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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아스포라 '눈물을 희망으로'] <2부> 7. 진창호 진공방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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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은경기자
  • 2016-09-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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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친은 동양의 스트라디바리…정경화·아이작 스턴 등 거장이 고객”

진창호씨가 ‘진공방’의 작업대에서 바이올린을 제작하고 있다.
진창호씨(오른쪽)와 진창용씨. 창호씨는 바이올린을, 창용씨는 활을 제작하고 있다. <진창호씨 제공>
바이올린 제작자 진창호씨의 어린 시절. 아버지 진창현씨와 함께 공방에서 즐거운 한때를 보내고 있다. <진창호씨 제공>

진창호씨(54)의 아버지는 엄격했다. 말수가 적었으나 그 속엔 거역할 수 없는 단호함이 있었다. 진씨는 그런 아버지가 무서웠다. 하지만 바이올린을 만들고 있는 모습만은 언제나 멋있었다. 아버지가 만든 바이올린에서는 때론 귀뚜라미 같고 때론 매미 같은 소리가 났다. 어린 시절, 진씨는 톱밥이 날리는 매캐한 아버지의 공방에서 노는 것을 즐겼다. 어둡고 좁은 공방에서 진씨는 버려진 나무 조각으로 무엇인가를 만들고, 만들어진 것들로 놀이를 즐겼다. ‘나도 나중에 아버지처럼 바이올린을 만드는 사람이 되어야지’. 아주 어릴 때부터 진씨는 아버지의 뒤를 따르기로 마음먹었다.


진씨가 운영하고 있는 진공방(JIN 工房)은 일본은 물론 전세계적으로 유명한 바이올린 제작사다. 정경화, 강동석, 아이작 스턴, 로스트로포비치, 헨릭 쉐링 같은 세계적 명연주자들이 이 공방의 고객이다.

지난 9일 찾아간 도쿄 조후시 미도리가오카에 있는 진씨의 진공방. 33㎡(10평)도 채 되지 않는 작은 공방에는 갖가지 공구들이 벽에 가지런히 걸려 있었다. ‘체로(첼로)’ ‘무계(무게)’. 서툰 우리말이 쓰여진 공구들은 아버지 진창현씨가 직접 만든 것들이다. 아버지 진씨가 대학을 졸업하고 57년부터 바이올린을 만들기 시작했으니, 이 공방의 역사도 60년에 이른다. 2012년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부터는 진씨가 공방을 이끌고 있다.

◆동양의 스트라디바리, 경계인의 삶

진씨의 아버지는 일제 강점기인 1929년 김천에서 태어났다. 가난에 쪼들리던 열네살 소년은 먹고살기 위해 1943년 혼자 바다를 건너 일본으로 갔다. 분뇨 리어카를 끌고 군수공장에서 석탄을 옮기고 고철을 주워 팔면서 야간 중학교를 거쳐 메이지 대학 영문과를 졸업했다. 교사가 되겠다는 꿈 하나로 온갖 고생을 마다하지 않았다. 하지만 교사의 꿈은 이뤄지지 않았다. ‘조센징’은 절대 교사가 될 수 없었다.

절망에 빠져있던 그는 우연히 ‘스트라디바리우스의 신비’라는 강연을 듣고 인생 항로를 바꾼다. 20세기 과학으로는 그 신비를 벗기기 불가능하다는 스트라디바리우스를 능가하는 명기를 만들겠다며 바이올린 제작자의 길로 들어섰다. 하지만 ‘조센징’에게 기술을 가르쳐 줄 사람은 없었다.

혼자서 독학으로 막노동을 해가며 바이올린을 만들었다. 하루 3시간 잠을 자며 바이올린을 만들었다. 일본 3대 바이올린 연주자였던 시노자키가 첫 고객이었다. 시노자키는 홍난파, 안익태 등과 도쿄음대 동창으로 재일한인에 대한 남다른 애정을 갖고 있던 인물이었다. 그는 쓸모없는 폐자재로 만든 진씨 아버지의 바이올린을 대당 3천엔에 구입했다.

1976년 미국바이올린제작자협회가 필라델피아에서 개최한 국제 바이올린·비올라·첼로 제작자 콩쿠르는 그의 인생을 바꾼 계기가 됐다. 피나는 노력 끝에 진씨 아버지는 이 대회에서 6개 부문 중 5개 부문 상을 휩쓸며 금메달을 땄고 명장의 반열에 올랐다. 1984년에는 미국 바이올린제작자협회로부터 세계에서 5명뿐인 ‘마스터 메이커(Master Maker)’ 칭호도 받았다. ‘다른 이의 감독을 받지 않고 바이올린을 만들 수 있다’(무감사·無監査)는 자격이다. 그가 만든 바이올린은 스트라디바리우스에 가장 근접했다는 평가를 받았으며, 그는 동양의 스트라디바리로 불렸다.

진씨 아버지는 83세가 되던 2012년 대장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그의 인생은 일본 후지TV가 2004년 ‘해협을 건넌 바이올린’이라는 제목의 드라마로 방영했고, 2008년에는 ‘바이올린의 신비’라는 제목으로 일본 영어 교과서에도 실렸다.

한·일 국교 재개 후인 1968년 5월 김천 고향마을을 찾았다가 북한 간첩이라는 오해를 받아 공안 당국의 고문과 조사까지 받았고, 그가 세계적인 명성을 얻자 일본 정부가 끈질기게 국적 변경을 요구했지만, 세상을 떠날 때까지 국적을 바꾸지 않았다. 정부는 2008년 10월 ‘세계 한인의 날’ 기념식에서 그에게 무궁화장을 수여했다.

그는 평생 바이올린, 비올라, 첼로를 합쳐 600여대의 악기를 제작했으며 일본 NHK 교향악단의 악장이 현재 그의 악기를 사용하고 있다. “나를 그토록 서럽게 했던 일본 사회의 차별과 모진 역경이 오늘의 나를 만들었다”던 그는 다카오 산에 묻혔다. 고향에서 가져온 태극기와 어릴 적 뛰놀던 낙동강 모래가 그와 함께 묻혔다.

그가 처음 터를 잡고 바이올린을 만들기 시작한 일본 신나가노현 기소군 기소마치 신스이 공원에는 그의 기념비도 세워졌다. 비석에는 진창현씨의 얼굴을 새겼고 비석 옆에는 죽을 때까지 국적을 바꾸지 않은 고인의 뜻을 기려 무궁화가 심어졌다.

◆더 노력해서 부러워할 만큼 훌륭하게 자라라

진창호씨의 유년기는 불행했다. 아버지 세대만큼은 아니었으나 여전히 가난했고 차별은 일상적이었다.

진씨는 “아버지가 유독 엄격했던 것도 그 때문이었을 것”이라면서 “재일동포는 보통의 일본사람들처럼 살아서는 안된다. 일본에서 살아남으려면 악착같이 공부하고 일해서 일류가 되어야 한다고 아버지는 입이 닳도록 말씀하셨다”고 회고했다.

아버지는 아들에게 너그럽지 않았다. 공부를 아주 많이 시켰으며 열심히 하지 않으면 엄청 혼을 냈다. 평범한 아이였던 진씨는 자면서도 아버지에게 혼나는 꿈에 시달릴 정도로 아버지를 무서워했다. 덕분에 열심히 공부했고, 한눈팔지 않는 성실한 청년으로 자랐다.

“아버지께서는 재일한국인에 대한 차별이 나아지지 않을 것으로 생각하셨던 모양이다. 제대로 취직도 못하고 기술도 전수할 수 없을 테니 자신이 가진 기술을 물려줘야겠다고 아주 옛날부터 마음먹으셨던 것 같다”는 진씨는 20세가 되던 해, 본격적으로 바이올린을 만들기 시작했다. 만들기만 해서는 잘 만들 수 없다며 어릴 때부터 바이올린 연주도 배웠다. 웬만한 앙상블에 참여해서 연주할 정도의 실력도 갖췄다.

진씨는 어릴 때부터 “너, 조선인이지”라는 말을 귀가 따갑도록 들어왔다. 분하고 슬퍼할 때마다 아버지는 더 노력해서 더 부러워할 만큼 훌륭하게 자라라고 했다. 아버지의 뒤를 이어 진창호, 진창숙, 진창용 세 자녀는 함께 바이올린을 제작하고 있다. 아버지 진씨의 설계도와 재료, 제작 노하우를 그대로 이어받아 ‘진공방’의 명성을 꿋꿋하게 이어가고 있는 이들은, 앞으로 돈이 없어서 좋은 악기를 쓰지 못하는 재능있는 음악인들이 음악적 꿈을 마음껏 펼치도록 악기 지원을 할 계획이다. 또한 아버지의 바이올린과 제작 공구 등 유품을 고향 김천에 기증해 전시하기를 바라고 있다.

이날 찾아간 진씨의 집 대문에는 ‘진창현’이라는 이름 세 글자가 또렷하게 적힌 문패가 여전히 걸려 있었다. 왜 귀화하지 않았냐고 물었다. “필요성을 못 느낀다”는 그에게 한국이란 어떤 의미일까. “‘먼’ 모국이라고 할까요. 그리움과 향수가 있지만 멀리 있는.”

진씨는 “아버지는 늘 ‘조국을 사랑하지 않으면 남을 사랑할 수 없다, 조국이 곧 부모’라고 말씀하셨다”고 말했다. 그래서인지 그는 일본에서 한국에 대한 좋은 소식을 들을 때가 가장 기쁘다고 했다.

글·사진=일본 도쿄에서 이은경기자 lek@yeongnam.com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위원회 기금 지원을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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