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재걸 교수’의 오래된 미래 교육] 주역과 마음의 본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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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6-04-18  |  수정 2016-04-18 07:50  |  발행일 2016-04-18 제17면

‘주역’은 마음공부의 보고다. ‘주역’의 첫 번째 괘인 중천건(重天乾)괘는 우리 마음의 본성이 하늘과 같다고 말한다. 우리는 하늘을 보지만 그것이 어떤 것인지 알 수 없다. 하늘은 텅 비어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오직 하늘에 떠 있는 해와 달, 별, 그리고 구름을 통해서만 하늘의 존재를 알 수 있다. 우리 마음의 본성도 이와 같다. 우리는 마음의 본성을 알 수 없지만 우리 마음에서 일어나는 생각이나 감정을 통해 그 마음의 존재를 짐작할 수 있을 뿐이다.

하늘은 텅 비어 있기에 모든 것을 받아들이고 또 아무런 집착 없이 그 모든 것들을 떠나보낸다. 우리 마음의 본성 역시 텅 비어 있는 것이기에 모든 생각과 감정들이 일어날 수 있다. 우리는 텅 빈 본성을 알 수 없기에 마음의 본성에서 일어나는 생각과 감정을 나와 동일시한다. 그러나 생각과 감정은 결코 내가 아니다. 생각은 태어나서부터 지금까지 부모나 친구, 교사나 책, 매스컴을 통해 주워 모은 것에 지나지 않는다. 감정 역시 그러한 생각의 주체를 ‘나’라고 간주하여 그 주체에게 이익이 되고 손해가 되는 것을 평가하여 일어나는 정서적 반응에 지나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중요한 것은 우리 마음의 본성에서 일어나는 생각과 감정에 대한 동일시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생각이나 감정을 ‘나’라고 동일시하는 것은 푸른 하늘이 아니라 그 하늘에서 일어나는 구름과 자신을 동일시하는 것이다. 푸른 하늘에 희고 아름다운 구름이 나타나면 즐거워하고 검고 사나운 구름이 나타나면 괴로워하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다. 우리는 자신을 그 깊이를 알 수 없는 텅 빈 하늘과 동일시해야 한다.

마음의 본성을 나타내는 또 하나의 대표적인 괘가 수풍정(水風井)괘이다. 정(井)은 마음의 본성이 곧 사랑임을 나타내는 괘이다. 단전에서 ‘기르되 다함이 없다(養而不窮)’는 구절은 우리 마음이 사랑의 근원임을 말하고 있다. 이는 물론 맹자의 ‘인(仁)의 샘물론’과 같다. 맹자는 인간은 누구나 마음 속에 무한한 용량을 가진 사랑의 샘이 있다고 주장하였다. 그 사랑의 샘에서 한 번 물이 솟아나기 시작하면 그침이 없다. 그 샘물은 주변에 있는 구덩이를 채우고 ‘盈科’, 들판을 적시고 사해(四海)로 흘러들어간다. 괘사에서 ‘우물을 옮길 수 없다’고 했듯이, 우리 마음의 본성이 사랑임은 영원불변한 진리이다. 마음의 본성으로서의 사랑은 결코 잃을 수도 없고 얻을 수도 없다.

그러나 이와 같은 사랑의 샘물을 막고 있는 바위가 있으니 바로 ‘나’라고 하는 바위다. 초육 효사에 ‘우물에 진흙이 덮여 먹을 수 없다’는 것은 누구에게나 사랑의 샘물이 있지만 분리된 자아로서의 진흙이 우물을 덮고 있으면 먹을 수 없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반면 상구의 효사에서 ‘우물에 뚜껑을 덮지 않으니 믿음이 있고 크게 길하다’는 것은 ‘나’라는 바위를 제거한 사람은 누구에게나 그 샘물을 나누어 주고 싶어 한다는 뜻이다. 예수는 목마른 사람은 모두 나에게 오라고 했지만 ‘나’라는 피부 밑 자아(skin-capsuled ego)’에 갇힌 사람들은 결코 자신의 갈증을 깨닫지 못한다. 부처는 ‘숫타니파타’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온 우주 구석구석까지/그 높은 곳, 깊은 곳, 넓은 곳 끝까지/모두 감싸는 사랑의 마음을 키워라./증오도 적의도 넘어선/마음이 어지러워지지 않는 사랑을’.

<대구교대 교육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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