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요칼럼] 나쁜 놈의 국선변호인 활용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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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7-10-18   |  발행일 2017-10-18 제30면   |  수정 2017-10-18
결정적 순간 변호인 바꿔
시간을 질질 끄는 수법은
주로 사기범들이 쓴다
재판부도 모를리 없지만
방어권보장 차원 불가피
[수요칼럼] 나쁜 놈의 국선변호인 활용법

직업이 직업이다 보니 전 대통령의 변호인단이 전원 사임했다는 뉴스를 남들과는 조금 다른 관점에서 보게 된다. 구속 피고인은 변호인 없이 재판을 진행할 수 없도록 법이 규정하고 있으니, 사선변호인이 전원 사임을 한 상황에서 즉각적으로 새로운 사선변호인이 선임되지 않는 한 재판부는 국선변호인을 선정할 수밖에 없다.

그렇게 선정된 국선변호인은 원치 않는 언론의 집중 관심을 받으며 재판 준비를 해야 할 텐데, 10만쪽에 이른다는 방대한 수사기록과 6개월 동안 진행된 공판 과정을 짧은 시간 내 정리해 소화할 수 없는 게 당연하다. 무엇보다 피고인이 변호인 접견을 거부하면 면담할 방법도 없고, 피고인 주장을 들을 수 없으니 당장 예정된 증인 신문을 준비하기도 불가능하다.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변호인 석에 앉아야만 하는, 꿔다놓은 보릿자루 같은 국선변호인 처지는 상상만 해도 아찔하다.

내가 저 재판의 국선변호인이 될 가능성이 전혀 없음에 안도하며 감사하다, 문득 몇 년 전의 사건이 생각났다. 내가 만난 피고인 중 ‘가장 나쁜 놈 그룹’에 꼽힐 사건이다. 죄질도 나쁘지만 변호사보다 법을 더 잘 알아 국선변호인 활용을 얼마나 잘 하는지, 그에게서 많이 배웠을 정도다.

재력 있는 여자에게 접근해 값비싼 보석을 사 주고 세련된 매너로 마음을 얻은 뒤 여자 재산을 하나 둘씩 빼앗아 갔다는 사기 혐의로 재판을 받던 그가 쓴 방법은 이렇다. 사선변호인을 선임해 재판을 받다가 가장 핵심적 증인 신문을 앞두고 사선변호인을 해임하고, 재판부로 하여금 할 수 없이 국선변호인을 선정하도록 해 국선변호인 도움을 받다가, 국선변호인이 사건을 파악할 만하면 그때 다른 사선변호인을 선임해 국선변호인 선정을 취소시키는 식이다. 변호인마다 사건 파악 및 변론 준비를 위해 시간을 필요로 하니 변호인을 몇 번 바꾸면 별것도 아닌 사건을 1년 정도는 쉽게 끌 수 있다.

국선변호인 제도를 악용하는 대표적인 방법이 그와 같이 시간 끌기에 활용하는 건데, 주로 불구속 상태에서 재판받는 사기범들이 많이 쓴다. 피고인이 시간을 끄는 목적은 돈을 마련할 시간을 버는 한편 하염없이 더딘 법적 절차에 피해자가 절망하도록 만드는 것이다. 피해자가 ‘저놈한테서 돈을 다 받기란 불가능하겠다. 억울하지만 조금이라도 받고 끝낼 수밖에’라는 생각을 가질 때까지 기다렸다가 선고 직전에 헐값으로 합의해서 집행유예를 노린다.

그의 사건을 맡았을 당시 나는 변호사가 된지 얼마 되지 않아 그런 전략을 몰랐다. 순진하게 “사선변호인이 왜 갑자기 사임했나요, 수임료를 다 드리지 못했나요?”라고 물어봤을 정도였다. 멀쑥하게 잘생긴 그는 예의 바르고 깍듯하게(직업적 사기꾼들의 특성이다) 나를 대했지만, 속으로는 현실을 전혀 모르는 변호사를 얼마나 비웃었을까 생각하면 아직도 뒷목이 뻐근하다.

내가 사건 파악이 제대로 된 무렵 그는 나에게 통보도 없이(그렇게 예의 바르던 사람이 어느 순간 태도를 180도 바꾸는 것도 사기꾼의 특징이다) 새로운 사선변호인을 선임했는데, 이 지역에서 가장 잘나가는 전관 출신 변호사였다. 그렇게 2년 정도를 끌더니 선고기일을 앞두고 연락두절 상태를 만들어 결국 피고인 출석 없이 실형 선고가 되었다. 그는 1심 마지막 사선변호인을 통해 항소장을 제출해 놓고 아직도 도망 다니는 중이다. 그런 와중에 돈을 마련하고 피해자를 구슬려 항소심에서 집행유예를 받아보려는 심산이리라.

재판부도 그런 전략을 모를 리 없다. 하지만 형사소송의 이념인 피고인의 방어권을 최대로 보장해 주려면 어쩔 수 없다. 왜 저런 나쁜 놈에게 국가 비용으로 변호인을 선정해 주느냐는 주장도 이해는 되지만, 법을 악용하는 놈이 나쁜 것이지 국선변호인을 선정해 주는 법이 나쁜 건 아니다. 그러니 나도 이제는 그와 같은 사건에 선정되면 알고도 ‘당해’ 주는 심정으로 변론 준비를 한다.

변호인단이 전원 사임한 저 역사적 재판에서 선정될 국선변호인도 변론 기회가 사실상 차단된 현실을 알면서도 변론 준비를 할 수밖에 없으리라. 알고도 ‘당해야’ 할 그 처지가 참 애꿎다. 정혜진 (국선전담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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