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걸리버의 눈을 가진 목수”

  • 이춘호 손동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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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7-08-25   |  발행일 2017-08-25 제33면   |  수정 2017-08-25
[소설기법의 인물스토리] 미니어처 전문가 이충균
학창시절, 호기심으로 물건 분해 즐겨 ‘제2의 에디슨’ 별명
재주 알아본 지인 추천…대구 불로동 목공예단지 사회 첫발
1년 배울 일을 1주일 만에 터득…2년6개월 만에 공장장까지
수제·기계목공 합친 ‘기계서각’서 이젠 축소 모형물 전문가
20170825
좁은 작업장에서 만든 미니어처 기타. 아직 세상의 빛을 보지 못하고 일부 마니아에게만 유통되지만 작품이 완성되면 그의 미소는 만월보다 더 밝다.

나는 ‘나무’다. 그걸 깨닫는데 거의 40년이 걸린 것 같다. ‘목생목사(木生木死)’, 인간은 나무에서 태어나 결국 나무(관) 속으로 들어가는 것 아닌가. 그렇게 본다면 내가 목수가 된 건 ‘천운(天運)’인지도 모르겠다.

나는 다른 목수와 결이 다르다. 축소된 모형물인 ‘미니어처’만 전문적으로 만드는 목수다. 난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물건을 조그마한 모형물로 만드는 것, 그게 여생의 포부다. 인간도 우주의 축소판이니 어떻게 생각하면 특별한 미니어처. 난 종일 곰팡이 냄새 풍겨나는 지하실에서 새로운 미니어처에 생명력을 불어넣고 있다. 그렇다면 나도 ‘조물주’인가? 이런 내 생각을 누가 엿본다면 날 몽상가라고 나무랄 거다. 지난 4월 이런 나와 기꺼이 결혼해 준 아내는 분명 내 삶의 ‘중심잡이’다. 몽상의 세계로 빠져드는 나를 치열한 현실 속으로 데려와준다.

‘삶이란 해보고 싶은 걸 해보고 사는 것.’

언젠가부터 난 그 말을 ‘금과옥조(金科玉條)’처럼 품고 살아간다. 해보고 싶은 것, 만약 모든 사람이 그걸 하고 산다면 존 레논의 노래 ‘이매진’의 가사처럼 전쟁도 국경선도 사라질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런 삶이 가능할까.

부모는 모두 안동이 고향이었다. 안동댐으로 수몰되면서 아버지는 적잖은 보상금을 거머쥐고 대구로 나왔다. 영신중·고 시절은 호기심의 나날이었다. 다들 날 보고 ‘제2의 에디슨’이라 했다. 좀 특별하다 싶은 물건은 꼭 분해해봐야 직성이 풀렸다. 라디오는 늘 내 호기심의 침공을 받았다. 뒷감당도 생각하지 않고 일단 몸체에 박혀 있는 나사부터 죄다 풀어버렸다. 이름을 알 수 없는 온갖 부품을 하나하나 공책에 그리면서 혼자만의 상상의 나래를 폈다.

고교시절, 내 호기심은 점점 그림쪽으로 옮겨붙었다. 미술대학에 진학하고 싶었다. 그런데 운명의 신은 꼭 그런 대목에 볼썽사나운 버전으로 나타나기 마련이다. 나름 윤택하게 살았던 우리 집안이 졸지에 거덜나버린 것이다. 동구 봉무동쪽으로 이사를 가서 아예 큰 축사를 짓고 돼지를 키우던 아버지. 그런데 돼지파동이 터졌다. 평소 만면에 미소를 짓던 여러 거래처가 순식간에 악다구니로 돌변했다. 온갖 차압이 난무했다. 안동양반인 양심 보드라운 아버지는 그냥 빚잔치로 백기투항했다.

난 풍비박산 된 집을 나와버렸다. 내 끼와 열정을 실험할 수 있는 공간으로 갔다. 바로 동구 불로동 목공예단지였다. 한 지인이 내 끼를 알아보곤 그곳을 추천했다. 그 공장은 대추나무를 갖고 염주, 묵주 등 각종 액세서리를 만드는 공장이었다. 시끄럽게 돌아가는 전동기, 그리고 생전 처음보는 온갖 목재와 공구가 밤하늘의 별빛처럼 다가섰다. 하지만 처음부터 고난도 기술을 가르쳐줄 장인은 없었다. 소림사 입문자처럼 처음에는 청소하고 밥을 짓는 등 궂은 일만 했다. 근성테스트 기간이었다. 그런데 남들이 1년에 배울 수 있는 일을 난 불과 1주일만에 다 터득했다. 일 하는 과정이 그대로 머리에 입력됐다. 공구별 기능을 다 정리했다. 그리고 기술자가 나무를 어떻게 다루는지, 마감은 어떻게 하는지도 파악했다. 주위에선 ‘일머리를 타고난 친구’라고 했다. 덕분에 2년6개월만에 공장장이 된다.

궁궐 같은 한옥을 다루는 도편수를 비롯해 옻칠장, 장승조각가, 제기장, 가구장, 서각인 등 참 다양한 목수가 있다. 내가 생애 처음으로 거머쥔 목공기술은 ‘기계서각’이다. 수제목공과 기계목공을 합친 스타일이랄 수 있다. 당시 대구는 그런 기술자가 몇 명 없었다. 상하로만 오르내리는 전동기를 이용해 나무를 전후좌우로 움직여가면서 온갖 모양의 글씨와 모양을 잡는 건데 말처럼 쉽지 않다. 드릴·톱을 적절한 깊이로 유지하면서 원하는 자형을 파내려면 고도의 감각과 집중력, 기술이 필요한다. 당시는 레이저조각기, 3D프린터조차 없던 시절이라 나의 그런 기술은 단연 주목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학창시절 대책없던 내 호기심이 기술의 날개가 되었다. 목공예학원에서 배운 기술이 아니라서 더 개성이 빛났다. 감이 좋을 땐 지름 2.2㎝ 굵기의 도장용 대추나무 둘레에 반야심경을 초서체로 모두 새겨넣을 수도 있었지.
글=이춘호기자 leekh@yeongnam.com 사진=손동욱기자 dingdong@yeongn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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