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람] ‘한국 유일 악역 프로레슬러’ 김남훈

  • 이은경 황인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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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6-08-26   |  발행일 2016-08-26 제41면   |  수정 2016-08-26
“‘링’서 내 역할은 17년째 나쁜놈…그래도 그 곳이 가장 행복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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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레슬러 김남훈씨. 매월 한차례 서문시장 야시장에서 프로레슬링 경기를 펼치고 있는 그는 “프로레슬링 시장 리그를 만들어보겠다”며 “프로레슬링과 지역 야시장을 결합한 새로운 문화를 선보일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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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레슬러 김남훈씨가 익살스러운 표정을 지어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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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성로 허브와 함께 ‘망치티브이’라는 팟캐스트 방송을 녹음 중인 김남훈씨.

지난 20일 저녁 8시. 어둠이 깔리기 시작한 대구 서문시장에 야시장이 열렸다. 밤이 됐으나, 기온은 여전히 30℃를 웃돌았다. 시장은 발 디딜 틈 없었다. 푹푹찌는 한여름 무더위를 피해 야시장으로 먹거리를 찾아온 사람들이 시장통에 넘쳐났다.

갑자기 흥청거리는 시장 한복판에서 함성이 ‘와~’ 들려온다. 링도 없이 바닥에 펼쳐진 사각형 매트 위에서 생뚱맞게도 레슬링 경기가 펼쳐지고 있었다. 프로레슬링이 미리 짜인 각본에 따라 진행된다는 것을 모를 리 없건만 관객들은 팔이 꺾이고 몸이 내동댕이쳐질 때마다 ‘꺄악, 꺄악’ 비명을 질러댄다. 그러다 악역을 맡은 레슬러가 험악한 표정을 지어 보이면 ‘우~ 우~’ 야유도 퍼붓는다. 가난하고 힘든 시절 김일의 박치기에 위로를 얻었던 어른부터 WWE 레슬매니아를 통해 존 시나의 경기를 즐기는 아이까지, 뜻밖의 레슬링 경기로 즐거웠던 여름 밤이었다.

서문 야시장에서 뜬금없는 프로레슬링 판을 벌인 이는 프로레슬러 김남훈씨(42)다. 지리산 야생 반달곰 숫자보다 더 적다는 한국 프로레슬러 중 한 사람이다.


김일·헐크 호건을 꿈꾸며 자란 소년
1998년 인터넷 신문사에 다닐 즈음
이왕표체육관 알게 돼 레슬러의 길

2년뒤 ‘프로’ 데뷔, 그리고 하체 마비
“걸어가 햄버거 사먹겠다” 일념에 재활
회복후 日 챔피언·UFC 해설위원 활약

현재 대구 사람·건물·음식에 ‘홀릭’
10월까지 서문 야시장서 레슬링시합
매주 북성로 허브와 팟캐스트 방송도



▶서문시장 야시장에서 프로레슬링이라니, 좀 생뚱맞다.

“프로레슬링은 엔터테인먼트다. 다른 스포츠처럼 선수들은 피나는 훈련을 해야 하지만 드라마처럼 감동과 재미를 줄 수 있는 장르가 프로레슬링이다. 이런 프로레슬링과 지역 야시장이 결합된다면 새로운 문화가 생길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일본에서는 시장에서 프로레슬링을 많이 한다. 우리도 프로레슬링 시장 리그를 만들어보자는 생각이 들었다. 서문 야시장 매운 스테이크 마스크맨과 주문진 오징어가면의 대결! 삼척 촛대바위맨 대 목포 단팥빵마스크의 대결. 멋지지 않나. 각 지역 특산품, 명품, 명승지도 알리고 시합도 보고.”

▶관중의 반응은 괜찮은가?

“대구 시민들의 반응은 폭발적이다. 같이 웃고 분노하고 박수를 친다. 페이스북 라이브 중계를 지금까지 두 번 했는데 할 때마다 5만명 정도가 본다. 공유가 수천회씩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부산에서, 포항에서, 서울에서 일부러 찾아왔다는 팬도 많다. 몇몇 방송국에서 연락이 와서 현재 이야기를 나누고 있고 긴 호흡으로 아예 다큐를 찍자는 곳도 있다. 이 기세를 몰아 10월에는 링까지 설치하고 7개국 해외선수들까지 초빙해서 국제 프로레슬링대회를 열고 싶다. 서문 야시장을 널리 알리고 프로레슬링 홍보도 하고 그야말로 윈윈 전략이 제대로 먹히고 있다.”

▶왜 레슬러가 되려고 했나? 김일 선수가 멋있어서?

“어렸을 때 프로레슬링이 좋았다. 선과 악의 뚜렷한 구도와 함께 자신의 마초성을 강렬하게 드러낸 프로레슬러들이 너무나 좋았다. 헐크 호건 같은 레슬러가 되고 싶다는 꿈을 꾸었지만 현실적인 문제로 문턱을 넘지 못하다가 1998년 즈음 인터넷 신문사에 다닐 때 우연히 이왕표 체육관을 알게 됐고, 그때부터 레슬러의 길을 걷게 됐다. 프로레슬링은 섹스랑 똑같다. 보는 것도 좋지만 직접하면 더 좋다. 하하하.”

2000년 프로레슬러로 데뷔해 악당 역할로 맹활약하던 그는 2005년 부상으로 하반신이 마비되는 끔찍한 시절도 보냈다. 매일을 고통 속에서 보냈다. 걸을 수 있으면 가장 하고 싶은 일을 생각했다. 우습게도 햄버거를 먹는 것이었다. 햄버거를 내 힘으로 걸어가서 사 먹겠다는 일념으로 재활운동에 매진했다. 회복 후 일본 무대로 진출해 한국 프로레슬러로선 처음으로 챔피언이 되기도 했다. 전문지식을 바탕으로 2008년 미국 이종 종합격투기 대회 UFC 해설위원으로 데뷔했고 현재 미국 프로레슬링 WWE 해설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불혹의 나이가 지났지만 현역 선수로도 뛰고 있는 그는 여전히 사각의 링 위에서 가장 행복한 사나이다.

“야구, 축구, 농구와 같은 프로스포츠에 밀려 프로레슬링의 인기는 예전만 못하다. 지금은 프로레슬링을 순수하게 사랑하는 10여명의 선수만이 남아 소규모 대회를 열며 명맥을 잇고 있다. 물론 프로레슬링으로 돈을 번다는 것은 상상도 못할 일이다. 하지만 프로레슬링은 엔터테인먼트와 스포츠가 결합한 거의 유일한 장르다. 상상력과 체력이 동시에 필요한 스포츠이면서 관객이 상상한 것 이상의 쾌감과 감동을 줄 수 있다. 야구로 치면 9회말 투아웃 만루홈런 상황을 선수들이 만들어낼 수 있는 것이다. 조작이 아니라 노력으로.”

그는 서문 야시장 레슬링 경기와 더불어 대구에서 또 다른 독특한 실험을 하고 있다. 북성로 허브와 함께 ‘망치티브이’라는 팟캐스트 방송국을 만들었고 프로젝트 1탄으로 ‘세상의 모든 직업’이라는 팟캐스트를 매주 방송하고 있다.

“대구지역 청소년을 대상으로 대구를 기반으로 하고 있는 여러 직업인을 소개하는 방송이다. 흔히 말은 제주로 사람은 서울로 보내라고 하는데 이 말이 나온 게 여몽항쟁 이후니까 얼추 700~800년 지난 말이다. 서울에 기회가 많다는 건 인정하지만 모든 청소년이 서울만 바라보고 사는 것은 분명 무언가 잘못됐다는 생각이 들었다. 김정민의 디어마이프렌드 작곡가가 대구 사람이다. 대한민국 최고의 국악퓨전밴드가 대구에 있다. 청년 벤처사업가로 출발해 100억원대 매출을 올리는 이도 대구에 살고 있다. 그런데 왜 서울만 바라보고 살아야 하는가. 그런 질문에 이 방송을 통해서 답을 주고 싶었다. 올해 3월 첫 방송을 한 이래로 20여명을 초청했고 누적 다운로드와 스트리밍을 합치면 3만명 정도가 들었다. 망치티브이(북성로 공구상가를 상징함)에서 계속 여러 프로그램을 만들어서 내보내고 싶다.”

▶대구와 인연이 상당하다. 왜 하필 대구인가?

“시쳇말로 단짠단맵이라고 하지 않나. 달고 짜고, 달고 맵다. 대구에 오면 사람부터 시작해서 풍경, 정취, 음식까지 단짠단맵한 게 너무 마음에 든다. 처음 대구에 와서 육회 집에 갔는데 갑자기 종업원이 소주 2병과 뭉티기 고기 한 접시를 내오더라. 내가 주문한 것도 아니었는데 옆 테이블의 중년 남성이 날 알아보고 보낸 거였다. 서울이라면 팬인데 사진 좀 찍자고 할 텐데 그러기엔 좀 뭐하고 아는 척은 하고 싶었던 거다. 이런 해프닝들이 너무 좋다. 그리고 대구 북성로처럼 특색있는 근대건물을 너무 좋아한다. 북성로 허브가 위치한 건물은 자유당 대구시당이었고, 이기붕 신혼집이었던 건물이다. 대체 몇 년이 된 건가. 그런데 그런 건물들이 아직까지 계속 버티면서 풍채를 뽐내고 있다. 사람, 건물, 음식에 빠져서 대구를 사랑하게 되었다고 보면 된다.”

인생의 링에서 몇 번의 다운을 당하고도 ‘여덟’ 카운트쯤에서는 반드시 일어나 쇠사슬(김남훈의 프로레슬링 공격도구)을 휘두르는 그는 프로레슬러이면서 방송인, 스포츠 해설위원, 작가, 시사평론가, 강사, 시민기자, 번역가 등 다양한 직업을 갖고 있다.

185㎝, 130㎏의 거구에 금발 차림으로 반바지를 입고 슬리퍼를 질질 끌며 서문 야시장 링으로 향하는 그에게 아직도 하고 싶은 일이 있냐고 물었다. 매년 1, 2, 3을 이루는 것이란다. 1은 1천만원 기부, 2는 단행본 2권 발간, 3은 방송프로그램 3개에 고정출연하겠다는 것. 스스로 ‘육체파 창조형 지식근로자’라 칭하는 한국유일의 악역 프로레슬러 김남훈의 남은 꿈이다.

글=이은경기자 lek@yeongnam.com
사진=황인무기자 him7942@yeongn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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