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주의 영화] 눈길·러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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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7-03-03   |  발행일 2017-03-03 제42면   |  수정 2017-03-03
하나 그리고 둘

눈길
잊어선 안될 아픈 역사, 두 소녀 이야기


[금주의 영화] 눈길·러빙

‘눈길’(감독 이나정)은 일제 강점기 한 마을에 살았던 ‘두 소녀의 이야기’다. 가난한 종분(김향기/김영옥)과 부잣집 막내딸인 영애(김새론)는 동갑내기임에도 격이 다른 생활을 하고 있다. 단발머리의 종분은 홑저고리에 다 해진 신발을 신고 종일 엄마를 도와 일하는 반면, 긴 머리를 단정하게 묶은 영애는 예쁜 코트에 반짝이는 구두를 신고 학교에 간다. 종분은 영애의 오빠 영주(서영주)를 좋아하는 눈치지만 집안의 신분차와 영애의 견제 때문에 두 사람이 이뤄지기는 어려워 보인다.

그러나 영애의 아버지가 독립운동에 가담한 사실이 알려지자 상황은 급변해 영주는 일본군에 끌려가고, 종분과 영애는 종군위안소로 가는 기차에 타게 된다. 종착역을 알 수 없는 이 기차는 둘과 마찬가지로 속거나 강제로 끌려온 소녀들로 가득 차 있다. 고향도 계급도 달랐지만 이제 같은 지옥으로 떨어지게 된 아이들. 영화는 그때부터 ‘소녀들의 이야기’가 된다.


동갑내기 김새론·김향기 주연
TV로 먼저 선뵌 위안부 영화
美醜의 대비로 미학성 극대화


위안부 소재의 영화는 변영주 감독의 다큐멘터리 ‘낮은 목소리’(1995) 이후 오랫동안 진전을 보이지 못했으나 작년 2월 말 개봉한 ‘귀향’(감독 조정래)이 350만 명이라는 관객을 동원하며 큰 이슈를 불러일으켰다. 이는 박근혜정부의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관련 한·일 정부 합의(2015년 12월28일) 이후 국민들의 공분이 반영된 결과로 볼 수 있는데, 눈물겨운 14년간의 제작기와 성공적인 클라우드 펀딩으로 더욱 화제가 되었다. ‘눈길’은 이보다 앞선 2015년 3·1절 KBS를 통해 방영되었던 작품이다. 처음부터 극장 개봉을 목표로 제작돼 각본·촬영 및 연기 등에서 영화적 연출과 완성도를 느낄 수 있다.

생존자들의 철저한 고증을 바탕으로 한 만큼 ‘눈길’과 ‘귀향’은 유사한 데가 많다. 특히 삭막한 위안소의 풍경과 그곳에서 자행된 일본군의 짐승 같은 행동은 다를 바가 없다. 공히 그 끔찍한 고통 속에 피어난 소녀들의 우정을 담고 있으며, 살아 돌아온 피해자들의 여전히 곤고한 삶을 보여준다. ‘눈길’은 종분과 영애를 중심으로 소녀들이 서로를 보듬으며 위안소 생활을 버텨나가는 과정을 담고 있다. 식도가 헐어 음식을 삼키지 못하는 영애를 위해 동료가 과자를 입으로 으깨주는 장면은 이들 사이의 끈끈한 연대가 극대화된 부분이다. 그럼에도 이 절절한 에피소드에 도취되지 않으려는 연출의 태도가 절도 있게 느껴진다. 같은 맥락에서 ‘눈길’은 소녀들이 당했던 성폭력을 날것의 이미지로 묘사하는 대신 설경과 소녀들의 순수함을 부각시킴으로써 더욱 애잔하게 만든다. 세련된 미추(美醜)의 대비는 ‘귀향’이 성취하지 못한 이 영화의 미학성이라고 할 수 있는데, 위안소 안에서 종분과 영애가 ‘소공녀’를 읽는 장면이나 차디찬 눈과 포근한 목화솜을 중첩시키는 부분, 무엇보다 종분이 혼자 고향으로 돌아오는 고통스러운 길의 아름다운 전경 등에서 두드러진다.

또 하나 주목해야 할 것은 위안부 소재의 영화들(다큐는 물론이고 2015년 8월에 개봉한 ‘마지막 위안부’(감독 임선)도 포함)이 대개 현재 생존자들을 등장시킨다는 점이다. ‘눈길’도 할머니가 된 종분의 현재와 위안부에서의 일들이 교차되는 플래시 백(flash back) 구조로 진행되며, 과거를 부끄러워하다가 결국 동사무소에 위안부 피해자로 등록하는 장면이 삽입되어 있다. 이것은 1940년대 같은 공간에서 삶과 인권을 유린당하며 맺어진 소녀들의 횡적 연대를 종적 연대로 확장하고자 하는 노력이다. 종분은 그 시절 위안소에서 또래들에게 그랬듯 깨어진 가정에서 떨어져 나온 10대 소녀 은수(조수향)를 거두어준다. 복지와 보호의 사각지대에서 갖은 위험과 유혹에 노출된 은수는 위안소의 소녀들처럼 사회의 약자고 피해자다. 그래서 ‘눈길’은 그 시절 소녀들의 이야기를 넘어 지금‘우리들의 이야기’가 된다. (장르: 드라마, 등급: 15세 관람가, 러닝타임: 121분)


러빙
사랑으로 세상을 바꾼 부부 이야기


[금주의 영화] 눈길·러빙

우리에게 그런 때가 있었다. ‘깜둥이’나 ‘튀기’ 같은 노골적인 인종차별적 단어가 흔하게 사용되던 때가. 호랑이 담배 피우던 시절이 아니라 불과 20~30년 전 일이다. 세계적으로 ‘평등’과 ‘인권’이 화두인 21세기의 청년들에게 이런 단어는 많이 생소해졌지만 과연 보수적인 우리 사회 안의 편견과 차별은 얼마나 사라졌을까. 하물며 자유의 여신상을 심벌로 내세우는 미국도 겉과 속은 다른 것 같다. 트럼프의 당선으로 그것은 더욱 극명해졌지만, 불과 50여 년 전에 (이성 간에도) 사랑을 금지한 법이 있었다는 사실은 놀랍다.

‘러빙’(감독 제프 니콜스)은 1958년 미국에서 있었던 ‘러빙 부부’의 실화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 당시 버지니아주에서는 타 인종 간의 결혼을 불법으로 규정하고 있었는데 리처드 러빙(조엘 에저튼)과 밀드레드 러빙(루스 네가)의 항소를 통해 법이 바뀌는 기적이 일어난다. 극영화보다 먼저 다큐멘터리로 제작돼 화제를 모았으나 미국 대법원까지 갔던 이들의 이야기는 픽션보다 더 드라마틱하다.


他인종 결혼 금지한 50년대 美
인종 차별법에 맞선 실화 다뤄



이 작품은 부조리한 권력 혹은 거대한 시스템에 맞선 개인의 투쟁을 그리고 있다는 점에서 ‘달라스 바이어스 클럽’(감독 장 마크 발레)이나 ‘로렐’(감독 피터 솔레트) 등의 연장선상에 있으며 기본적으로 인권 영화의 성격을 띠고 있다. “작은 싸움에서 지고 큰 싸움에서 이기면 되죠”라는 밀드레드의 대사는 두 사람이 감당해야 했던 법정 공방의 지난한 성격을 짐작하게 한다. 그러나 영화의 담담한 어조는 최종 판정에 이르기까지 조바심이나 치열함을 드러내는 대신 이 모든 것을 가능케 했던 두 사람의 사랑에 집중한다. ‘위대한 사랑’이라는 카피를 달고 개봉했던 그 어떤 영화 속 연인들보다 러빙 부부가 보여주는 감정은 깊고 진하고 무겁다. 그래서 ‘러빙’은 미국 역사를 바꾼 떠들썩한 법정 드라마가 아니라 제목처럼 그저 한 편의 아름답고 잔잔한 사랑 이야기로 충분한 의의를 가진다.

이러한 영화의 성격은 재판 이후 조용하게 살았던 러빙 부부의 실제 인생과도 닮아 있다. 은은하고 애틋한 분위기가 말이 별로 없는 리처드, 침착한 밀드레드, 그리고 그들의 고향인 센트럴 포인트의 한적한 풍경과 조화를 이룬다. 무뚝뚝하면서도 순애보가 있는 벽돌공 역을 훌륭히 소화해낸 조엘 에저튼, 올해 아카데미 시상식 여우주연상 후보에까지 올랐던 루스 네가의 기품 있는 연기도 볼만하다. (장르: 드라마, 등급: 12세 관람가, 러닝타임: 123분)

윤성은 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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