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산책] 마음의 전쟁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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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7-11-03 07:56  |  수정 2017-11-03 07:56  |  발행일 2017-11-03 제18면
[문화산책] 마음의 전쟁터
고현석<영화감독>

마틴 스콜세지, 데이빗 핀처를 비롯해 웨스 앤더슨, 리처드 링클레이터, 올리비에 아사야스, 구로사와 기요시 등에 이르기까지 거장들의 스승이자 오늘날까지 많은 영화학도들에게 영감을 주고 있는 명실상부한 서스펜스의 대가 알프레드 히치콕은 런던 출생으로 영국에서 처음 영화를 시작하였다.

그는 1925년 ‘프리주어 가든’으로 데뷔해 이듬해 발표한 ‘하숙인’은 평론과 흥행에서 모두 큰 성공을 거두었다. 이후 ‘사보타주’ ‘39계단’ 등 내놓는 작품마다 연속 흥행에 성공한다. 그러나 그가 계속 영국에서 필모그래피를 쌓아나갔다면 오늘날 히치콕의 위상은 조금 달랐을지도 모른다.

할리우드 스튜디오 영화제작자 데이비드 O. 셀즈닉은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를 제작하며 영화사에 길이 남을 역작을 남긴다. 그의 나이 불과 서른여섯 때의 일이었다. 그는 이미 할리우드의 전설이 되어있었고 이후 ‘무기여 잘 있거라’에 이르기까지 굵직한 업적을 남겼다. 그러나 그의 진정한 업적은 히치콕을 할리우드로 불러온 것이었다.

히치콕은 감독이란 영화 제작의 모든 권한을 가진 자라고 생각했고 특유의 카리스마로 촬영현장을 장악했다고 한다. 그러나 당시 할리우드의 제작자들은 그 권한이 제작자에게 있다고 생각했고 셀즈닉은 그들 가운데에서도 그 권한을 강력하게 주장한 이였다. 감독이란 언제든 교체할 수 있는 기술자로 봤으며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도 3명의 감독과 15명의 각본가를 교체하면서 제작되었다. 그러니 두 독재자의 불화는 예견된 일이었다. 히치콕과 셀즈닉은 사전제작부터 충돌하는 일이 잦았고 매일같이 언쟁을 벌였으며 후반 제작에서 편집권을 가져가려는 셀즈닉에게 히치콕은 분통을 터트렸다고 한다. 히치콕의 첫 할리우드 진출작인 ‘레베카’는 그렇게 만들어졌다.

대부분의 영화는 많은 배우와 스태프의 협업을 통해 제작된다. 영화감독은 단지 영화를 연출하는 역할만 하는 게 아니라 다른 생각, 다른 마음으로 모인 배우와 스태프와 소통하고 의견을 조율하며 공통된 지점을 향해 나아가야 하는 역할을 맡는다. 연기는 배우만 한다고 생각하지만 촬영현장에서는 감독도 연기를 해야 한다. 짐짓 화가 난 척을 해야 할 때도 있고 과장된 감정 표현을 해야 할 때도 있다. 때로는 격렬하게 언쟁을 벌여서 상대를 납득시키거나 납득을 해야 하는 때도 있다. 촬영현장이라는 마음의 전쟁터에서 한바탕 전쟁을 치르고 나면 조금은 더 성숙해진 기분이 드는 건 착각만은 아닐 것이다.

히치콕은 ‘레베카’ 이후로 셀즈닉과는 사전 계약된 ‘스펠바운드’까지 작업하고 완전히 결별하게 된다. 히치콕의 역작 ‘오명’은 그 이듬해 탄생되었고 그 이후로 세간이 기억하는 ‘현기증’ ‘싸이코’ ‘새’가 탄생했다. 그렇게 히치콕은 셀즈닉과 마음의 전쟁을 치르면서 영화사의 절대적인 존재로 도약할 수 있었던 건 아닐까.고현석<영화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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