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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명호 시인이 지난 1일 경북대구동학공부방을 찾아 ‘유학과 성리학은 다르다’를 주제로 강의를 하고 있다. |
10년 만에 강호로 나온 곳이 대구다. 소백산자락에 칩거하고 있던 송명호 시인 겸 한학자(64)가 8일 오후 경북대구동학공부방(방장 정지창 전 영남대 교수·대구시 남구 봉덕동 용두2길 29)이 주최한 동학강좌(제3강)에서 ‘다산(정약용)은 저속한 성리학자이며, 간신의 표본이다’를 주제로 강의했다. 그는 지난달 25일엔 ‘공자와 밥 딜런’, 지난 1일엔 ‘유학과 성리학은 다르다’를 주제로 강의한 바 있다. 송 시인은 오는 15일엔 제4강 ‘공자는 충효를 말하지 않았다’, 22일엔 제5강 ‘논어 관련 학자들이 논어의 도(道)나 명(命)의 뜻조차 모르다니’를 주제로 강의를 할 예정이다.
그는 딱딱한 논어를 쉽게 풀어 해석하고 질퍽한 욕설과 육두문자를 섞어 강의를 한다. ‘쪼다’ ‘멍청이’ ‘쓸모없다’ ‘흐지부지’ ‘흐리멍덩’ ‘홀딱 벗고’ ‘긴가민가’ ‘얼렁뚱땅’ ‘똥인지 된장인지’ 등과 같은 표현을 종종 한다. 이런 표현에 대해 그는 공자가 말한 ‘무적야 무막야, 절사, 무가무불가’와 다를 바 없다고 한다.
논어 쉽게 풀이·육두문자 강의
대통령 비판 등 돌직구로 유명
佛혁명·민주주의 공자에서 나와
“기득권 안주하거나 이용해 명성
우병우는‘사회적 뇌물’ 먹은 자”
그는 존경받거나 훌륭하다고 알려진 인물에 대해 가차없는 비판과 돌직구를 날리는 것으로 유명하다. ‘개코나 현각스님이 돌중인 이유’‘주희는 이명박 같은 놈이었다’ ‘된장남 진중권에게 전한다’ ‘판소리 신재효는 밥 딜런’ ‘베토벤은 건전가요의 박정희’ ‘고은은 역겹다’ ‘퇴계로 감동하고 다산으로 분노한다’ 등 인신공격성 독설도 서슴지 않는다.
송 시인은 2006년 박근혜 대통령이 한나라당 대표이던 시절 서울에서 면도칼 테러를 당했을 때 풍자시를 발표하고 이 사건을 비꼬다 벌금 100만원에 기소유예를 받은 적이 있다. 이후 10년간 세상과 연을 끊고 잠수(?)를 탔다.
“대통령을 비판해 한때 유명해졌는데 이젠 그러지 않으려고 합니다. 학문하는 사람이 학문으로 알려져야 하지 않겠어요. 대한민국에서 사서오경을 가르친 마지막 유학자이고 싶습니다.”
그는 공자에 대해 할 말이 많다.
“공자는 자신보다 못난 사람마저 스승이라고 했어요. 나는 성인이 아니다. 내 실수를 말해주어 스승이다. 나는 전지하지 않고 겨우 하나를 안다고 했지요. 논어에 ‘학(學)’자는 예순다섯 번, ‘교(敎)’자는 일곱 번 나오듯 늘 배우려고 한 사람입니다. 루터의 종교개혁, 프랑스혁명, 민주주의가 공자로부터 나왔습니다. 공자는 왕비였던 ‘남자(南子)’를 최초로 ‘여자(女子)’로 부른 사람입니다. 사마천과 주희 같은 놈이 공자를 깔아뭉갰죠. 주희는 퇴계 선생의 발끝에도 못 따라올 인물입니다. 겨우 주자가례 같은 쓸데없는 책을 내고 어려운 말로 공자를 욕보였어요. 심지어 둘은 공자를 동성연애자로 몰았지요. 태극이고 무극이고 알 필요 없지요. 특히 주희는 모든 인민을 가미카제 특공대로 만들어 놨습니다. 멸망한 송나라를 재건하기 위해 복수심에 불타 금나라를 공격하게 만든 게 주희의 성리학입니다. 충과 효도 나중에 덧입힌 겁니다. 공자는 정확히 네가 (자식이) 아버지에게 효를 하듯 백성을 사랑하라고 했습니다. 충(忠)은 공자의 아둔한 제자 증삼이 강조했지요. 우병우가 증삼 같은 인물입니다. 서울법대 나온 놈들 겨우 나와서 하는 게 돈이나 챙기고 말이죠. 뇌물에는 개인적 뇌물과 사회적 뇌물이 있는데 기득권에 안주하거나 이를 이용해 먹어서 명성이 높은 것은 사회적 뇌물이에요. 우병우는 사회적 뇌물을 먹은 자입니다.”
송 시인은 퇴계 선생에 대해서도 관대하다.
“퇴계 선생은 스물다섯 살이나 적은 기대승과 편지를 주고받으며 학문을 논했습니다. 기대승의 나이가 어리거나 호남이라고 무시하고 그러지 않았어요. 퇴계 집안에 종이 353명 있었습니다. 손부가 아이를 낳았는데 젖이 부족해 하녀에게 젖을 물리려 하자 퇴계가 못하게 했어요. 하녀의 아이가 있는데 그러면 안 된다고 했지요. 성리학 따위에 퇴계를 종속시키면 안 됩니다.”
송 시인은 경산 와촌 출신이다. 소죽을 끓이면서도 사서삼경을 외우고 자기 전까지 책을 손에서 놓지 않았다는 부친의 영향으로 어릴 때부터 한학을 했다. 7남매 가운데 4명이 서울대에 갈 정도로 수재집안의 아들로 태어났다. 9세 때 부친이 별세한 뒤 갖은 고생을 했다. 검정고시를 거쳐 잠시 9급공무원을 하다 32세 때 서울대 국문학과에 입학했다. 대학시절 서울대 대학문학상 단편소설 부문(1986), 계명대 전국대학생 계명문화상 단편소설 부문(1987)에 당선되기도 했다. 아들 역시 서울대 사회계열 수석으로 입학해 현재 미국에 유학 중이다.
그는 대학 졸업 후 1990년부터 우린정(雨鱗亭) 서당을 운영하면서 20여년간 사서오경, 장자, 도덕경, 통감절요 등을 가르쳤다. 제자만 해도 300명이 넘는다. 그 가운데엔 교수, 의사, 한의사, 변호사 등 전문직도 많다. 그는 논어의 경우 20번 이상 원전강독을 했다.
그는 시집도 냈다. ‘바람에 찍은 혜초의 쉬임표’ ‘안개가 아픈 자작나무’ 등을 출간했으며 1만원권 지폐에 등장하는 고구려 천문도 천상열차분야지도(한문)를 처음으로 완역한 바 있다.
2006년엔 ‘예기집설대전(禮記集說大全) 1·2권’을 내 그해 문화관광부 우수학술도서로 선정되기도 했다. 그는 내년 봄까지 1천쪽이 넘는 ‘공자의 시작에 서다’를 출간할 예정이다. 한글로는 다 썼는데 영어로는 아직 완성되지 않았다.
송 시인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라는 질문에 “시대의 가치를 위해 투쟁하는 것이 곧 인이고 도입니다. 고정관념을 깨고 사실을 뒤집어 생각할 줄 아는 깨어있는 자세가 필요합니다”라고 답했다.
글·사진=박진관기자 pajika@yeongnam.com

박진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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