지 따라갔다. 장례가 끝난 후에는 바로 최경창 무덤 앞에서 시묘살이에 들어갔다.

하지만 젊고 아름다운 여자가 홀로 외딴 곳에서 생활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닐 수밖에 없었다. 생각 끝에 그녀는 다른 남자의 접근을 막기 위해 몸을 씻거나 단장하는 일을 일체 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급기야 고운 얼굴에 자상(刺傷)을 내어 일부러 흉터까지 만들었다. 커다란 숯덩어리를 통째로 삼켜서 벙어리가 되려고 했다는 이야기도 전한다.

이렇게 무덤 앞에서 차디찬 겨울과 무더운 여름을 견디며 3년간 시묘살이를 무사히 마쳤지만, 그녀는 묘소를 떠나지 않았다. 최경창을 향한 마음이 묘소를 떠날 수 없게 한 것이다. 그 후로도 시묘살이는 몇 년간 더 계속됐다. 연인의 묘소 앞에서 살다가 죽으려는 마음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홍랑에게는 그런 소원도 허락되지 않았다. 그렇게 10여년 가까이 시묘살이를 하던 중에 임진왜란(1592년)이 터진 것이다. 홍랑은 자신이야 사랑하는 임의 곁에서 죽더라도 여한이 없었지만, 최경창이 남긴 주옥 같은 작품과 글씨들을 보존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묘소만 지키다 죽어서는 안 된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홍랑은 최경창이 남긴 유품을 챙긴 뒤 품에 품고 다시 함경도의 고향으로 돌아갔다. 그로부터 7년의 전쟁 동안 여자의 몸으로 최경창의 작품을 지키기 위해 얼마나 심한 고초를 겪어야 했을까.

홍랑이 해주최씨 문중을 찾아 최경창의 유품을 전한 것은 1599년의 일이다. 참혹한 임진왜란이 모두 끝난 이듬해였다. 무려 7년에 이르는 전란을 겪으면서도 오늘날까지 최경창의 주옥 같은 시작(詩作)들이 전해져 오는 것은 오로지 홍랑의 지극한 사랑과 정성 덕분이다.

글·사진=김봉규기자 bgkim@yeongn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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