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Y인터뷰] 칠곡경북대병원 유방암센터 정진향 교수

  • 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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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6-04-02 08:38  |  수정 2016-04-02 09:42  |  발행일 2016-04-02 제22면
경북대병원 첫 여성 외과 전문醫…“지금까지 4천례 이상 수술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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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대병원 개원 91년만에 금녀의 벽을 깨고, 외과 최초의 General Surgery가 된 정진향 교수는 이제 여성이 아닌, 대구경북을 대표하는 외과 전문의로 살아가는 것이 목표라고 말했다. 정 교수는 한해 400~500건의 갑상선 암 수술을 시행하고 있다. 박관영기자 zone5@yeongn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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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남성 전유물이던 외과
수술실 실습한 후 지원 결심
여자 편견 깨려고 두배 노력

지금은 갑상선 전문의 활동
한 주 평균 10번 이상 수술
모범적인 전문의 되고 싶어


칠곡경북대병원 유방암센터 정진향 교수(46)에게는 ‘최초’ ‘1호’라는 수식어가 항상 따라 다닌다.

정 교수는 경북대병원 개원(1907년) 91년 만에 최초의 여성 외과 전공의라는 타이틀을 단 이후 최초의 여성 외과 전임의, 최초의 여성 외과 교수라는 직함을 이어오고 있다.

남성도 버티기 힘든 외과에서도 홍일점이었기에 무엇인가 대단한 에피소드가 있을 것이라 굳게 믿고, 지난달 28일 정 교수를 만났다.

하지만 만남과 동시에 크나큰 실망을 하고 말았다.

정 교수는 차분한 목소리로 “제가 좋아서 선택했기에 외과 전문의라고 해서 특별히 힘든 것은 없었어요”라는 답이 돌아왔기 때문이다.

마치 “세상에서 공부가 제일 쉬워요”라고 말하는 수능 만점자를 만난 기분이었다.

인터뷰를 중단할까 고민도 했다.

그때 정 교수는 “여자의사들은 고민이 참 많아요. 엄마이자, 아내이자, 며느리이자, 의사라는 책임을 다 져야 하니까요”라고 말을 이어갔다.

특히 외과 의사들은 생명이 위독한 응급환자를 맞이하거나, 암환자를 상대해야 한다. 삶과 죽음의 기로에서 고민할 수밖에 없고, 항상 촌각을 다투며, 생명을 살려야 한다.

이 때문일까. 예나 지금이나 의사들 사이에서 외과는 기피대상 1호이다. 일은 많은데, 돈벌이는 시원치 않기 때문이다.

정 교수는 이런 외과를 왜 지원했을까.

그는 어렸을 때 장래희망이 의사였다. 솔직히 자신의 의지는 아니었다. 공무원이었던 정 교수의 아버지는 늘 ‘경력단절이 없고, 평생 직업으로 일 할 수 있는 의사를 하라’고 입버릇처럼 말씀하셨던 것. 고 3학년 대학원서를 쓸 때 의대가 아닌, 건축과를 가고 싶어 부모님과도 적지 않은 충돌을 빚었다.

결국 재수를 한 후에야 경북대 의대에 입학할 수 있었다.

어렵게 입학한 의대였지만 1학년 때부터 난관에 부딪혔다. 동물을 해부하는 동물형태 해부학 실습시간이 죽기보다 싫었던 것. 의대 적응이 쉽지 않았다.

그러던 그에게도 새로운 목표가 생겼다. 1995년 본과 3학년 12월 PK(Poly-Clinic)실습을 할 때 4주 정도 경북대병원 외과를 돌았다. 이때 하루 일과가 정신없이 바쁘고, 사람의 생명을 진정으로 살리는 외과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

정 교수는 “이론 수업할 때는 외과라는 것이 어떤 곳인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그러나 직접 수술실에 들어가면서 느꼈던 신선한 충격은 지금도 잊을 수 없다”며 “삶과 죽음의 기로에 선 환자에게 생명의 끈을 연결해주는 직업이 바로 외과라는 것을 알게 됐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이때부터 정 교수는 외과에 지원할 것이라고 입버릇처럼 말하고 다녔다.

문제는 정 교수가 가고 싶었던 외과(신경·흉부·정형·성형외과)에는 단 한명의 여의사도 없었다. 여성에게 외과는 넘을 수 없는 ‘넘사벽’인 셈이었다.

당시 정 교수의 동기 120명 중 여성은 20명. 또 다른 문제는 120명이 서로 경쟁하는 것이 아니라, 여성 의대생은 그들끼리만의 경쟁을 해야 했다. 외과 등 남성들의 전유물로 여겨졌던 진료과를 제외하고, 경쟁을 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1997년 4월 수련의 시절 순환근무를 할 때도 외과를 지원했다. 그때마다 선배나 교수님들은 “누가 널 외과에 뽑아준다고 하더냐”라며 의욕을 꺾었지만 굴하지 않고, 미친 듯 근무했다.

정 교수는 수련의 1년 동안 외과에 올인했다. 동기생들을 대신해 외과에서 온 몸을 불태우는 수련의 때문에 결국 외과 내에서도 여러차례 회의까지 열어야 했다. 선배나 교수들은 하나같이 “일은 참 잘하는데, 여자라서…”를 반복했고, 수차례의 회의 끝에 결국 금녀의 벽을 무너뜨리기로 결정했다.

1998년 경북대병원 개원 91년 만에 첫 여성 ‘General Surgery(외과 전공의)’가 탄생한 것이다.

당시 동기생은 7명. 정 교수는 외과 전공의가 된 후 정진향 때문에 더 이상 외과에는 여성 전공의를 받지 않는다는 소리만은 들어선 안되겠다고 다짐했다. 한발 더 나아가 자신으로 인해 더 많은 여성이 외과에 들어올 수 있는 계기가 되길 간절히 바랐다.

각오가 남달라서일까. 정 교수는 전공의 1년차 때가 가장 열심히 열정적으로 일한 시기였다고 강조했다.

예상은 했지만 외과는 남성의 전유물이었다. 여성을 위한 배려는 어디에도 없었다. 여성 당직실도 없었다. 술 자리에서도 예외는 없었다. 못 먹는 술이지만 어떤 술자리도 마다하지 않았다. 괜히 ‘여자라서 그렇다’라는 편견을 심어주지 않기 위해 의도적으로 모든 모임에 참석했다.

외과 의사에게는 3가지 조건이 필요하다. 바로 독수리의 눈처럼 예리한 눈썰미, 사자의 심장처럼 냉철한 판단력, 여성의 손길처럼 세심한 수술 실력이다. 일반인들이 보기에는 찔러도 피 한방울 나지 않을 것 같은 의사이지만 이들에게도 눈물은 있다.

정 교수는 “전공의 1년차 때는 고통받는 환자들 때문에 같이 가슴 아파하고, 많이도 울었다”고 털어 놓았다.

전공의 1년차로 소아외과에 근무할 당시 선천성 횡경막 탈장으로 고통받던 신생아가 있었다. 횡경막 탈장 환자의 경우 각종 장기가 흉부로 올라가 있어, 기흉(폐에 구멍이 생겨 공기가 새고 이로 인해 늑막강 내에 공기나 가스가 고이게 되는 질환)이 자주 발생한다. 기흉이 발생할 때마다 폐에 튜브를 넣어 공기를 빼주는 일을 반복해야 한다. 그 신생아도 하루에 몇번씩 기흉으로 인한 튜브삽입이 이어졌다. 건강을 되찾길 간절히 바라며, 온갖 정성을 다했다. 신생아의 옆에서 잠자는 날들이 계속됐다. 하지만 1개월 후 더 이상 희망이 없다고 판단한 신생아의 부모들이 아이를 데리고 퇴원할 때는 몇날 며칠을 울어야 했다.

또 복부대동맥류로 인해 응급실을 찾은 한 할머니를 위해 매일같이 중환자실에서 밤을 새웠다. 어느날 새벽 너무 피곤해 할머니의 침대 옆에서 깜박 잠이 든 정 교수. 그런데 누군가의 따뜻한 손길이 정 교수의 머리를 어루만지고 있었다. 오랜 기간 중환자실에서 의식이 없던 할머니가 깨어난 후 제일 먼저 한 것이 자신을 돌보던 정 교수의 머리를 쓰다듬는 것이었다. 그 손길에 또 한 번 펑펑 울고 말았다.

정 교수는 “수많은 환자를 상대했지만 지금도 그때의 마음과 마찬가지다. 건강하게 퇴원하는 환자를 보면 내 가족이 완쾌된 것처럼 기쁘고, 누군가 고통 속에 죽어가는 것을 보면 내 잘못처럼 느껴져, 가슴이 미어진다”며 “사람의 생명을 책임져야 하는 외과 의사의 숙명을 받아들인다. 그래서 더 책임감이 무거운 것인지도 모르겠다”고 말했다.

정 교수는 전공의 과정을 거쳐, 2003년 3월부터 유방갑상선 전임의를 시작으로 2008년 경북대병원 외과 최초의 교수로 활동 중이다.

지금은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갑상선 전문의로 활동 중이다.

2004년부터 지금까지 4천례 이상의 갑상선암과 유방암 수술을 시행했다. 지금도 주당 평균 10명 이상의 갑상선암과 유방암 환자를 수술하고 있다.

정 교수는 “전공의를 시작하며 다짐했던 단기목표는 달성했다. 이제부터는 여성으로서가 아닌, 모범이 되는 전문의가 되고 싶다”고 했다.

그는 마지막으로 이제 막 의대생이 된 젊은이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다고 했다. “요즘 의대생들에게 어떤 과를 하고 싶냐고 물어보면 몸 편하고, 돈 많이 버는 진료과를 선호해서 너무 놀랍다”며 “미래의 의사들에게 말 하고 싶은 것은 돈을 떠나 시류에 흔들리지 말고, 평생을 해도 후회하지 않는 분야에서 활동할 수 있길 간절히 바란다”고 당부했다.

1998년 경북대 병원 외과에는 150여명의 의사(전공의 포함) 중 여성은 정 교수가 유일했다. 하지만 지금(2015년말)은 248명 중 27명이 여의사다. 이 중 4명은 교수로 활동 중이다.

임호기자 tiger35@yeongn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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