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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해송 작가가 1953년 2월11일자 영남일보에 쓴 시사칼럼 ‘다음 代를 어떻게?’. 어린이의 인권과 나라의 미래를 걱정하는 심정이 그대로 드러나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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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남일보 1951년 1월4일자에 게재된 마해송 작가의 수필 ‘大邱辛卯’. |
영남일보는 어린이날을 맞아 ‘대한민국 어린이헌장 초안’을 작성한 아동문학가 마해송 작가(1905~66)의 작품을 발굴 공개한다. 이번에 공개하는 작품은 마 작가가 6·25전쟁 당시 영남일보에 발표한 원고로, 문학과지성사가 2015년 완간한 마해송 전집과 수필집 등에 수록되지 않은 미발굴 작품이다.
새롭게 발굴한 작품은 1951년 1월4일자 영남일보에 게재된 수필 ‘大邱辛卯(대구신묘)’, 53년 2월9·10일자에 상·하편으로 실린 ‘外國文化輸入(외국문화수입)’, 시사칼럼 ‘다음 代를 어떻게?’(53년 2월11일자), ‘화가 정점식’(53년 6월16일자) 등 5편이다.
1923년 우리나라 최초의 창작동화 ‘바위나리와 아기별’을 쓴 마 작가는 한국 아동문학의 선구자로 불린다. 1957년 제정된 대한민국 어린이헌장의 초안을 작성하며 한평생 어린이 인권운동에 힘을 쏟았다. 그가 6·25전쟁 당시 신문 지면에 다수의 글을 쓸 수 있었던 것은 영남일보와의 깊은 인연 때문이었다. 서울을 떠나 3년여간 대구에서 피란살이를 한 마 작가는 영남일보 주필 겸 편집국장을 지낸 시인 구상과 돈독한 사이였다. 영남일보는 그를 위해 신문사 뒷문 입구 전화교환실을 옮기고 그곳에 전용 책상을 마련해 주기도 했다. 이런 인연으로 신문사에 수시로 드나들며 수필·칼럼 등 다양한 글을 지면에 발표했다.
공개하는 작품 중 ‘다음 代를 어떻게?’는 영남일보 고정코너 ‘一家言(일가언)’에 실린 시사칼럼이다. 전쟁통에 얼어죽은 한 아이를 다룬 글로 당시의 참혹한 현실과 정책을 꼬집었다. 어린이의 인권과 나라의 미래를 걱정하는 작가의 심정이 그대로 드러나 있다.
‘열한 살쯤 되는 애가 얼어죽었드래요! 나는 눈을 부릅떳다. (중략) 내가 셋방 사는 마루 아래라도 빌려주었으면 그 애는 얼어죽지 않았으리라. (중략) 다음 대(代)를 얼어 죽이고 굶어 죽이고. (중략) 교육도 못받는 차대(次代) 다수양성(多數養成)해서 어떠한 민족의 장래가 있겠는가. 한 어린이를 구할 수 있는 사람이, 백 사람을 구할 수 있고 나라를 구할 수 있는 것이다.’
수필 ‘大邱辛卯’는 피란지 대구에서 첫 새해를 맞은 감회를 옮긴 작품이다. ‘이번의 낯선 설만은 새삼스럽게 서글펐다. (중략) 나 한 사람이 산다고 사는 것이 아니다. 우리를 해치려는 무리를 무찔러 없애 버려서 겨레와 자손이 해를 받을 염려 없도록 해놓아야 그것이 진실로 사는 것이다. 나는 오늘도 서울 갈 생각만 하고 있다.’
상·하편으로 실린 ‘外國文化輸入(외국문화수입)’은 당시 영남일보 문화부장이었던 소설가 김동사와 대담 형식으로 풀어낸 글이다. 이 글에서 마 작가는 ‘국내 문화인들이 해외에 자주 나가 그들의 문화를 배우는 것이 나라의 발전을 위해 바람직하다”고 밝혔다. 휴전 한 달 전인 6월16일자에 실린 ‘화가 정점식’은 대구 추상화의 초석을 닦은 정점식 화가를 다룬 인물평이다. 마 작가는 이 글에서 ‘대구에 또 하나 위대한 예술가가 탄생하였다. 놀라운 천재화가 정점식이다’며 정 화가를 극찬했다.
백승운기자 swback@yeongnam.com

백승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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