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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서 오른쪽으로 맨 윗줄부터 재즈가수 나탈리 콜, 가수 데이비드 보위, 배우 앨런 릭먼, 신영복 교수, 기타리스트 글렌 프레이, 석학 움베르토 에코, 가수 프린스, 권투선수 무하마드 알리, 미래학자 앨빈 토플러, 야구해설가 하일성, 가수 레너드 코헨, 기타리스트 조덕환, 가수 조지 마이클, 배우 캐리 피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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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아무래도 20세기 사람인가 보다. 신년이 되면 새로 바뀐 해가 실감나지 않는 탓에 한동안 여기저기에 지나간 연도를 쓰는 일이 잦다. 난 이런 증상이 심한 편이어서 가끔씩은 ‘201○’가 아니라 ‘199○’로 쓸 때도 있다. 나처럼 20세기를 살았고 그때를 주름잡았던 인물들이 하나둘씩 떠난다. 새해에 맞은 이즈음에 지나간 해를, 그것도 세상을 떠난 이들 이야기를 꺼내는 게 독자들에게 죄송하긴 하다. 나는 이 지면을 통해 대중문화의 요모조모를 비추어 보고 있지만, 만약 최근에 유명을 달리한 사람들을 되짚어 보는 코너가 생기면 어떨까 상상해 본다. 아무튼 이 글은 2017년에 1주기를 맞이할 고인들 가운데 내가 애정을 뒀던 몇몇에 관한 시시콜콜한 추모사다.
나탈리 콜(1950~2015.12.31)이 먼저 생각났다. 이 가수는 재작년 마지막 날 세상을 떠났지만 부음 소식을 전해들은 게 2016년 벽두라서 넣어본다. 그녀의 아버지 냇 킹 콜이 생전에 부르며 남겼던 노래 ‘언포게터블’에 자신의 목소리와 영상을 입힌 듀엣곡 때문일까. 나탈리 콜과 작별하는 팬들이 많이 남긴 말이 ‘이제 하늘에서 아버지와 같이 맘껏 노래 부르길’이었다.
20세기 대중문화에 가장 큰 영향력을 끼친 가수 데이비드 보위(1947~2016.1.10)가 세상을 떠나고 며칠 뒤에 나는 어느 신문에서 ‘보위에게 창조경제를 배우자’는 식의 제목이 달린 칼럼을 읽었다. 혹시 ‘영화 명량을 보고 이순신의 리더십을 배운다’ ‘노벨상 수상자 밥 딜런에게서 자유를 읊다’가 앞뒤로 따라붙었을까봐 두렵다. 데이비드 보위가 혁신적인 스타일을 통해 말마따나 창의적으로 문화산업의 한 축을 쌓은 건 맞다. 그러나 ‘나를 보고 배워’라는 식의 말은 그와 안 어울린다. 그는 꼰대가 넘쳐나는 이 세상으로부터 ‘너네는 내 흉내도 못 낼걸’이라며 문화와 예술의 장에 아우라를 남기고 우주로 향했다.
앨런 릭먼(1946~2016.1.14)이란 이름을 아는 이는 많지 않다. 허나 나이 있는 세대에겐 영화 ‘다이하드’의 악당 한스 그루버 역으로, 젊은 세대에겐 ‘해리 포터’에서 무슨 교수 역으로 익숙한 얼굴이다. ‘러브 액추얼리’에서 바람 피우는 사내 역할도 인상 깊었지만, 내게 고인의 최고 필모그래피는 ‘갤럭시 퀘스트’다. 다들 ‘이건 뭔 영화?’라고 할 게 분명하니까, 통과.
신영복(1941~2016.1.15)을 이 자리에 소개하는 까닭이 있다.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이란 책보다 대중에게 더 알려진 선생의 작품이 소주 ‘처음처럼’에 쓰인 필체다. 많은 사람들이 즐기는 술병에 자신의 글을 주고 한 푼의 저작료도 받지 않았다는 이야기는 유명하다. 선생의 유지는 1주기를 맞아 말년에 컴퓨터용 폰트로 만들었던 ‘신영복체’를 누구나 무료로 쓰도록 한 결정으로 이어지고 있다.
미국의 록 밴드 이글스를 이끌던 글렌 프레이(1948~2016.1.18)는 팀에서 기타리스트 겸 보컬리스트였다. 그렇긴 한데 기타 연주는 조 월시란 팀 동료가 음악광들에게 후한 평가를 받았고, 노래 쪽으론 ‘호텔 캘리포니아’와 ‘데스페라도’를 부른 드러머 돈 헨리에게 대중적 인기를 추월당했다. 이리저리 끼인 처지가 딱하긴 하지만 나른한 그의 목소리를 음반으로만 들을 수 있게 되었다는 아쉬움보단 덜하다.
석학이라는 칭호가 붙은 학자들 가운데 움베르토 에코(1932~2016.2.19)만큼 대중 문화와 연관 많은 이도 드물 것 같다. 영화로도 만들어진 소설 ‘장미의 이름’과 문화연구자들에게 필독서가 된 ‘기호학이론’, 그리고 수많은 대중문화와 정치 칼럼까지 그가 남긴 글은 어마어마하게 많다. 2009년에 ‘움베르토 에코 마니아 컬렉션’이라는 제목의 시리즈가 우리나라에서 나왔지만, 난 미처 전집을 채우지 못했다. 그래서 간혹 나오는 중고 책을 구하러 다니는 처지가 되었다. 에코 같은 학자들은 평생 수십 권의 명저를 남기겠다는 마음가짐으로 살았을 법한데, 그들의 책을 사서 모으겠다는 것 따위가 내 목표니까 한심하다.
프린스(1958~2016.4.21)의 갑작스러운 죽음도 놀라운 일이었다. ‘응팔’ 세대라면 누구나 들어봤을 영화 사운드트랙, 하지만 누구도 본 사람은 없었던 영화 ‘퍼플 레인’의 가수이자 주연. 마이클 잭슨의 라이벌, 그리고 스스로에게 채워진 명성의 굴레를 벗어나려고 그랬는지 이름을 바꾸었는데(물론 애당초 프린스도 예명이지만) 그 이름이 ‘한때 프린스라고 불렸던 남자’. 이후에 다시 프린스로 돌아오긴 했으나, 개명이 아니라 이름을 지운 사례가 또 있을까.
프린스처럼 권투선수 무하마드 알리(1942~2016.6.3)도 이름을 바꾼 스타 중 한 사람이다. ‘나비처럼 날아 벌처럼 쏜다’라는 명언을 남겼고, 선수 시절에 입은 뇌손상 후유증으로 ‘파킨슨병은 곧 알리의 병’으로 각인시킨 고인의 경기를 내가 직접 본 적은 없다. 미들급 챔피언 자리를 두고 슈거레이 레너드, 마빈 헤글러, 토마스 헌즈, 여기에 로베르토 두란까지 끼어들어 물고 물리는 싸움을 벌인 1980년대 권투로 입문한 나는 이후에 마이크 타이슨이 챔피언 자리를 너무나 싱겁게 지키다가 제풀에 지쳐 쓰러진 1990년대에 또 흥미를 잃었다. 권투가 적어도 내게는 20세기의 스포츠다.
앨빈 토플러(1928~2016.6.27) 난 이 사람이 ‘Toffler’란 이름 때문에 토플 점수에 매달리며 입시나 취직 공부만 열심히 하는 매력 없는 범생이 같아서 싫었다. 나만 그런 게 아니었고, 고인의 전공인 미래학은 선배 다니엘 벨보다도 하급으로 매겨지던 게 한국 지식인들 사이의 분위기였다. 하지만 그의 책을 읽어보면 여러 대목에 남긴 통찰력이 우리나라 보수 정치인들이 그를 급진종북좌파로 몰아세울 만큼 비판적인 안목이 있다.
안목이라 하면 야구해설가 하일성(1929~2016.9.8)을 빼놓을 수 없다. “야구 몰라요”라는 유행어는 자매품 “아, 역으로 가네요”와 함께 본인의 틀린 예상을 방패막이하는 만능에 가까운 멘트로 쓰이고 있다. 국민 해설가에서 한국야구연맹 사무총장 자리까지 맡으며 성공한 인생이 왜 그렇게 자살로 마감되었는지, 야구 같은 인생 몰라요.
밥 딜런이 노벨 문학상 수상자로 발표되었을 때 내가 가장 먼저 떠올린 사람이 레너드 코헨(1934~2016.11.7)이었다. 비록 문학에 대한 안목은 없지만 밥 딜런이 상을 받을 정도면 레너드 코헨이 적어도 문학상 후보는 되어야 한다고 믿는다. 그래서 갑자기 끓어오른 밥 딜런 열풍의 한편에서 접한 그의 부고 기사는 참 묘한 심정을 불러일으켰다.
갑작스러운 병으로 세상을 떠난 조덕환(1953~2016.11.14)도 기려야 한다. 들국화 데뷔 앨범에서 기타를 쳤고 작사작곡과 노래도 나누어 맡았던 그의 작품 가운데 최고작은 ‘아침이 밝아올 때까지’가 아닐까 싶다. 신촌에 있었던 술집 ‘레드 제플린’에서 이 노래를 처음 듣고 난 그때까지 한국 가요에서 접하지 못했던 D, C, B, F 식으로 진행되는 코드 진행에 멍해졌던 기억이 있다. 정신 차리고 들으니까 그건 레너드 스키너드 같은 미국 남부 록음악에서 곧잘 쓰이던 음률이었으니, 결국 우리의 예술과 대중문화의 성취라는 것이 서구 문화를 얼마나 그럴듯하게 흉내 내는지에 달려있다는 사실을 숨길 순 없을 것 같다.
그리고 지난 성탄절에 전해온 천재 음악가 조지 마이클(1963~2016.12.25)의 죽음. 아마도 동시대에 발표되어 가장 성공적으로 입성한 캐럴곡인 ‘라스트 크리스마스’ 노래 제목으로 기억될 조지 마이클은 스스로 극적인 인생 이야기 한 편을 완결지은 느낌이다. 사실 내겐 그보다 왬(Wham) 시절의 동료 앤드류 리즐리에 관해서 할 이야기가 더 많지만 그건 다음으로.
끝으로 지난 회 글에서도 소개했던 영화 ‘스타워즈’ 시리즈에서 레이아 공주 역할을 맡았던 캐리 피셔(1956~2016.12.27)가 남았다. ‘스타워즈’는 아직 8·9탄을 더 남겨두고 있는데, 에피소드 8은 고인이 미리 촬영을 마친 상태라고 하지만, 제작진이 마지막 영화는 어떻게 끌고 갈지 모르겠다. 그녀 또한 이번에 개봉한 ‘스타워즈 로그 원’에서 이미 저세상 사람이 되었지만 홀로그램으로 등장한 피터 쿠싱의 길을 걸을까. 우리가 김광석 홀로그램 콘서트를 통해서도 느끼듯이 현대 기술은 산 자와 죽은 자들을 뒤섞어 우리의 상상력을 더한다. 맨 처음에 말했던 냇 킹 콜과 나탈리 콜 부녀지간도 그랬고, 죽음이라는 비통한 사건을 위로할 기술과 상상력은 그리움으로부터 나온다.
P&B 아트센터 아트디렉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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