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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록 성인이라 하더라도 ‘내면의 아이’는 상처받은 어린아이로 남아있는 경우가 흔하다. 과거에 상처를 받아 억압된 감정 상태에 머물러 있는 아이들이다. 그것들은 미해결된 채 어린 시절의 정서 상태로 머무르며, 성인이 된 현재 자신의 삶에 엄청난 영향을 끼친다. 내면의 아이는 어린 시절에 우리를 대했던 부모의 태도와 환경에 절대적 영향을 받아 형성된다. 내면의 아이는 어른이 된 지금도 우리 안에 똬리를 틀고, 우리의 삶에 영향력을 끼친다. 특히 부정적인 내면의 아이는 우리에게 정서적, 감정적 문제들을 일으키고, 대인관계에도 악영향을 끼치며 행과 불행을 좌우한다.
영국의 세균학자 알렉산더 플레밍의 삶에도 어린 시절 형성된 ‘내면의 아이’의 영향이 짙게 배어 있다. 정신의학자 휴 미실다인이 쓴 ‘몸에 밴 어린 시절’에 잘 소개되어 있다.
플레밍은 ‘푸른곰팡이(Penicillium notatum)’에 있는 페니실린이라는 물질에 세균을 죽이는 성질이 있음을 발견해 인류에게 항생제를 선물했다. 페니실린의 발견이 그의 대표적인 업적이다. 그는 그 공로로 1945년 페니실린의 대량 추출 및 정제법을 개발한 에른스트 보리스 체인, 하워드 월터 플로리와 함께 노벨 생리의학상을 공동수상했다.
플레밍이 푸른곰팡이가 박테리아의 성장을 막는 데 큰 효능이 있음을 발견한 것은 1928년이었고, 그는 푸른곰팡이에서 항생물질을 뽑아내 정화할 수만 있다면 생명을 구하는 강력한 효능의 약품임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12년 동안 푸른곰팡이를 배양했지만 아무런 성과를 내지 못했다. 1940년에 이르러서야 플레밍이 작성한 서류를 우연히 본 생화학자 체인이 플로리와 함께 제조법을 고안하여 환자에게 적용함으로써 플레밍의 고민을 해결하였고, 1943년에야 페니실린의 대량 생산이 이루어졌다.
플레밍은 푸른곰팡이의 효용성을 잘 알고 있었지만, 자신의 의사를 나타내거나 다른 사람에게 자기의 생각을 납득시키는 데 치명적인 결점을 가진 사람이었다. 그가 후일 “적절한 화학적 방법을 협조 받을 수 없어서 연구를 더 진전시키지 못했다”고 술회했다. 플레밍 같은 뛰어난 과학자도 어린 시절 형성된 ‘내면의 아이’로 말미암아 일생 동안 고통을 겪어야 했다.
플레밍은 남자 형제 다섯, 여자 형제 셋과 함께 영국 스코틀랜드의 외딴 농장에서 성장했다. 아버지는 60세에 재혼하여 플레밍을 낳았으며 그의 밑으로 남동생이 하나 있었다. 아버지는 남동생이 태어난 직후 뇌출혈로 쓰러진 뒤 2년 후 숨졌다. 아버지에 대한 플레밍의 기억은 안색이 창백하고 수족의 놀림이 불편한 노인이 난로 곁에 앉아서 자기가 죽으면 자식들은 어떻게 될 것인가를 걱정하는 모습이었다고 한다.
아버지의 병세가 악화되는 동안 집안에 무거운 침묵이 깔려 있었는지 상상하기란 그리 어렵지 않다. 원래 어린 아이들은 떠들기 마련이지만, 걱정이 앞섰을 어머니로부터 즉각 제지받았을 것이다. 네 살 때 맞이한 아버지의 죽음으로 인해 그는 자신을 표현하는 능력을 남들처럼 기르지 못했다. 9남매 중 여덟째였던 그의 생각과 발언은 집안에서도 별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지 못했다. 어린 시절 놀이도 농장에 사는 소년이 혼자서 즐길 수 있는 것, 사냥과 낚시가 고작이었다. 그는 쾌활한 형과 누나들을 지켜보고 그들의 말을 듣는 데 익숙했다.
플레밍은 병리학 연구기관의 연구원이 된 뒤에도, 40여 년 동안 날마다 공동 작업하고 학문적인 토론을 벌였지만 거의 말이 없었다고 한다. 미소를 띤 채 앉아서 호의적이고 애정 어린 태도를 보였을 뿐, 거의 침묵으로 일관했다. 12년 동안 푸른곰팡이 배양을 계속한 그의 노력은 영웅적이었지만, 그 효용성을 주변 사람들에게 제대로 납득시키지 못했으며 다른 과학자들에 의해 연구결과가 실용화될 수 있었다. 이 위대한 과학자도 그의 업적에도 불구하고, 그의 삶은 어린 시절 형성된 내면의 아이로 인해 고통을 겪어야 했다.
<대구사이버대학교 교수 songyoume@dc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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