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람] 대구경북 유일 ‘대한민국 미용명장’ 임호순 신라미용실 대표

  • 김수영 이지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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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7-06-30   |  발행일 2017-06-30 제41면   |  수정 2017-06-30
예술작품이 된 머리카락…미용 외길 55년의 열정 고스란히
[이사람] 대구경북 유일 ‘대한민국 미용명장’ 임호순 신라미용실 대표
임호순 대한민국 미용명장이 예전에 만든 헤어작품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고용노동부가 선정하는 ‘대한민국 미용명장’은 전국에 8명이 있다. 이들 중 대구·경북에 유일한 미용명장이 있는데 바로 임호순 선생(74·신라미용실 대표)이다. 그는 지역미용계의 대모로 불린다. 2006년 명장이 된 그는 일흔이 훌쩍 넘은 나이에도 아직 미용실을 경영하고 있으며 오래된 단골들의 머리 손질까지 직접한다.

“그 연세에 일이 힘들지 않느냐”는 질문에 “19세에 미용일을 배우기 시작해 아직까지 이 일이 힘들다고 생각해 본 적이 없다. 지난해 여름에 몸을 좀 다쳐 아직 완치가 되지 않아서 자유롭게 움직이는 게 힘들지만 손님들의 머리를 손질하면 오히려 몸이 더 가뿐해지는 것 같다”고 말했다.

결코 적지않은 나이지만 곱게 화장을 한 얼굴에 정성스럽게 머리를 손질한 그는 일흔 중반으로는 전혀 보이지 않았다. “아이가 넷인데 미용일 때문에 제대로 돌봐주지 못한 것이 미안할 뿐”이라는 임 명장은 “그래도 아이들이 잘 자라주고 이런 어머니를 자랑스러워하니 그것이 고마울 따름이다. 그래서 몸이 허락하는 날까지 이 일을 해 나가는 것이 나의 소임이라 생각한다”고 했다.

대구 수성구 우방한가람타운 상가에 자리 잡고 있는 신라미용실을 찾아간 날도 임 명장은 손님의 머리 손질에 한창이었다.

19세에 미용계 입문…2006년 名匠 등극
대한민국명장회 대경지회장 4년 연임중
‘지역 미용계 代母’로 일흔넷에도 현역

“서울서 고교 졸업후 대구 외숙모네 왔다
미용실 따라가 미용사 모습에 반해 입문
손님들 숨겨진 美 찾다보니 나도 젊어져”

잇단 세계대회 수상에다 스카우트 쇄도
저서 ‘색채이론 및 응용’ 등 연구물 다수
90년대 중반부터 머리카락 작품 활동도

▶연세에 비해 얼굴이 참 고우십니다. 비결이 있으신지요.

“미용실은 여성들의 숨겨진 아름다움을 찾아주는 곳이다. 나이는 많지만 깔끔하고 최대한 아름답게 보이는 게 미용실을 찾는 손님들에 대한 예의라고 생각한다. 어느 직종이라도 마찬가지다. 자신을 단정하게 꾸미는 것이 상대방에 대한 예의이고 미용실은 이런 것에 더욱 신경을 써야 한다. 몸이 아무리 아파도 미용실에 나올 때는 얼굴과 머리를 세심하게 매만진다. 손님들을 더 젊고 아름답게 만드는 일을 하다보니 나 스스로도 젊어지는 것 같다.”

▶미용업에 발을 들여놓게 된 계기가 있었을 듯합니다.

“충청도에서 태어났는데 대구에 외가가 있었다. 서울 영희실업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우연히 외숙모집이 있는 대구에 왔다. 외숙모가 머리하는 데 따라갔는데 하얀색가운을 입고 머리를 자르는 미용사가 아름답고 멋있어 보였다. 그래서 미용일을 배우기 시작했다. 손재주가 있었는지 다른 사람보다 빨리 배우고 솜씨가 좋다는 이야기도 많이 들었다. 미용학원에서 미용일을 배운 뒤 운 좋게 중구 화전동에 있는 진미용실에 취직할 수 있었다. 직원이 30명이 넘는 대형미용실이었다. 미용 보조일을 하면서 실력을 쌓아나갔다. 1960년 대 중반이었던 것 같다. 중구 향촌동에 내 생애 첫 미용실인 티파니미용실을 개업했다.”

▶한창 일할 때 미용대회에 많이 나가서 좋은 성적을 거둔 것으로 압니다.

“그 당시 이래저래 참 많이 바빴다. 20대 중반 결혼을 하자마자 아이들을 넷이나 낳았는데 아이들을 남편에게 맡겨두고 국내는 물론 미국, 프랑스 등 세계 여러 나라에서 열리는 미용대회에 출전했다. 공무원인 남편은 이렇게 바깥일에만 신경을 쓰는 나를 나무라지 않고 오히려 격려해주었다. 해외 미용대회에 나갈 때는 경비까지 챙겨주었다. 이런 남편 덕분에 더 열심히 미용연구를 했고 그래서 좋은 성적을 거둔 것 같다.”

[이사람] 대구경북 유일 ‘대한민국 미용명장’ 임호순 신라미용실 대표
임호순 명장이 머리카락을 이용해 만든 작품.

▶미용대회에서 인정을 받았으니 스카우트 제의도 많이 들어왔을 텐데요.

“미용대회에서 잇따라 좋은 성적을 내자 제가 미용실을 운영하고 있는데도 예전에 근무했던 진미용실을 비롯해 서울의 큰 미용실에서 스카우트 요청이 많이 들어왔다. 하지만 가정이 있던 터라 서울에 가지 못하고 다시 진미용실에 들어갔다. 미용실 대표님이 제가 미용공부를 할 수 있도록 여러 가지로 많이 배려해주었다. 그 당시는 서울 명동과 부산 광복동이 대구보다 더 유행을 앞서가는 곳이라 수시로 그곳의 미용실을 찾아가 미용을 배웠다. 외국영화도 자주 봤다. 해외의 최신 머리스타일을 볼 수 있는 방법으로 영화관람이 최고였다. 이렇게 바쁘게 뛰어다니다보니 집에 오면 늘 파김치가 되었고 가정일은 뒷전일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가족들이 불평하지 않은 것이 감사하다.”

임 명장의 왕성한 활동은 그의 화려한 경력만 봐도 쉽게 알 수 있다. 1980년대 초반 영국 비달사순 아카데미, INAC 프랑스 국립미용연구원을 수료했고 86년 월드챔피언 경기대회 파견 선수권대회 대상을 수상했다. 1980~2004년 대구시기능대회 미용부문 심사장, 1987~2004년 대구시장배 미용경기대회 심사위원장, 1994년 파리세계미용대회 심사위원장 등을 지냈다. 대구시미용사회 협의회장, 대한미용사회 중앙회 부회장 등도 역임했다. 대학에서도 활동했는데 경북대 경영대학원 뷰티아트과정 책임교수, 경북과학대학 뷰티디자인 위탁과정 책임교수, 울산대 최고경영자과정 미용학과 주임교수 등으로 있었다. 그는 미용연구에 오랫동안 매달려온 성과를 ‘History Of Hair Design(이집트고대)’ ‘색채이론 및 응용’ ‘헤어디자이너를 위한 업스타일’ 등의 저서를 통해 보여주기도 했다. 그의 활동은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다. CACF(한불미용예술인회) 한국지부 회장, 대한민국명장회 대경지회 회장, 호산대 석좌교수, 양산대 대학원 미용학과 교수 등으로 활동 중이다.

▶그 당시 선생님에게 머리하려는 사람이 줄을 설 정도였다고 들었습니다.

“그 정도는 아니다(웃음). 1970년대 초반 대구에서 춘앵각, 오비카바레 등이 유명했다. 최신 유행은 이곳에 있는 여성들이 주도했다고 볼 수 있을 정도였다. 그 당시 올림머리가 특히 인기였는데 많을 때는 70명이 넘는 손님을 받았다. 잠시도 쉴 수 없어서 육체적으로 고달팠지만 나를 믿고 찾아와준 손님들이 고마웠다. 감사했기 때문에 더욱 최선을 다해 일했다. 그런 것들이 결국 대한민국 명장이라는 좋은 결과를 가져온 것 같다.”

▶육체적으로 힘든데도 미용일을 그렇게 좋아한 데는 나름 이유가 있을 듯합니다.

“미용은 살아있는 사람의 머리를 손질하는 일이다. 내가 아무리 같은 머리를 해도 머리카락의 주인에 따라 그 머리는 전혀 다른 이미지를 준다. 그러니 하나도 같은 게 없는, 세상에 단 하나뿐인 머리가 되는 것이다. 아름다운 얼굴을 더욱 돋보이게 하는 것도 머리다. 또 머리에 따라 그 사람의 이미지가 확연히 달라지기도 하기 때문에 머리를 통해 새로운 이미지를 만들어나가는 과정이 즐겁다. 내가 정성을 쏟아부어 손질한 머리에 만족하는 사람들을 보면 나 역시 행복하다. 육체적 고달픔은 이런 행복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머리카락을 이용해 예술작품도 만들고 있는 것으로 압니다.

“미용업에 꽤 오래 종사하다보니 새로운 미용일을 해보고 싶었다. 1990년대 중반부터 머리카락을 이용한 예술작품에 관심을 갖고 틈 날 때마다 작품을 만들었다. 1997년 경북대 경영대학원 뷰티아트과정 책임교수로 있으면서 이 작업에 본격적으로 매달렸다. 머리카락을 다양한 색으로 염색해 무궁화, 숭례문, 태극기 등의 조형작품을 만들었다. 화가가 물감으로 그림을 그리듯이 나는 머리카락으로 그림을 만들었다. 머리카락 조형작품에는 커트, 컬러링, 드라이 등 미용의 총체적인 기술이 투입돼야 한다. 머리카락으로 사물을 표현하다보니 때때로 표현의 한계에 부딪혔는데 이 때문에 미용에 대해 더 깊이 연구했다. 숭례문 작품의 경우 기와의 입체감을 어떻게 표현할까 고민하다가 나만의 방법을 개발했는데 이럴 때 그 희열감이 그 작업을 놓지 못하게 한다.”

▶대한민국명장회 대경지회 회장도 4년간 맡고 있는데 힘들지 않습니까.

“2년 임기인데 한 번 더 맡아 하고 있다. 정기적인 모임을 갖고 회원전 등을 열고 있는데 회원분들이 잘 도와줘 크게 힘들지 않게 일하고 있다. 대한민국 명장들의 뛰어난 실력을 널리 보여줄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고 있다.”

▶앞으로의 활동에 대해서도 한마디 부탁드립니다.

“주위를 둘러보면 이일저일을 왔다갔다하며 인생의 중심을 잡지 못하는 젊은이들이 많다. 한 번 미용업에 종사했으면 힘들어도 천직이라 생각하고 열심히 일하라. 그러면 분명히 좋은 성과가 있다. 그리고 이런 후배들을 위해 내가 쓸모가 있다면 작은 도움이라도 주고 싶다. 미용일은 기술도 중요하지만 자신의 일에 대한 자부심도 강해야 한다. 그래야 뛰어난 미용인이 될 수 있고 진정한 장인으로 발전할 수 있다.”

글=김수영기자 sykim@yeongnam.com
사진=이지용기자 sajahu@yeongn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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