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태흥의 음악칼럼] 레너드 코헨 ‘할렐루야’

  • 인터넷뉴스팀
  • |
  • 입력 2016-10-28   |  발행일 2016-10-28 제40면   |  수정 2016-10-28
유혹에 견디지 못한 한 인간의 후회가 어찌 즐거울 수 있겠는가
[전태흥의 음악칼럼] 레너드 코헨 ‘할렐루야’

고교 시절, 성경을 통독하면서 정말 신은 존재하는가에 대한 의문을 가진 적이 있다. 성경은 읽으면 읽을수록 모순으로 가득했고, 하느님의 자비나 사랑은 이해할 수 없는 것이었다.

하지만 35년을 훌쩍 넘긴 지금도 변한 것은 아무것도 없고 오히려 절망의 낭하는 비겁하고 비루한 연륜이 되어 가슴을 찌른다. 며칠 전 지인과 저녁자리를 하면서 이런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그는 잠깐 머뭇거리다가 혹시 죄의식에 너무 시달리는 것이 아니냐며 세상이 어떻게 정의롭게만 굴러가겠냐며 혼자서 세상의 고통을 짊어지려는 것 자체가 문제라며 정신과 상담이라도 받아보는 것이 어떠냐는 조언을 했다.

문득 고교시절을 떠올렸다. 성경의 모순들을 물을 때마다 교회는 대답하지 않았고 믿음이 부족하다며 기도를 요구했다. 기껏 돌아온 대답이라야 성경이 쓰여진 시대가 다르기 때문에 해석을 달리 해야 한다며 모순에 대한 변명을 늘어놓기 일쑤였고, 의문을 가지는 것이 마치 불신의 증거인 양 몰아붙였다. 아마 지인도 그랬을지 모른다. 쉰의 나이를 훌쩍 넘기고서도 아직도 세상의 변화를 기대하고 분노하는 것에 대해 우려했을 것이다. 분노는 젊은 날의 것이고 포용은 나이 든 자의 것이라고 그는 말하고 싶었을 것이다. 하지만 과연 불의에 대한 분노가 젊은 날만의 것이라면 세상의 선한 변화는 가능한 것일까. 종교라는 것도 마찬가지여서 의심하지 않는 종교는 이미 종교로서의 가치를 잃어버린 것은 아닐까. 그런 의미에서 레너드 코헨의 ‘할렐루야’는 되새겨 들을 만한 가치가 있는 노래다.

[전태흥의 음악칼럼] 레너드 코헨 ‘할렐루야’

이 할렐루야는 많은 음악가들이 영감을 얻어 음악으로 작곡하였다. 그중에서도 헨델이 작곡한 오라토리오 ‘메시아’ 중에서 합창곡 할렐루야는 연말이면 거리에서 쉽게 들을 수 있을 정도로 너무나 유명한 곡이다. 헨델의 할렐루야는 메시아, 즉 구세주에 대한 찬양과 경배로 엄숙하고 장엄하기 이를 데 없다. 하지만 레너드 코헨의 할렐루야는 어둡고 쓸쓸한, 할렐루야라는 말의 의미에 불경한 느낌마저 들게 하는 노래다. 장르는 다르지만 헨델의 할렐루야가 의심 없는 신에 대한 찬양이라면, 레너드 코헨의 할렐루야는 의심을 가진 깨어진 찬미이다. 좀 더 거칠게 말하자면 헨델이 모범생이라면 레너드 코헨은 아웃사이더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레너드 코헨의 할렐루야는 수많은 가수, 300여명의 가수가 리메이크했다. 밥 딜런, 제프 버클리, 그리고 일본의 치에 아야도까지 해석에 따라 그 노래가 다르게 다가오는 것은 가수들의 성향에 따라서 혹은 그들이 세상을 보고 대하는 눈이 다르기 때문이기도 하다. 레너드 코헨 자신도 이 노래를 처음과 다른 버전(노랫말을 바꾸어 부름)으로 부르기도 했고 리메이크한 가수들도 노랫말을 스스로 바꾸어 부르기도 했다.

레너드 코헨의 할렐루야는 성경에 나온 다윗과 밧세바의 이야기에 기반을 두고 있다. 다윗은 자신의 충직한 부하였던 우리야의 아내, 밧세바를 간음한 것도 모자라 우리야를 전장의 맨 앞에 서게 해 죽이라는 편지를 장군에게 보내 우리야를 죽게 만든(그 편지를 전달한 이가 우리야 자신이었다) 후에 밧세바를 취했다. 하느님으로부터 벌을 받아 회개하고 용서를 받고 하느님을 찬양하는 노래를 부르는 이야기를 레너드 코헨은 노래의 첫머리에 넣었다. 그렇기 때문에 이 할렐루야는 찬양이나 찬미보다는 후회의 할렐루야다. 유혹에 견디지 못한 한 인간의 후회가 어찌 즐거울 수 있겠는가.

“(중략)/아마 하늘 저 위에는 하느님이 계시겠지요/ 이제껏 사랑으로부터 배운 것이라 여겨지는 모든 것/ 제게는 당신을 이기려는 자를 먼저 죽여야 하는 법뿐이었지요/ 당신이 오늘 밤 들었던 소리는 불평이 아닙니다/ 영광의 빛을 보았노라 칭하는 이의 웃음소리도 아닙니다/ 그저 차갑고 매우 외로운 할렐루야일 뿐”(할렐루야 가사 일부)

이 노랫말은 레너드 코헨의 두 번째 버전에 나오는 것으로 다윗이 하느님께 고백하는 독백이다. “당신을 이기려는 자를 먼저 죽여야 하는 법”이라는 대목은 다윗이 유혹에 넘어간 것을 막아주지 못한 신에 대한 원망이 아닐까. 어쩌면 레너드 코헨은 고등학생이 가졌던 내 어린 마음처럼 세상을 불평등하게 만든 신에게 의문을 가졌을지 모르겠다. 해서 신에게 다윗을 변명하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최고 권력자의 측근이라는 사람이 관계된 재단이 800억원이라는 거액을 기업으로부터 뜯어내고 그와 관련한 비리가 매일처럼 쏟아져 나오는데도 확인되지 않은 음해라고 뻔뻔하게 버티는 청와대나 물대포에 맞아 숨진 백남기 농민을 향해 온갖 조롱과 막말을 내뱉는 인간 이하의 군상들, 또한 스스로의 지식을 권력과 돈에 팔아버린 지식인들을 보면서 오늘 다시 레너드 코헨의 할렐루야를 듣는다. 그의 저음은 마치 아무런 감정이 없는 사람처럼 음울하다. 다윗의 죄를 용서한 신이었기에 이들의 죄도 침묵하는 것일까. 교황 프란치스코의 말씀처럼 과연 그들은 심판받을 수 있을까. 이 나라(이것이 나라인지도 의문이지만)에서 아무것도 못하고 살고 있는 내 자신이 이토록 부끄러운 이유는 무엇일까. 칼럼니스트

영남일보(www.yeongnam.com),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

위클리포유인기뉴스

영남일보TV



많이 본 뉴스

  • 최신
  • 주간
  • 월간

영남일보TV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